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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의 크리스마스, 20살의 설날

누군가 내게 곧 추석이라고 알려주었다. 알려주지 않았다면 9월 15일(음력 8월 15일)은 여느 때처럼 덧없는 하루에 불과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잘 살고 있느냐(잘 지내느냐)'고 안부를 물어주었다. 고마운 일이지만, 질문의 방향이 어긋나 솔직하게 답하는데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면 차라리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잘 죽어가고 있느냐'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추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사전적으로 정의된 어떤 전통 이상임에 틀림없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가족과 친척. 그들이 한 집에 모여 교류, 교감을 하고 공동의 소소한 가치를 재확인하는 구실. 그것이 명절 본연의 임무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였을 때 기성세대가 2030에게 취직과 결혼에 대해 섣부른 질문이나 초점에 맞지 않은 훈계를 자제하도록 권하는 기사들이 종종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들의 관계에 금이 가 명절의 의미가 퇴색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새 풍토조차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가슴으로 와 닿지는 않는다. 나는 차라리 이렇게 묻는다.

'아직도 추석이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이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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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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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다 설명하기는 힘든 사연 하나쯤, 고통 하나쯤 있다. 그렇다고 각각의 것들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19살, 2007년 12월 25일에 집을 나왔다. 19살부터 28살이 된 지금까지 나는 집이 없다. 원래 살던 집,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지만 나중에 삼촌들이었던 사람들이 형제 다툼 끝에 그 집조차 독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따라서 나는 돌아갈 집이 없다. 지난 9년간 나는 이른바 '특별한 날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기능이 마비돼 왔다. '특별한 날들'의 의미가 점점 뚜렷해지는 게 아니라 반대로 희미해지게 사회화되었다. 불완전하게 보내는 '특별한 날들'에 애써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비참함을 느끼는 것보다, 차라리 그런 날들을 내 삶에서 제거하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집을 나왔을 때, 거리의 가게들은 빨갛고 하얀 잡동사니들로 이른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냈다. 식당 유리창 너머로 이따금씩 단란해 보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다. 몇몇 가족들은 취직이나 결혼 이야기를 나누었을 수도 있지만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내게 중요했던 진리는 내가 밤새 계속 걷지 않으면 얼어 죽을 것이라는 것, 지하철 2호선 순환 열차는 아침에 문을 연다는 것이었다.

내 마음에는 명절에 대한 추가적인 비참함을 들여놓을 마음의 공간 따위가 없었다. 아침을 맞아, 나는 2호선에 올라타 열차가 서울을 빙빙 돌 동안 계속 잠을 잤다. 씻는 것은 장애인 화장실에서 몰래 해결했다. 그렇게 며칠을 버텨 나는 20살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도 설날도 그렇게 나의 삶에서 사라졌다. 사라진 것은 그것들뿐만이 아니다.

인스턴트 미역국

어른이 된 나는 PC방에서 싸게 머물 수 있는 방이 없는지 검색을 해봤다. 수능이 끝나고 서빙 알바를 해 번 돈으로는 원룸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다 보증금 없이 싼 월세로 머물 수 있는 '고시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곳도 나름대로 일손을 필요로 한다는 것도. 월급 70만 원에 방 제공. 가산디지털단지 인근 모 고시원의 종일 총무가 됐다.

약 4~6㎡의 빠듯한 공간에 책상, 의자, 침대, (일부는) 샤워실이 있는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복도 쪽 혹은 상가 건물 바깥쪽으로 창문(이라기보다는 숨구멍)들이 나 있었다. 업종은 분명 '고시원'으로 등록돼 있지만 고시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명백한 빈곤 주거 시설임에도 사회는 가난을 없다치고 사는데 익숙해져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 무언가 의미가 없는 것에도 형식 상 의미를 부여한다. 나 역시 한 때 그런 미련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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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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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7일. 생일을 맞았다. 생일에 대해 딱 두 가지가 떠올랐다. 케이크와 미역국. 하지만 케이크는 비쌌다. 예전에 엄마가 미역국을 끓여줬던 게 떠올라 편의점에서 인스턴트 미역국을 샀다. 고시원 주방에서 용기에 물을 붓는데 손님이 들어왔다. 손님이 말을 걸었다.

손님: 총무님 미역국 드시나 봐요.
나: 네, 오늘 생일이라서요.
손님: 허... 생일인데 '그렇게' 드시는 거예요? 어떡해~
나: ...

간단한 대화였고 손님도 악의는 없었지만, 무언가 내 처지가 유감스러워 보인다는 걸 알게 됐다. 다시는 유감스러운 일을 만들지도 '특별한 날들'을 자축하지도 않기로 다짐했다.

추석 소멸 사회

추석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고시원 총무 일을 하면서 다시 수능 공부를 해 대학에 합격했다. 몇 개월 후 엄마도 집을 나왔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총무 일을 하며 모아뒀던 돈으로 대학 기숙사에서 지내다 군 휴학계를 내고 입대를 했다.

매우 힘들었다. 그런데 군대에서도 그냥 쉬게 놔두면 좋았을 텐데, 어김없이 그 '특별한 날들'을 축하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간부들은 기어이 명절마다 차례 상을 준비시키고 병사들에게 절을 시킨 뒤(물론, 기독교 믿는 애들은 빼줬다) 사진을 찍어 상급 부대에 보고를 해야 직성이 풀렸다. 물론, 그런 보여주기식 통과 의례만 참고 견뎌주면 며칠씩 누워서 잘 수도 있고 부식도 나와서 한편으로는 그런 '특별한 날들'이 기다려지긴 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전역 후, 나는 엄마의 월세 집에서 잠시 머물렀다. 엄마는 재혼을 했고 나는 아저씨가 불편했다. 어차피 방도 두 개 밖에 없어서 여동생이 지내야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삶의 영역을 존중하고 이곳저곳 이삿짐을 옮겨 다니는 유목민으로 홀로 자립해왔다. 이러한 세월을 흘려보내며 나는 이 땅 선조들인 정주민들이 만든 전통인 각종 '특별한 날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도록, 사회화되었다.

서울의 한 고시원 방 내부.
 서울의 한 고시원 방 내부.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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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년간 내 삶에서 변한 것은 1인당 최소주거면적 14㎡도 안 되는 고시원을 탈출해, 조금 더 넓은 단 칸 방으로 이사를 왔다는 사실뿐이다. 음력 8월 15일, 다시 말해 양력 9월 15일은 평소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뭔가 기분을 내고 싶다면 평소보다 조금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엄마와 동생에게 안부 전화를 걸지도 모르지만 그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니 이제는 사회가 답할 차례다(정말 추석에 무슨 의미가 남아있다면). 나뿐만이 아니라 이 사회에는 가족이 완전히, 혹은 일부가 해체된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나는 지난 몇 년간 가산디지털단지, 상계동, 구로 시장, 대학동, 노량진 등을 옮겨다니며 직접 이들의 삶을 목격했다(관련 기사: 고시원 총무는 시체 썩는 냄새를 안다).

따라서 사회는 온전한 가족 형태를 아직 유지하는 이들의 추석을 기본값으로 생각하기보다 현실을 직시해주었으면 좋겠다. 추석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 질문에 답할 능력을 이미 상실했다. 사회조차 답할 수 없다면 이제는 솔직히 말해줬으면 한다. 다른 '특별한 날들'처럼 추석도 이미 죽었다는 것을.


태그:#추석, #고시원, #미역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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