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듯이, 누구나 가슴에 한때 사랑했던 존재가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배우, 내가 사랑했던 노래, 내가 사랑했던 감독, 내가 사랑했던 드라마…. 그런가 하면 노래 한 곡, 또는 드라마(영화) 한 편 때문에 인생이 바뀐 분들도 있을 겁니다. 첫사랑만큼이나 우리를 설레게 했던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말]
"일자리가 없으니 젊은이들 가슴에 사랑이 없어진다."

지난해 말 잠깐 화제가 되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이다. 대통령의 어록은 쌓여만 가고 젊은이들의 가슴은 허해져만 간다. 작년 가을 시즌14를 마친 tvN의 장수드라마 <막돼먹은 영애 씨>는 일자리도 없고 가슴 속 사랑도 없어진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우리네 청춘들의 생존과 사랑에 대해 다룬 작품이다. 작품 속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며 일과 사랑이 사라지고 지옥이니 불반도니 하는 망조의 시대를 건너며 위로와 동질감을 느낀 청춘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지난 시즌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살펴보며 이 시대 청춘들의 일과 사랑에 대해 고민해 보겠다. 

[하나] 일자리: "풀칠이나 하며 살 수 있는 걸까" – 다이나믹 듀오 '청춘' 중에서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14>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14의 대표 이미지. 을을 지나 병·정의 삶을 사는 우리네 청춘의 자화상이었다.

▲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14>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14의 대표 이미지. 을을 지나 병·정의 삶을 사는 우리네 청춘의 자화상이었다. ⓒ tvN


<막돼먹은 영애 씨>의 주인공 영애(김현숙 분)는 2007년 시즌1에서 서른 살의 노처녀로 출연했다. 2015년 시즌14에서는 벌써 서른여덟 살이 되었다. 서른이든 서른여덟이든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싱글이다. 항상 박봉에 고용불안도 일상이었다. 지금껏 이직 네 번, 자진퇴직 두 번, 그리고 해고 두 번. 취직만 하면, 서른만 넘으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풋내기들의 믿음이 얼마나 허황한 것인지 영애 씨는 온몸으로 보여줬다.

지난 시즌14는 더욱 독해진 모양새로 출발했다. 악덕 업주의 표본과도 같은 조 사장(조덕제 분)은 등장과 함께 경영상의 이유로 영애와 업무가 겹치는 라 과장(라미란 분) 둘 중 한 명의 희망퇴직을 강권한다. 영애와 라 과장 모두 퇴직을 '희망'한 적이 없지만 해고는 언제나 희망적이거나 자발적인 수식어로 포장되어 실행된다.

살아남고 싶은 을들은 '갑 대 을 연합'과 같은 단순하고도 상식적인 전선을 형성해야 하나 갑의 온갖 이간질로 이마저도 쉽지 않다. 대신 을들은 자기들끼리 싸운다. 살기 위해서. 영애와 라 과장의 갈등은 같은 디자인 업무를 담당하는 신입사원 두식(김두식 분)에게까지 번진다. 을들을 싸움 붙이는 이 구도는 끊임없이 개인의 최소한의 자존심과 인성을 시험한다. 영애는 결국 참지 못하고 조 사장을 말 그대로 들이받는다. 영애는 자신을 해고하려는 사장에게 물리적 위해를 가했다. 이후의 스토리는 너무나 전형적이다. 약속했던 퇴직금조차 지급받지 못하고 노동위원회 같은 공적 기관에 억울함을 토로할 수조차 없는 현실.

이후 영애는 낙담할 새도 없이 재취업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하지만 나이 서른여덟의 여성 입사희망자를 받아줄 곳은 거의 없다. 면접 과정에서 노골적인 나이‧성차별을 당하며 번번이 낙방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시작한 게 생계형 창업이다. 여기까지 이 드라마는 현실에서 아주 쉽게 볼 수 있는 우리네들의 경로를 브라운관 화면에 빼곡히 펼쳐놓는다.

[둘] 사랑: "결혼이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걸까" – 다이나믹 듀오 '청춘' 중에서

술에 취한 영애 작품 속에서 영애는 자주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고 취한다.

▲ 술에 취한 영애 작품 속에서 영애는 자주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고 취한다. ⓒ tvN


이토록 현실적인 드라마에 유일하게 판타지적인 요소가 가미된 부분이 있다. 백마 탄 왕자님 같은 능력 있는 남자 주인공의 존재다. 바로 영애의 전 남친 김산호(김산호 분) 이야기다. 산호는 부잣집 아들에 명문대 출신이다. 키 크고 잘생긴데다 비싼 차도 탄다. 엄마친구 아들 중에도 이 정도 인물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이런 산호가 영애와 우연히 같은 회사 건물을 쓰게 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산호는 영애 곁을 머물며 거래처를 연결해 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영애에게는 놀랍게도 또 다른 남자가 하나 더 있다. 전 사장 이승준(이승준 분)이 그다. 1년 동안 영애와 '썸'만 타던 승준은 중국에서 '큰 건' 하나를 성사시킨 뒤 영애에게 청혼하려 했다. 하지만 지인에게 사기를 당하고 자신의 회사인 '낙원사'까지 조 사장에게 넘겨주고 만다. 청혼은 미뤄지고 영애와의 관계도 더욱 자신이 없어진다.

한편 영애의 러브라인(main plot) 외에 지난 시즌에는 작은 러브라인(sub plot)이 하나 더 나왔다. 신입사원 조현영(레인보우 조현영 분)을 둘러싼 삼각관계가 그것이다. 기본 구도는 영애의 러브라인과 어슷비슷하다. 산호와 이름까지 흡사한 선호(박선호 분) 역시 부잣집 아들에 서울대를 졸업했다. 키도 산호만큼 크고 얼굴도 산호만큼 잘생겼다. 산호만큼 비싼 차도 몬다.

현영에게 역시 또 다른 남자가 있다. '낙원사' 입사 동기 두식이 그다. 두식도 승준처럼 선호보다 키도 작고 못생긴데다 무일푼이다. 그리고 승준처럼 어딘가 항상 조급하고 여유가 없다. 늘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으로 "전쟁 같은 사랑"을 한다. 

이 두 개의 닮은 꼴 삼각구도(double plot)는 유사한 양상으로 변주되며 시청자들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최소한 지난 시즌에만 국한해 보면 영애·현영과 먼저 사랑하던 남자는 각각 승준과 두식이었다. 문제는 후발주자인 이른바 금수저의 자식들-산호와 선호-에 비해 승준과 두식이 상대적으로 흙수저로 비춰진다는 점이다. 승준은 태생 자체는 금수저라 할 수 있으나 본인이 사기라는 불의의 봉변을 당해 하향의 계급이동을 실현한 인물이다. 지방 출신의 두식은 말 그대로 태생적 흙수저다. 흙수저가 금수저에게 여자를 뺏기는 이 리얼리티 가득한 구도라니! 이쯤 되면 반도의 흙수저들, 단결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선후관계부터 따지면, 분명 흙수저의 자식들-승준과 두식-이 먼저 여성에게 상처를 안겼다. 승준은 영애에게 확신을 주지 못하고 1년째 무책임하게 썸만 탔다. 두식은 현영과 두 번의 취중 키스를 했고, 맨 정신으로 겨우 사랑고백을 했으나, 하룻밤 사이에 어려운 회사 사정을 이유로 들며 쿨하게(?) 없던 일로 돌려버리자고 제안했다. 두식의 돌변에 현영은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두식에게 뿌리며 "이것(커피에 젖은 두식의 셔츠)도 없던 일로 하지 그러냐!"라고 앙칼지게 나무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속 시원한 장면이지만 마냥 시원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인턴과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하던 두식은 연봉 5천이 될 때까지 연애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이다. 승준은 '한 사업'에 성공한 뒤 영애에게 청혼하려 했다. 이들은 부족한 주머니 사정 때문인지 사랑 앞에서 자주 머뭇거렸다. 가진 게 없어 남들보다 더 상처받을까 벌벌 떨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기 일쑤다. 그래서 자꾸만 사랑을 뒤로 유예하려 했다. 반면 금수저 덕인지 타고난 미덕인지 선호와 산호는 사랑 앞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승준과 두식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비겁했다. 여유나 자신감도 없었다. 물론 이는 다시 돈이 없으므로 여유와 자신감을 가질 수 없던 것이라는 반박을 가능케 하는 부분이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게임의 장에서 패를 적게 갖고 시작한 자들이 스놉(snob)이 되는 경우가 많다"(<마음의 사회학> 84쪽 중에서)지 않은가.

드라마 속의 또 다른 흥미 포인트는 영애와 현영이 일부 남성들이 속되게 칭하는 '된장녀'나 '김치녀'가 전혀 아니란 사실이다. 영애와 현영이 애초에 원한 건 단지 자신에게 보다 신경 써주고 다정하게 대해주는 이성의 존재였다. 영애와 현영이 승준과 두식에게 실망했던 건 그들이 확신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확신을 주지 못하는 비겁한 남성에게 상처받은 여성에게 잘생기고 돈 많고 매너 좋고 남자다운 남자가 나타났다. 그래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 한다. 이런 여성에게 된장이나 김치를 함부로 던질 수 있는 이 누가 있을까?

[셋] 가슴: "일월의 태양처럼 무기력한 내 청춘이여" - 자우림 '청춘예찬' 중에서

"당신은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누구와 사랑하고 있는가?"

대통령 이전부터 '일'과 '사랑'을 연결 지어 사고하던 이들은 많았다. 대표적으로 정신분석 전문의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들 수 있다. 그는 내담자를 만나면 제일 먼저 위의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사람을 만나고 있는가. 그것을 알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대충 그려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제 그 사람의 직업이 무엇이며 고용형태가 정규적인지 그렇지 않은지 여부만 알아도 대충 이 사람이 어떤 사람과 사랑하고 있을지 정도는 추측이 가능한 곳이 되었다. 일을 아예 하지 못하면 가슴에 사랑이 없어진다는 것쯤은 일국의 대통령부터 일개의 백수까지 다 안다.

가난한 이들 혹은 아르바이트 등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이들은 빈약한 물적 토대로 인해 결혼 같은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서사 불가능한 삶'이 이들의 몫이다. 하지만 사랑을 하고 싶은 건 젊은이들, 아니 모든 세대의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이런 불안정 노동종사자들에게는 장기적 호흡의 사랑이나 제도적 차원의 보장을 약속하는 결혼 외에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이 선택된다. 드라마 속 승준이나 두식의 그것처럼 언제든 없던 일로 치부해버릴 수 있는 비정식의 썸이나 하룻밤 사랑이 그것이다. 언제든 없던 일로 간단하게 지워낼 수 있는 자신들의 비정규적인 고용형태처럼.

대신 고소득의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이들은 그 물적 토대로 인해 다른 모든 것들을 거머쥘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인 건 역시 인성적 요소이다. 이들은 하루하루 밥줄이 불안한 치들이 절대 가질 수 없는, 여유와 자신감을 느끼고 있다. 이 여유와 자신감이 사랑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한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우리 인구 중 극히 소수라는 것이다.

최영미 시인은 어느 시에서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고 일갈했다. 도무지 잔치도 데모도 해보지 못한 요즘 서른들은 이 시를 이해할 수 없다. 제대로 된 일도 사랑도 해 본 적 없는 요즘 젊은 세대들은 사실 어떤 시를 맞대해도 가슴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한 다수 청년들의 가슴이 해를 거듭할수록 메말라 가고 있다.

<막돼먹은 영애 씨> 시즌14가 종영한 지도 1년이 되어간다. 곧 있으면 추석이다. 우리는 1년 만에 만난 친척들에게 "결혼 언제 하냐?"는 핀잔을 또다시 들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핀잔을 "너는 왜 그리 못났냐?"라고 통역해서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자기 내면의 어떤 목소리에 맞서 안간힘을 다해 다시 싸워야 할지 모른다. 이쯤 되니 더욱 서글퍼지며 묻고 싶은 것이다. "이런 우리도 사랑할 수 있을까?"

산호·영애·승준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14 마지막 회의 장면. 이들은 그토록 원했던 사랑을 온전히 이어갈 수 있을까.

▲ 산호·영애·승준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14 마지막 회의 장면. 이들은 그토록 원했던 사랑을 온전히 이어갈 수 있을까. ⓒ tvN



덧붙이는 글 내가 사랑한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
막돼먹은 영애 씨 김산호 영애 씨 막돼먹은 영애 씨 시즌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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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노무사. 반려견 '라떼' 아빠입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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