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 <서울역>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애니메이션만 찍던 연상호 감독의 첫 실사영화 <부산행>이 천백 만을 넘었다. (그 과정에서 스크린 독과점이 있었다고 해도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스크린 독과점이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부산행>을 본 관객들이 알다시피, <부산행>은 끝까지 봐도 해결되지 않는 몇 가지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그래서 <부산행>의 '프리퀄'인 <서울역>의 연이은 개봉은 <부산행>을 본 관객들이 다시 한 번 극장을 찾아야 할 이유가 된다.

지난 17일에 개봉한 <서울역>은 관객수가 12만을 넘어섰다. 개봉한 지 나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연상호의 전작 애니메이션의 총 관객수를 훌쩍 뛰어넘었다. 빠르게 늘어나는 관객수와는 달리 <서울역>의 관람객 평점은 그다지 좋지 않다. 왜 그럴까.

 서울역 포스터

서울역 포스터 ⓒ NEW


1. <서울역>은 정말 <부산행>의 '프리퀄'인가?

<서울역>은 <부산행>의 하루 전날 '서울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서울역>을 보면 다음날의 <부산행>의 이야기와 잘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니다. 바로 그런 부분 때문에 <서울역>과 <부산행>을 별개의 이야기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서울역>이 '프리퀄'이라는 홍보는 <부산행>의 인기에 편승하고자 하는 전략에 지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부산행>에서 끝내 해결되지 않는 질문은 '좀비의 발생 원인'이다. 바로 그 질문을 <서울역>에서는 해소시키기 때문이다. 다만, '좀비의 발생 원인'이 아닌 '왜 하필 좀비 이야기인가'로 비틀었을 뿐이다.

<서울역>은 한 노인이 목에 피를 흘리며 거리를 지나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침 두 남자가 거리에 서서 '보편적 복지'를 이야기하는 중이다. 하지만 그들도 '노숙자'는 돕지 않는다. 그들이 이야기하던 '보편적 복지'에 '노숙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좀비'로 변신(?)하기 전부터 사람들은 그를 '좀비'로 인식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출소녀' 혜선 역시 마찬가지이다. 몇 년 전에 가출하여 창녀촌에 살다가 도망 나온 그녀는 남자친구와 함께 여인숙에 기숙한다. 여관주인은 그녀의 처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며칠째 밀린 여인숙비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혜선의 남자친구는 돈을 벌기 위해 혜선의 성매매를 알선하고자 한다. 혜선이 거부하자 남자친구는 그녀를 버린다. 사람이지만 사람으로서 받아야 할 대우는 받지 못하고 있는 '노숙자'와 '가출소녀'는 이미 '좀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을 은유적으로 대변하게 된 존재가 바로 '좀비'이다.

'노숙자'가 진짜 좀비가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좀비로부터 '가출소녀'가 도망치는 과정이 이야기의 서사가 된다. 마지막에 가출소녀의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을까. <부산행>을 본 관객들은 이미 결말을 알고 있다.

<서울역>은 <부산행>과 서사적인 측면에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왜 하필이면 좀비가 등장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서울역>의 주인공 가출소녀가 <부산행>의 시작을 연다는 지점에서 <부산행>의 프리퀄이 된다. 또한 <부산행>에서의 좀비 습격이 뜬금없었던 데에 비해 <서울역>에서의 좀비 출연은 감독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연상호 감독의 네번째 장편 영화 <서울역> 스틸 사진.

여관주인은 혜선의 처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며칠째 밀린 여인숙비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2. 목소리 연기는 발연기였나?

애니메이션은 주로 전문성우가 목소리 연기를 한다. 그런데 <서울역>은 배우가 목소리 연기를 했다. 주인공 혜선은 심은경, 혜선의 남자친구 기웅은 이준, 혜선을 찾는 석규는 류승룡이 연기한다. 감독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내가 모든 것을 창조하기보다는 다른 아티스트를 통해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전작인 '사이비'도 양익준·오정세 배우가 어떤 식으로 연기를 하는지 내가 잘 알기 때문에 그 분들의 연기가 필요했다. 그런 측면에서 어떤 배우의 어떤 연기가 필요할까 생각하며 캐스팅을 한다. 물론 전문 성우를 캐스팅할 수 있지만 생각보다 성우들에게 대한 정보를 많이 알지 못한다.  '카이: 거울 호수의 전설' 같은 경우는 전체가 성우 선 녹음을 거쳤는데 그땐 성우 오디션을 보았다. 그 과정이 엄청나게 힘들었다. 그래서 내 경우는 영화에 필요한 영감을 줄 수 있는 배우들과 작업하는 것이 수월하고 좋다."
- <인터뷰365> 연상호 감독 "'서울역'을 보면 '부산행'의 내적 의미 달라질 것"

물론 감독이 어떤 선택을 했든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결과가 나빴다면 이유가 어찌되었건 '미스캐스팅'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들의 연기가 정말로 나빴을까. 주연급으로 캐스팅된 세 배우 모두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들이다. 더욱이 심은경은 <부산행>에서 짧은 출연으로도 (심지어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음에도)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낸 바 있다.

목소리만 들어도 세 배우의 외모가 생각이 나는데, 눈앞에 보이는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는 그런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정말로 그들의 연기가 문제였는지 아니면 익숙한 비주얼로 드러나지 않는 시각차로 인한 오해는 아니었는지 다시 짚어볼 필요는 있다. 연기력에 대한 평가는 결국 관객이 얼마나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각자 다르게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나쁘다고 말하지는 말자.

 연상호 감독의 네번째 장편 영화 <서울역> 스틸 사진.

목소리만 들어도 세 배우의 외모가 생각이 나는데, 눈앞에 보이는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는 그런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3. 왜 하필 새드엔딩인가?

서사는 단순하다. 한 명으로 시작된 좀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가출소녀 혜선은 좀비를 피해 도망친다. 그녀를 버리려던 남자친구 기웅은 그녀를 찾던 그녀의 아버지 석규를 만나 다시금 그녀를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계속 늘어나는 좀비들을 피하며 혜선과 기웅, 석규가 서로를 찾아다니는 이야기이다.

배경인 서울역 주변은 애니메이션인데도 불구하고 실사와 별 차이 없이 묘사되어 있다. 마치 실사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 또한 만화 같은 비주얼과는 거리가 멀다. 만화이긴 하지만 실제로 그런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 같이 평범한 외모를 가졌다. 그 간격이 관객들로 하여금 "그림체가 별로"라는 평가를 듣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보면서 '끔찍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도 사실적인 묘사가 비단 인물의 캐릭터나 배경에만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숙자들이 좀비가 된 노숙자를 피해 경찰서로 들어갔을 때 경찰들이 그들을 무시하고, 경찰이 상황을 보고할 때 "좀비들의 습격"이 아닌 "노숙자들의 폭동"으로 보고하는 장면은 실제로도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이다.

폭동을 제압하기 위해 출동된 무장한 전경들은 버스로 시민들을 막고, 여성의 건조한 목소리만 울려 퍼진다. "여러분은 지금 불법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좀비를 피해 간신히 이곳으로 온 시민들의 살려달라는 목소리는 장벽처럼 막아둔 버스들을 넘지 못한다. 버스를 넘어가려는 사람들에게는 어김없이 물대포가 쏟아진다.

이토록 사실적인 상황 묘사에 기시감이 든다. 무엇으로 인해 거리에 서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거리에 서 있기 때문에 불법이라고 규정짓는 모습이 현 정부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영화의 마지막 반전 역시 어둡다. 어쩌면 줄곧 기다렸을 '해피엔딩'의 실마리는 거의 찾을 길이 없다. ('완전히'가 아닌 '거의'라고 한 이유는 영화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관객에게 이토록 절망을 안겨주는 감독이 있었을까.

사실 우리는 해피엔딩에 익숙하다. 현실에서는 평범한 서민 여성이 재벌 2세와 맺어지는 일이 없다고 해도 드라마에서는 가능하다. 현실에서는 '무전유죄 유전무죄'임을 알지만 영화에서는 돈이 있으나 없으나 정의는 실현된다.

어차피 허구의 세상이라면 좀더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왜 이토록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주는가.

 연상호 감독의 네번째 장편 영화 <서울역> 스틸 사진.

폭동을 제압하기 위해 출동된 무장한 전경들은 버스로 시민들을 막고, 여성의 건조한 목소리만 울려 퍼진다. "여러분은 지금 불법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그 대답은 감독의 인터뷰에서 찾을 수 있다.

"영화의 엔딩은 끝이 아니다. 영화를 보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뭔가를 생각하며 나가서 사회를 살아간다고 본다면 영화의 엔딩은 무엇인가의 시작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런 영화를 만드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 <인터뷰 365> 연상호 인터뷰

그렇다. 영화는 끝났지만 극장을 나서며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오히려 <서울역>이 끝난 것이 다행스럽다. 극 속에서의 해피엔딩을 빌미로 카타르시스에 젖는 대신 <서울역>을 보며 끔찍한 현실의 최악까지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현실은 아직 그 정도로 최악은 아니다. 어쩐지 위기감이 들지 않는가. 90분 동안 들여다 본 그 끔찍한 현실이 여기, 진짜 삶과 별로 다르지 않는데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영화보다 끔찍하지 않은 현실을 살아가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 최선일까.

'세월호 사건'을 방관한 당신이 '좀비'를 피해 도망쳐야 할 때 '나라'가 당신을 지켜 주리라 확신할 수 있겠는가. "내가 얼마나 나라에 희생했는데 너희들 같은 쓰레기와 함께 죽을 수는 없다"고 외치던 남자의 최후는 어땠는가.

당신은 그와 다르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서울역>의 새드엔딩이 현실로 돌아온 당신에게 계속 묻고 있다.

덧붙이는 글 제 블로그(http://blog.naver.com/dreamerfs)와 네이버 영화 리뷰에도 중복게재합니다.
서울역 연상호 부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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