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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과 여성 차별에는 반대하지만, 장애인 차별에는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사람은 왜 이런 태도를 취하는 걸까?

그가 흑인·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이유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생각 때문이 아닌, 그저 특정 집단의 편들기에 불과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장애인 차별 반대가 자신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이유야 어쨌든, 차별에 선택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물론 우리 사회에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평등'이 '상식'이 된 건 상대적으로 최근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는 '갑'에 대항하는 '을'의 권리 확장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는 동물에게 확장되고 있다. 

지난 20대 총선에서 녹색당·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들이 '동물권'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이처럼 동물의 권리에 대한 공론화가 이뤄지는 배경에는 동물을 인간이 맘대로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닌 '생명'으로 존중하자는 인식이 있다. 

서구에서는 채식주의 캠페인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데, 육식은 동물의 권리를 가장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물론 육식을 끊는 것은 대다수 사람에게 쉽지 않다. 그래서 채식주의 캠페인은 가장 많은 저항에 부딪히는 동물권리 운동이다.

그런데 채식하는 사람들 중 태어날 때부터 채식을 한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모태 채식인도 드물게나마 있지만, 대부분 어떤 계기로 육식을 그만둔 사람들이다. 그 계기는 동물에 대한 측은지심일 수도 있고, 종교나 건강상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채식하는 이유 중에는 '이성'과 '윤리'도 있다.
 
공리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는 인간의 육식이 윤리적이지 않은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육식이 인간이 아닌 종들을 차별하는 '종차별주의(Speciesism)'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그는 종에 상관없이 '쾌고감수 능력(고통 그리고/또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는 모두 평등하다고 했다.

피터 싱어의 이러한 생각이 담긴 <동물 해방>은 1975년 출간 이래 동물을 이용하는 산업에 대한 반대운동을 촉발시켰고, 오늘날 '동물해방 운동의 바이블'로 일컬어진다.

<동물 해방>을 번역하여 국내에 알린 김성한 교수(전주교대)의 강연이 서울 마포구의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더불어숨센터에서 열렸다. 지난 8월 30일, <공리주의와 동물의 도덕적 지위>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이날 강연에서 김성한 교수는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론의 근간이 되는 공리주의에 대해 설명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이다  

사람들이 먹는 소·돼지·닭을 비롯한 가축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극도의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간다. 이런 현실을 가리켜, 호주의 동물보호활동가인 제임스 애스피는 "지금 이 순간, 동물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악몽보다도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먹는 소·돼지·닭을 비롯한 가축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극도의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간다. 이런 현실을 가리켜, 호주의 동물보호활동가인 제임스 애스피는 "지금 이 순간, 동물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악몽보다도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 조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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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교수는 공리주의가 보편주의적인 특징을 갖는다고 했다. 여기서 보편주의란 '나와 남을 동등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존재가 느끼는 행복과 고통이든 그것을 동등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공리주의에서는 흑인·여성·장애인·동물을 비롯한 소수자의 고통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 

또한 공리주의에서는 양자 간의 이익이 충돌하는 경우 '더 많은 고통을 겪는 쪽'을 우선 배려한다. 내가 백인이라서, 또는 내가 백인을 선호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백인의 이익을 흑인의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것을 공리주의에서는 '인종차별'로 간주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인간이라서, 또는 내가 인간을 선호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이익을 동물의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종 차별'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육식과 관련해서 비교해보자. 사람들이 육식을 하지 못해서 느끼는 고통과 동물들이 가축으로 사육·도살되면서 느끼는 고통 중 어느 쪽이 더 큰 고통일까? 고통을 객관적으로 측정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는 직관적으로 비교가 가능하다. 가축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엄청난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가 식탁에 오르기 때문이다. 돼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농장에서는 돼지들이 비좁고 열악한 공간에 갇혀 사는 밀집 스트레스 때문에 서로 공격하는 현상이 잦다. 심한 경우 다른 돼지의 신체를 파먹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돼지의 이빨과 꼬리를 자른다. 수퇘지의 경우 거세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이 마취 없이 이뤄진다. 돼지에게는 도축장에 가는 날이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햇빛을 보는 날일 수도 있다. 도살은 종종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죽음마저도 고통이 된다.

돼지들이 평생 겪는 중대한 고통에 비하면, 사람들이 육식을 참는 고통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공리주의자들은 채식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물과 식물 중 어느 쪽을 우선 배려해야 할까? 김성한 교수는 동물을 우선 배려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했다. 동물은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지만, 식물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동물과 식물 중 어느 한 쪽을 먹어야 한다면 육식보다는 채식을 해야 한다고 했다.

돼지가 '명품 백'에 기뻐할까?

김성한 교수의 <공리주의와 동물의 도덕적 지위> 강연.
 김성한 교수의 <공리주의와 동물의 도덕적 지위> 강연.
ⓒ 조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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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차별 반대를 자칫 '동물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김성한 교수는 동일한 처우가 동일한 양의 고통이나 행복을 산출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가령, 내가 어떤 사람에게 키스를 했다고 가정해보자. 키스를 당한 사람이 나의 연인이라면 상대방은 행복감을 느낄 가능성이 높지만, 지하철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난데없이 키스를 당한 경우라면 극도의 불쾌감을 느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과 동물을 동일하게 처우했을 때 양자가 느끼는 행복이나 고통은 다를 수 있다. 가령, 돼지에게 '고급 승용차'나 '명품 가방'을 제공하는 것은 무의미한 행동이다. 돼지에게는 돼지의 본성에 맞는 행복(가령, 적당한 먹이와 안락한 환경)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동물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은 무의미하다. 해당 동물의 복지에 맞는 대우를 해줘야 한다.

한편, 인간과 동물이 지닌 지적 능력의 차이를 내세워 종 차별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사람이 동물보다 지적으로 우월하니까 동물을 차별해도 된다고 한다. 김성한 교수는 이렇게 '차이'로 '차별'을 정당화하는 태도를 '경계논증'으로 반박했다. 경계논증이란 평균적인 성인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 예컨대 심각한 정신지체 장애인·치매 노인·식물인간·아기 등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따져보는 논증이다.

지능이나 이성능력을 기준으로 어떤 존재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한다면, 우리는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없는 사람들을 차별해도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또한 이런 차별을 일관적으로 적용할 경우, 아이큐가 200인 사람이 100인 사람을 노예로 삼는 것에 반대할 근거가 없어진다. 

'사실'이라고 '옳은' 건 아니다

김성한 교수가 번역하고 연암서가가 펴낸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
 김성한 교수가 번역하고 연암서가가 펴낸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
ⓒ 조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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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차별을 옹호하는 또 다른 주장으로 "육식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으니까 인간의 육식도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 있다. 이에 대해 김성한 교수는 육식동물은 생존을 위해 육식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다르다고 했다.

육식동물은 육식 없이 생존할 수 없지만, 인간은 잡식동물이므로 얼마든지 채식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건강하고 장수하는 무수한 비건(vegan; 일체의 동물성 재료를 섭취하지 않는 완전채식주의자)들, 채식주의가 건강에 이롭다는 전문가들의 보고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김성한 교수는 동물의 생태로부터 도덕적 지침을 구하겠다는 발상은 기회주의적인 태도라고 지적했다. 사람들은 '개XX'와 같이 동물을 비하하는 비속어를 즐겨 사용한다. 이렇게 평소에는 동물을 비하하다가 막상 고기가 먹고 싶으니까 동물을 본받겠다고 하는 것은 기회주의적인 태도라고 꼬집었다.

덧붙여, 반성능력이 없는 존재의 행동에 대해서는 도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도 했다. 가령, 아기가 옆에 있는 권총의 방아쇠를 우연히 잡아당겨 살인을 저질렀어도 우리는 아기에게 도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 동물 역시 반성능력이 없으므로 육식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반면 인간은 사유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

"인간이 동물을 먹는 것은 약육강식이며 자연스럽다"며 종 차별을 옹호하는 입장도 있다. 이에 대해 김성한 교수는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것이 '옳은 것'이냐고 반문하면서, 이러한 종 차별 옹호는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지적했다.

자연주의적 오류란 '사실(-이다)'로부터 '가치(-은 옳다/그르다)'를 직접적으로 도출할 때 범하는 오류를 말한다. 약육강식은 사실의 문제이지 가치(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종 차별을 옹호하는 것은 사실과 가치를 혼동하는 오류라고 했다.

넓게 보면 종 차별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가 동물을 대하는 태도에는 우리가 '약자'를 대하는 태도가 반영돼있기 때문이다. 김성한 교수는 동물 문제는 우리가 '갑'의 입장이 됐을 때 '을'의 입장에서 생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해보게 해준다고 했다.

또한 평소에는 상당히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다가도 막상 자신의 이익이 결부됐을 때는 객관성을 상실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고 했다.

뉴스를 통해 알려진 '갑의 횡포'만이 차별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갑질'을 하며, 심지어 그것이 차별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 시간 분량의 철학 강의를 한정된 지면에 소개한 이 기사가 어떤 독자들에게는 부족하게 느껴질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을 참고하기 바란다.

"사유 없는 실천은 맹목이고, 실천 없는 사유는 공허하다"

7년 전 기자가 채식을 결심한 데에는 <동물 해방>에서 얻은 사유의 영향이 컸다. 잡식 위주의 사회에서 채식만 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채식주의자를 자처하지만 실제 행동은 부족할 때가 많아 부끄럽다.

그럼에도 기자는 앞으로도 쭉 채식주의자로 살아갈 생각이다. 그 이유는 김성한 교수가 <동물 해방>의 역자 후기에서 강조한 "사유 없는 실천은 맹목이고, 실천 없는 사유는 공허하다" 가르침 때문이다.

김성한 교수는 세상에 대해 해박한 아무리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또는 윤리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했다.

최선을 다하기가 어렵다면 육식을 지양하는 최소한의 노력만으로도 동물의 고통을 줄일 수 있다. 완벽할 수 없다는 이유로 시도조차 하지 않거나 중도에 포기하기보다는 가능한 실천을 하는 것이 보다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데 보탬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채식주의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한 달에 네 번 굽던 삼겹살을 두 번으로 줄이는 실천, 밥상에서 육류를 줄여나가는 의식적인 실천이 변화의 시작이다. 고기·달걀·우유·모피·가죽·동물실험을 거친 제품 중 어느 하나부터 소비를 줄이고 그러한 실천을 늘리는 과정이 채식주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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