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를 굉장히 좋아한다.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해서 재생산하는 느낌들이 <부산행>과 <서울역>이 줄 수 있는 큰 재미이지 않나 라는 생각으로 작업하게 되었다." (연상호 감독, <서울역> 언론시사회)

지난 17일 영화 <부산행>이 누적 관객수 1100만을 돌파했다. 그리고 그날, <부산행>의 프리퀄(Prequel, 본편보다 과거의 이야기를 다룬 속편)인 애니메이션 <서울역>이 개봉했다. <서울역>과 <부산행>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까?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다

 <부산행>에서 수많은 사람을 감염시켰던 정체불명 바이러스의 실체, 전대미문의 거대하고도 불가항력적인 재앙의 이유를 궁금해했던 관객들은 <서울역>에서 뭔가 해답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역>에도 답은 없었다.

<부산행>에서 수많은 사람을 감염시켰던 정체불명 바이러스의 실체, 전대미문의 거대하고도 불가항력적인 재앙의 이유를 궁금해했던 관객들은 <서울역>에서 뭔가 해답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역>에도 답은 없었다. ⓒ NEW


관건은 입소문일 텐데, 녹록지 않아 보인다. 그 첫 이유는 좀비에 대한 원인을 찾고 싶었던 관객들이 느낀 배신감 때문이다. <부산행>에서 수많은 사람을 감염시켰던 정체불명 바이러스의 실체, 전대미문의 거대하고도 불가항력적인 재앙의 이유를 궁금해했던 관객들은 <서울역>에서 뭔가 해답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해답이 있을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역>에도 답은 없었다.

드라마 <W>에서 웹툰 작가 오성무가 강철의 가족을 살해한 진범의 정체가 사실은 그저 '설정'이었다고 고백한 것처럼, 연상호도 솔직하게 털어놓는 날이 오지 않을까? 애초에 원인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말이다. 실제로 그는 <OSEN>과의 인터뷰에서 "좋은 좀비 영화들은 어째서 좀비가 됐는지 밝히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애초부터 그는 원인을 밝힐 생각이 없었던 것일까? "좀비가 무서운 이유는 미지의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그의 말을 반박하기 어렵다.

연 감독이 집중한 것은 '좀비'라는 현상이었다. 그 현상으로부터 야기된 또 다른 현상, 연상호가 집요하리만치 물고 늘어지는 건 그 부분이다. 좀 더 풀어 설명하자면, 좀비라는 현상이 발생하고 난 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그 현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그 현상을 흡수(해결)할 수 있는지와 같은 의문 말이다. 그래서 '현상'과 만난 '사회'가 어떤 결과로 치닫는지를 보여준다.

희망 없는 사회

 <서울역>이 그리는 대한민국에서, 희망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서울역>이 그리는 대한민국에서, 희망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 NEW


"<서울역>을 만들 때 사회를 비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만든 것은 아니었다. 세대가 넘어오면서 시스템 탓도 했다가 스스로 반성도 했다가 하는 세대의 흐름이 있었다. <서울역>을 만들고 기획할 당시에는 자포자기를 넘어서서 혐오의 시대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모두가 망해버리라는 사회 분위기를 고려해서 <서울역>을 만들게 됐다. 어쩌면 모두가 공평하게 좀비가 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연상호 "서울역'? 모두 공평하게 좀비 된 세상">(<OSEN>, 8월18일)

여기서 두 번째 이유가 도출된다. "그래서, 도대체, 좀비가 왜, 무엇 때문에 생긴 거야?" 좀비의 실체, 감염 경로 등 <부산행>을 통해 관객들이 품게 된 의문이 철저히 외면된 후, 관객들은 무기력 속에서 '절망'과 마주하게 된다. 상업 영화 <부산행>과 달리 <서울역>에는 희망적 요소가 없다. 비판은 더욱 날카롭고 적나라해졌고, 메시지는 분명해졌다.

조금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두 영화는 '제목'만으로도 '희망'의 유무가 드러난다. <부산행>이라는 제목에는 목적지, 그러니까 방향성이 있다. 그곳에 도착하면 (비록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안전'할 것만 같은 믿음. 그건 바로 '희망'이다. 하지만 <서울역>은 방향성이 없다. 고정돼 있다. 오도 가도 못하는 고착된 위기와 파멸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은가?

낯설지 않는 불통

 아무도 노숙자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답답해 하는 노숙자들과 들으려는 의지 조차 없는 경찰. 그 불통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도 노숙자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답답해 하는 노숙자들과 들으려는 의지 조차 없는 경찰. 그 불통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 NEW


서울역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한 청년은 '보편적 복지'를 강조하지만, 정작 눈앞의 노숙자를 냄새가 난다며 외면한다. 말뿐인 정의 앞에 그 누가 떳떳할 수 있으랴. 화려한 외관의 서울역사에는 사회의 최하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노숙자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삶은 열악하다는 표현도 부족하다. '귀찮고 성가신 존재'인 노숙자들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 그런데 그 불통이 낯설지 않은 건 무슨 까닭일까?

정부는 '감염된 좀비'와 '자신들이 지켜야 할 사람'을 구분하지 않은 채 뭉뚱그려 '폭동'으로 몰아간다.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절규하지만, 역시 전달되지 않는다. 정부에게 '소리를 지르는' 모든 존재는 그저 성가실 뿐이고, 고로 제거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이처럼 연상호는 '서울역'이라는 공간 속에 '대한민국'을 잘 새겨 넣었다. 관객들은 현실을 잘 빗댄 익숙한 비유에 비릿함을 느낀다.

기웅(이준 분)은 여자친구인 혜선(심은경 분)에게 성매매를 강요한다. 집을 나온 혜선은 갈 곳도 기댈 곳도 없다. 그리고 혜선을 찾아 나선 아빠 석규(류승룡 분). <부산행>에서 1100만 관객들이 생존을 갈구하는 사람들을 응원했던 것처럼, <서울역>에서 관객들은 혜선의 생존에 관심을 기울인다. 하지만 희망과는 달리 그의 미래에 희망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관객들은 견디기 힘든 불편함을 느낀다.

이처럼 원인도 없고, 희망도 없는 이 영화에 '입소문'이 좋게 날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 영화를 보지 말아야 할까? 정말 나쁜 '입소문'을 낼 생각인가? 역설적으로 그래서 우리는 <서울역>과 마주해야 한다. 그 꿉꿉함을 정면으로 바라볼 힘을 가져야 한다. 연상호가 <부산행>에 차마 담지 못했던 이야기들 속에서 '대한민국'을 발견하고, 그 '희망 없음'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혐오의 시대'를 인정하고, 새로운 질문과 대답을 찾아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서울역>에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현상 말고도 감춰진 또 하나의 공포가 있다. 그건 '좀비'보다 무서운 건 오히려 '인간'이라는 진리다.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다'는 말처럼, 사실 '좀비'는 아무것도 아니다. 영화를 보면 알게 된다.

서울역 심은경 류승룡 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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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스타팀에서 방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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