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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아침형 인간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최근 국내 연구결과에 따르면 50세 미만(18세~47세)에서 아침형 인간의 비율은 불과 18%였고, 50세 이상에서는 30%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형 인간이 무슨 성공의 지름길이라도 되는 양, 많은 이들이 잠이 덜 깬 유령처럼 출근했던, 그렇게 아침형 인간을 따라하던 시절이 있었다. 필자도 수차례 아침형 인간이 되고자 발버둥 쳤으나, 밤의 매력적 유혹을 쉽게 떨치지 못하고 늘 실패에 그쳤다.

그렇게 마흔의 고개를 넘어설 때까지 저녁형 인간의 진영에서 살던 내게 변화가 일어난 건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다. 집에서 떨어진 시골학교로 보내다보니 통학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해야 했던 것이다. 아침을 먹이고 7시 58분 통학버스를 태우려면 적어도 6시 반에는 일어나야 했다. 아침형, 저녁형 모두 해당이 안 되는 그저 잠이 많은 아내를 대신해서 내가 아침 당번이 되었다.

극진한 부성애로 중무장한 내게 기상 시간 한 시간 반 앞당기는 것 따위는 손바닥으로 모기 잡는 일보다 쉬운 일이다, 라고 자기 암시를 하며 기를 쓰고 일어났다. 졸고 있는 아이에게 억지로 밥을 떠먹이고 옷을 입혀 통학버스에 태우고 나면 시간이 애매했다. 이대로 출근하자니 너무 이르고, 그렇다고 집으로 다시 들어가기는 뭔가 아쉽고. 결국 좀 일찍 출근해서 아침시간을 보람 있게 보내기로 결론을 내렸다.

같이 읽어보자고 직원들을 꼬드겼다, 그 결과...

책장 사이마다 공부해 온 내용들로 꽉 들어차 있는 직원의 책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책장 사이마다 공부해 온 내용들로 꽉 들어차 있는 직원의 책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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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주어지는 자유시간 30분. 기타 연습을 할까, 인터넷 강의를 들을까, 같은 건물에 있는 기체조를 다닐까 이런 저런 고민을 했다. 하루 30분이란, 모아지면 큰 시간이 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뭔가 새롭고 거창한 일을 하기에는 어중간한 시간이다. 그때 눈에 띈 책이 바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아래 지대넓얕)이다. 지인에게 선물로 받았지만, 제목에서 뜻 모를 거부감이 들어 펴보지도 않고 책장으로 갔던 책이었다.

지적으로 좀 살아야 하지 않겠냐? 심심풀이 삼아 30분만 투자해서 같이 읽어보자고 직원들을 꼬드겼다. 경험론적으로 혼자 시작해서는 며칠 하다가 그만둘 거라는 확신에서 나온 일종의 배수진이었고, 쉬는 시간이면 스마트 폰만 만지작거리는 요즘 젊은 직원들에게 작은 변화를 줄 수 있겠다는 약간의 기대도 있었다.

다행히 직원 두 명이 현혹되어 미끼를 물었다. 물론 강요로 이루어진 일은 아니다. 모든 직원들에게 한 달에 한권 책을 읽고 독서노트를 제출할 것을 이미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확실히 하고 넘어 가야겠다. 그렇게 세 사람이 모여 아침마다 독서토론(정확히 말하면 함께 책 읽기)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 달도 안 되어 아침 모임에 참가하는 인원이 여섯 명으로 늘어난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읽어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지대넓얕>에 포함된 내용은 실로 방대하다. 그냥 얼핏 읽고 넘어가기에는 수박 겉핥기의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조금 깊게 읽어보기로 했다. 하루에 한두 장 정도를 읽고 넘어가면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나 잘 모르는 내용을 공부해서 발표하는 형식인 것이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의 태동을 이해하기 위해 프랑스 대혁명이나 중세 유럽의 봉건사회를 공부하고, 자본론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생애와 업적을 찾아본다거나,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6월 항쟁을 조사해오는 식이다. 가장 최근에는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사드 배치와 김영란법에 대해서도 각자가 공부해 와서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인원이 늘어날수록 더욱 깊이 있는 공부를 하게 됐다

주제가 하나 정해지면 A4용지 한장을 빡빡하게 채울 정도로 열심히 공부해 온다.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2 주제가 하나 정해지면 A4용지 한장을 빡빡하게 채울 정도로 열심히 공부해 온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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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세 명이서 시작할 때는 지적대화를 한답시고, 일부러 대화중에 책 읽으며 공부한 내용들을 유식한 척 우겨넣었다. 간식으로 빵을 먹으며 마리 앙투아네트 얘기를 끼워넣는 식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지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라고 티를 팍팍냈더니, 그걸 이해하지 못하거나 부러운 다른 직원들이 관심을 보이며 한명씩 합류하기 시작했다. 인원이 늘어날수록 공부해 오는 범위가 늘어났으므로 우리는 더욱 깊이 있는 공부를 하게 된다.

특히나 모르고 있던 역사, 혹은 오해하고 있던 부분들을 알아가면서 젊은 직원들은 감탄하거나 때론 분노했다. 자본가와 노동자, 진보와 보수의 본질을 알아가며 일명 보수의 고장에서 자라온 젊은이들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증세 없는 복지라는 말이 왜 사기인지,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서는 왜 마녀사냥의 타깃이 되었는지 며칠이 걸리든 토론했다.

친구들을 만나서 같은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눈 다음날 아침이면 살짝 풀이 죽어 출근하기도 했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다들 모르고 있던 내용들이었다. 친구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공부하는 그네들을 외계인처럼 대했다. 마르크스를 공부하면 여전히 불온한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들도 느껴야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직원들은 하나 둘 깨달았다.

사드 배치의 배경에는 어떤 뜻이 숨어 있는지, 보수 언론은 왜 자본가들의 편에 설 수밖에 없으며, 국민들을 세뇌시켜야 하는지, 그리고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왜곡된 근현대사 교육은 어떠한 문제점을 일으키는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해서 깨우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내용들을 충분히 깊이 있게 공부하기에는 아침 시간 30분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하룻밤 공들이면 충분히 읽을 책 한권을 6개월째 함께 읽고 있다. 이제 곳 책거리를 준비하고 있으며, 다음 책으로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투표를 통해 선정해 놓은 상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셋이서 시작했다가 현재는 직원 절반 이상이 함께 하는 아침 독서 토론.
▲ 아침 독토 장면-2 처음에는 셋이서 시작했다가 현재는 직원 절반 이상이 함께 하는 아침 독서 토론.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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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30분의 작은 투자는 누군가의 생각의 흐름을 수정 할 수 있다. 그런 시간이 겹겹이 쌓이다보면 그 사람의 인생도 충분히 바뀔 수 있다. 한두 사람씩 인생의 철학이 바뀌다 보면 언젠가는 세상도 변할 것이다. 무지의 영역에서 이해와 공감의 영역으로 넘어가다보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책을 소개하려는 의도로 쓴 글은 아니나, <지대넓얕>을 읽다보니 무릎을 치게 만드는 구절이 있기에 그 부분을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 한다.

'그래서 지적인 대화가 필요하다.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을 선별하는 시야를 갖지 못한 사람에게 그 선별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모든 정치는 썩었다면서 자신의 정치적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사람에게, 정치적 무관심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실제로는 보수 정당에 표를 던졌으면서도 집권한 보수정당이 서민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면서 열을 내는 사람에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알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어야 한다.'


태그:#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아침형 인간, #사드 배치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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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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