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듯이, 누구나 가슴에 한때 사랑했던 존재가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배우, 내가 사랑했던 노래, 내가 사랑했던 감독, 내가 사랑했던 드라마…. 그런가 하면 노래 한 곡, 또는 드라마(영화) 한 편 때문에 인생이 바뀐 분들도 있을 겁니다. 첫사랑만큼이나 우리를 설레게 했던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울역>의 포스터

<서울역>의 포스터. 애니메이션 <서울역>은 보다 연상호 감독의 기존 문법에 충실한 작품이다. ⓒ NEW


왜 <서울역>과 <부산행>은 모두 '열차'와 관련이 있을까?

종말 영화도 임무가 있다. 일단 세상이 망하는 걸 보여줘야 한다. 또한, 종말의 책임 주체를 명확히 해야 하고, 등장인물들은 파국에서 탈출해 구원을 향해 나아가려 시도해야 한다. 이때 등장인물들은 좌절과 극복을 경험하고, 관객은 답이 없는 세상을 파멸시키거나 새 삶을 시작하고픈 욕구를 대리 해소할 수 있다. 특히 '좀비물'은 책임 주체가 명확한 장르다.

조금 전 인격을 가졌던 사람들이 좀비로 돌변해 서로 물어뜯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좀비 특유의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듯한 욕망, 뒤틀림, 공격성, 혐오스러움 등은 인간 내면에 원래부터 잠재하던 위험요소들을 폭로한다. 좀비물이 태생적으로 사회 비판적인 이유다. 그런데 비판은, 최소한의 변화 가능성이 존재할 때만 희망적이다.

연상호 감독의 <서울역>은 그 일말의 가능성도 남겨두지 않는다. 인간과 좀비의 경계가 완전히 지워질 때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서울역>이 충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구원'이 아닌 '파멸'이다. 또한, 그것이 너무 강렬해 <서울역>이 정말 <부산행>의 프리퀄(이전 이야기를 다룬 속편)이 맞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정말 프리퀄이라면 <서울역>은 출발지고 <부산행> 끝의 부산역은 도착지여야 한다. 물론 두 영화는 모두 '열차'와 관련이 있다.

또한, 영화 내내 한국 사회의 '편협한 시각'을 꼬집는다. 마치 연속성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부산행> 열차가 <서울역> 발 파국을 넘어 구원의 세상에 들어갈 자격 있는 극소수를 시험하는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폴 비릴리오의 <탈출 속도>에 따르면 원래 열차는 '편협한 시각' 문제와 관련이 있는 상징이다.

운송 수단의 발달은 삶의 템포를 빨라지게 했지만 출발지와 도착지만 중요해지며 창문 밖 풍경은 스쳐 지나가듯 보게 됐다. 맥락과 과정에 무신경해졌다. 압축성장기를 지나왔고 무한경쟁이 보편화한 한국인의 삶도 열차와 닮았다. 중요한 것은 결과다. 결과를 내지 못한 사람들은 시야 밖으로 '배제'된다. 성과를 내는데 당장 도움이 안 되는 맥락들은 '무시'된다.

설명해야 할 것들은 너무 많고, 축적된 잉여 맥락과 잉여 인간들이 인재(人災)로 돌아와도 참사와 사건·사고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학습의 끈을 놓아버린 한국 사회의 지독한 결과 중심적 속성으로 인해 망각이 또다시 재촉된다. <부산행>과 달리 <서울역>은 구원의 열차가 달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스쳐 지나갈 뿐 눈길 주지 않는 '잉여 인간'들의 서울역만 등장한다. '모든 게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모든 게 이곳에서 끝난다' 그게 전부다.

"세상이 어차피 다 썩었는데 살아서 뭐하게"

 영화 <서울역> 스틸컷. 모든 것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것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이 재난도, 고통도, 파멸도. ⓒ NEW


나는 <오마이뉴스>에 '내 세상은 잿빛'이라는 연재를 한 적이 있다. 총 3편의 연재는 내가 고시원 총무로 일하던 시절 이야기를 소개한다. 첫 편은 한 40대 투숙객의 자살 현장을 목격한 이야기였다. 나는 이때 '착취'보다 더 가망 없고 질식할 것 같은 '배제'의 문제를 언급했다. 엄연히 도시 속에 존재하지만, 원천적으로 무시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관련 기사: 고시원 총무는 시체 썩는 냄새를 안다). <서울역>도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첫 장면은 한 노인이 목에 피를 흘리며 서울역 주변을 배회하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가 필요하다고 조금 전까지 큰 소리로 떠들던 한 청년은 도와주려고 시늉하려다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찡그리며 '노숙자야, 노숙자'라고 말하며 돌아선다. 동료 노숙자가 쓰러진 노인을 발견하고 쉼터 직원에게 도와달라는 긴급한 상황 설명을 하지만 두서가 없다.

노숙자라고 꼭 의사소통 능력이 떨어지는 게 아님에도, 이런 설정을 함으로써 사회와 고립된 '잉여 인간'들의 목소리가 잘 전달되지 못함을 암시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쉼터의 공간은 나지 않았고 노인의 동료는 역무원에게 뛰어가 '진짜 큰일 났다'며 다가가려 한다. 그러나 미처 다 말을 걸기도 전에 역무원은 저리 가라고 호통을 친다.

하는 수 없이 약국에서 약을 사 왔지만, 노인은 죽어있었다. 동료는 통곡하며 역무원 실을 찾아가 '아저씨들이 내 말 안 들어줘서 우리 형님 죽어버렸잖아요!'라고 소리친다. 평균보다 오랜 러닝 타임 동안 좀비로 변하지 않은 노인의 등장은 사회의 '배제'와 '편견'을 보여주는 임무에 충실해야 할 장르적 특성을 고려하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와중에 비명이 들려와도 '노숙인 여러분 조용히 하세요. 경찰 부릅니다!'라는 역내 방송이 흘러나오며 그의 임무는 성공적으로 완수된다. 죽은 줄 알았던 노인이 좀비로 변해 돌아오며 파국은 시작된다. 한편 비슷한 시각 가출 소녀이자 집창촌에서 도망 나와 남자친구 기웅(이준)과 여관에서 함께 지내던 주인공 혜선(심은경)은 여관비를 마련하려고 자신에게 원조교제를 시키려던 기웅과 크게 다투고 서울역을 배회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좀비 떼를 목격하고 정신없이 도망치던 혜선은 우여곡절 끝에 한 노숙자와 일행이 된다.

그와 함께 역내 복도 셔터를 올리고 지하 선로로 이동해 탈출하려던 중, 혜선은 셔터 안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하지만 노숙자가 셔터에 걸린다. 그런데 복도 끝에서 눈을 부릅뜬 사람이 노숙자를 향해 뛰어온다. 혜선도 노숙자도 그가 좀비인 줄 착각했고 노숙자는 셔터 안으로 들어가려고 몸부림친다. 하지만 눈을 부릅뜬 그 사람은 좀비가 아니었다. 기이한 분위기의 이 중년 여성은 혜선과 노숙자를 향해 이렇게 호통을 치고는 사라진다.

"세상이 다 썩었는데 살아서 뭐하게?"

<서울역>과 <부산행>을 관통하는 '편견과 불신'

 <서울역>은 계속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서울역>은 계속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 NEW


근본적인 질문이 던져졌지만, 혜선과 노숙자는 이를 무시한 채 안전한 공간을 찾아 계속 지하 선로를 걷는다. 열차는 전혀 다니지 않고 어둠 속에서 혜선이 "집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그러자 노숙자가 답한다. "나도 집에 가고 싶다. 그런데 나는 집이 없어"라고.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함께 통곡한다. 사실 혜선도 돌아갈 집이 없다는 암시다.

혜선은 터널 끝에서 빛을 본다. 그러나 희망은 없었다. 스크린도어를 두들기는 좀비 떼의 소리 없는 아우성만 있을 뿐이다. 놀란 혜선을 지나치며 노숙자는 담담히 중얼거린다. "더 멀리 가야 뒤야..." 그러나 땅 위도 이미 좀비 세상이다. 바리케이드를 쌓고 좀비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저지하던 청년들의 도움으로 두 사람은 잠시 안전해 '보이는' 공간에 머물지만, 역시 반대편에 군경이 차 벽을 쌓아놓고 길을 안 열어 오도 가도 못 하게 된다.

한쪽에는 좀비의 괴성이, 다른 한쪽에는 '여러분은 지금 불법시위를 하고 있습니다'라는 방송만이 흘러나온다. 아무리 사람들이 아우성쳐도 머리 위로 물대포가 쏟아질 뿐이다. "이 나라를 위해서 일했지만, 이 나라는 우리는 안중에도 없어. 애초에 도망갈 곳이 있었으면 서울역에서 이러고 있지도 않았지. 그렇지만 어쨌든 나는 살아야겠다"며 차 벽을 넘어서려는 노숙자는 머리에 총을 맞고 사살된다.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앞서 설명했듯, 좀비는 '편협한 관점(편견)'의 상징이다. 편견은 불신과 맞닿는다. 상대를 불신하므로 편견을 갖게 되고 편견을 가지므로 상대를 불신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감염된 놈들이 있을 것이다'라는 의심의 감정은 '무언가 나를 해하려는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라는 한국인들의 고질적 불신과 본질적 속성이 다르지 않다. <제3의 자본>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OECD 평균보다 가족 신뢰만 높고 낯선 사람에 대한 신뢰는 낮다.

문제는 이러한 의심의 이득의 원칙을 '성급하게' 적용하면 사회가 붕괴한다는 것이다. 결국, 불신의 벽이 서로를 막아설 때, 서로를 편견으로부터 지켜주던 바리케이드는 무너지며 아비규환이 된다. 이 장면은 <부산행>에서 천리마고속 상무 용석(김의성)이 "감염 안 된 것 확실하냐고!"라고 소리치며, 석우(공유) 일행이 KTX 앞칸으로 못 들어오도록 사람들을 선동하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딱 여기까지다.

<서울역>은 <부산행>의 프리퀄이 아닐지도

 영화 <서울역> 포스터. '<부산행> 프리퀄'이라는 홍보 문구가 있지만 영화에는 반전이 있다. 영화의 반전을 극대화하고자 포스터, 팜플렛을 통해 스토리나 등장인물을 다르게 소개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영화 <서울역> 포스터. '<부산행> 프리퀄'이라는 홍보 문구가 있지만 영화에는 반전이 있다. 영화의 반전을 극대화하고자 스토리나 등장인물을 다르게 소개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 NEW


<서울역>은 <부산행>과 달리 '구원'이 아닌 '파멸'에 충실하다. 또한 '반전'에 충실하다. 반전은 영화가 강조하는 대목을 위해 남겨둔 히든카드이다. <부산행>의 별 반전 없는 단선적인 스토리를 생각하면, <서울역>의 아우라는 <부산행>의 아우라를 이미 삼켜버린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여름 블록버스터 <부산행>의 1100만 관객을 넘는 호응과는 별개의 문제다. 애니메이션은 감독이 통제할 수 있는 세상이고 실사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감독의 본심은 <부산행>보다는 <서울역> 쪽에 가까운 게 아닐까.

결말에서 혜선이 마지막으로 탈출한 장소는 '모델하우스'다. 이미 안전한 곳이 한 뼘도 없는 한국 사회의 파멸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상징이다. 진정한 집도 아닌 이런 곳에서 혜선은 잠시 긴장을 놓고 잠자리에 든다. 그사이 연락을 받고 달려온 남자친구 기웅이 혜선을 흔들어 깨운다. 기웅은 혜선의 아빠와 같이 왔다고 말하고 혜선은 반가워한다. 반전은 혜선의 앞에선 석규(류승룡)가 아빠가 아니라 혜선이 도망치고자 했던 포주였다는 것이다.

반전 이후부터 좀비와 인간을 구분 짓던 명목상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세상이 망하는 상황에서도 돈을 갚으라고 쫓아오는 포주를 막으려던 기웅은 포주에게 죽고, 포주는 혜선에게 너희 아빠는 돈을 갚으라니까 이미 도망갔고 네가 돌아갈 집도 한참 전에 없어졌다며 폭력을 휘두른다. 혜선이 정신을 잃자 포주는 "내 돈 갚고 죽어야지!"라고 절규한다. 포주가 혜선의 다리에 좀비에게 살짝 긁힌 상처가 있는 것을 발견하는 찰나, 좀비로 변한 혜선이 포주를 물어뜯으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로써 <부산행> KTX의 최초 좀비 감염자가(심은경) <서울역>의 여주인공 혜선(심은경)과 동일 인물이라는 속설이 깨진다. 두 영화는 단절을 선언한다. 따라서 두 영화 사이에 '개연성이 없다'는 평가들은 두 영화의 가치를 기각하지 않는다. 개연성이 없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

<서울역> 홍보 과정에서 석규를 아빠라고 소개했지만 실제로는 포주였듯, <서울역>을 프리퀄이라고 소개했는데 실제로는 독립된 영화였다는 반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반전을 인정한다면 두 영화는 지금의 현실을 설명하는 각각의 독립적인 텍스트로 인정되어야 한다. 둘 중 어떤 설명이 더 현실에 가까운지 판단하는 건 관객의 몫이다.

영화를 잘 보면 혜선조차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단서들이 포착된다. 경찰에게 '아저씨 저 노숙자 아니에요!'라고 노숙자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거나, 자신이 위기에 빠졌을 때 한 청년이 자신을 도와주고 좀비에게 희생됐지만, 신경 쓰지 않고 도망을 가는 등. 그리고 바로 이 장면에서 혜선도 좀비에게 살짝 긁히게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쩌면 영화 전체가 바로 이 장면을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좀비로 만드는 건 너무 잔인한 것 아니냐는 불편함을 몇몇 관객은 느낄 수 있다. 관객이 등장인물에 이입해 답 없는 세상을 파멸시킨 뒤 새 삶을 시작하고픈 욕구를 대리 해소한다면, 혜선의 파멸은 '예외'를 두고 싶었던 이들을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대단한 악인으로 인해 붕괴한다기보다 오히려 소시민들의 작은 편견과 불신이 쌓일 때 붕괴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이미 의인(청년)조차 의의를 온당하게 인정받을 수 없다.

한국 사회는 <서울역>과 <부산행> 중 어느 쪽에 가까운가. 나는 '내 세상은 잿빛' 3편에서 이 세상은 원래 부조리하고 인생은 무의미함의 연속이지만, 아주 간발의 순간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이 있다고 주장했다(관련 기사: "이 언덕을 또 오르다니..." 흙수저의 '형벌'). 하지만 이제 그 주장이 현실과 거리가 있음을 인정할 때가 된 것 같다. 나는 <서울역>에 반박할 말이 딱히 안 떠올랐다. 이제 비관적으로 철학자 카뮈의 말을 다시 읊조린다.

"인생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적인 문제다."

여기에 내가 아무리 긍정적인 답을 해도 약간의 가능성도 찾을 수 없었다면, 그것이 원래 나의 현실이 아니었을까 싶다.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다면 좀비가 되어 죽어가는 수밖에….

덧붙이는 글 내가 사랑한 재난 영화 <서울역>
서울역 부산행 KTX 심은경 연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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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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