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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원 사장이 꽃게를 들고 미소를 짓고 있다. 서해안 꽃게 금어기간(6월 21일~8월 20일) 이 풀리고 난 다음날인 21일 당일 사진이다.
 장성원 사장이 꽃게를 들고 미소를 짓고 있다. 서해안 꽃게 금어기간(6월 21일~8월 20일) 이 풀리고 난 다음날인 21일 당일 사진이다.
ⓒ 이생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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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꽃게잡이 출항전 기자와 인터뷰 중인 장성원 사장
 아침 꽃게잡이 출항전 기자와 인터뷰 중인 장성원 사장
ⓒ 이생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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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기자님, 여기 함 봐보셔요. 꽃게가 겁나게 올라오네요. 어이 김씨 그물에서 그렇게 떼어내면 꽃게발이 다 떨어져 버리잖아요. 상품 가치가 안 나가니깐 살살 좀 떼어내요."

구릿빛 피부에 다부진 체격이 섬생활에 제격일 듯한 장성원 사장, 좀처럼 청장년층을 보기 힘든 이곳 섬에서 생활하는 그에게선 남들과 다른 뭔가가 있으리라. 꽃게잡이로 매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양해를 구하고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서 들어보았다.

공부와는 담싼 아이, 하지만 기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선수

"공부를 잘할라고 겁나게 노력을 했는데요. 시험 결과는 맨날 거시기 하더라고요(웃음). 선유도 중학교 졸업 이후에 우리 부모님은 인문계고등학교를 보낼려고 했는데 제가 쫌 공부쪽으로 소질이 없어서 저 스스로 공고(전북기계공고)로 갔어요. 중학교 시절에 공부 좀 하려고 교과서를 볼라치면 바로 꿈나라로 가버려요(웃음). 근데 선외기(바닷일에 쓰이는 보트 엔진)를 고치는 거나 기계 같은 거 고치는 거는 제가 완전히 선수입니다."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수면제와 같았던 교과서, 대신 기계를 다루는 분야에서 성공을 하고 싶어서 공고에 진학했다는 장성원 사장은 우람한 체격과는 달리 인터뷰 내내 긍정적 에너지와 유쾌함으로 기자에게 편안함을 제공했다.

"제가 입학한 전북기계공고(익산)는 전통이 꽤 깊은 학교라서 그런지 각 학급 구성원들의 출신은 전국적으로 다양했어요. 학교 기숙사에서 2학년 방학 전까지 있었는데 고향이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하면서 우정도 쌓고 인간관계의 폭을 넓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3학년 내내 진로에 대해서 고민을 했습니다. 기계전문 분야로 바로 취직을 해야 할지, 아니면 대학생활로 진로를 변경을 해야 할지요."

결국 그는 대학 캠퍼스 생활을 택했다고 한다.

"부모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요. 당장 취직도 중요하지만 대학생활을 해보지 못하면 평생을 후회할 것 같아서 고등학교 3학년부터는 대학 입학하는 것으로 진로를 틀었습니다."

 금어기가 풀린 바로 다음날 잡은 꽃게가 만선으로 귀항하는 마음이 기쁨으로 한가득하다. 사진 중간이 장성원 사장
 금어기가 풀린 바로 다음날 잡은 꽃게가 만선으로 귀항하는 마음이 기쁨으로 한가득하다. 사진 중간이 장성원 사장
ⓒ 이생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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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활은 삶의 자양분

호원대학교 99학번 산업디자인학과 신입생 장성원, 이래저래 조합이 맞질 않아 보인다. 듬직한 체격과 두툼한 주먹을 보니 싸움깨나 하게 생겼고 예술하는 사람들의 통상적인 느긋한 말투와는 거리가 먼 듯한 직설적이고 화통한 말투 등... 어떻게 산업디자인과를 가게 되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가 답한다.

"저는 어릴때부터 공부쪽보다는 노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대학을 가는 것은 제 미래의 보장보다는 '남들도 하는 것 나도 한번 해보자'라는 심정이 있었고요. 저의 수능점수가 낮았기 때문에 합격할 수 있는 조건이 맞아야 했고요. 대학생활을 즐길 수 있는 조건을 찾다 보니깐 산업디자인학과가 저에게 완전 딱이더라구요.(웃음)"

대학에 입학해 보니 학과생 50여 명 중에서 남학생이 10명 정도이고 나머지 40여 명은 여학생들, 그에게는 여학생들과의 생활이 불편함이 없었나 보다.

"공고에는 남학생들만 있잖아요. 그런 거친 분위기와는 완전 딴판인 대학생활이 저에게는 힐링이 되었어요. 비가 오면 울적해진 마음을 달래볼까 동기들과 술집을 전전했고, 벚꽃 피는 날에는 행사장으로, 유명가수들 오면 콘서트장으로, 눈이 오면 스키장으로... 취직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출석 및 학점은 엉망이었습니다.(웃음) 제가 공부는 못했어도 사람들을 이끄는 능력은 특출한가 봅니다. 남학생, 여학생 구분 없이 제가 말하면 잘 따라줬습니다. 여학생들이 많다고 해서 불편함은 전혀 없었어요."

취업을 목표로 지금도 도서관에서 땀흘리고 있는 대학생들과 비교하면 그의 대학생활은 별나면서 즐기는 게 목표인 매우 소신있는(?) 학생이었다.

"애초에 즐기려고 대학을 간 거였기 때문에 학점은 저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어요. 잘 노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하잖아요. 2년을 맘껏 놀고 중퇴를 했어요. 중퇴 기로에 있을때 부모님께서는 많이 말리시긴 했지만, 제 나름 꿈이 있어서 그만 두었어요. 2년 동안 맘껏 즐겼기 때문에 지금은 쉽게 유흥에 빠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웃음)"

이라크 파병에서 비전을 찾다

 이라크 파병시 훈련중에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장성원 사장, 최근 인기 드라마 '태양의후예' 에서 선보였던 군복과 유사하다.
 이라크 파병시 훈련중에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장성원 사장, 최근 인기 드라마 '태양의후예' 에서 선보였던 군복과 유사하다.
ⓒ 장성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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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활의 즐거움을 뒤로한 채, 돌연 그는 2001년 중퇴를 하게 됐다. 충분히 놀았으니 이제 성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단다. 동년배의 섬 친구들은 군대를 가거나 대학생활을 이어가는 상황에서 과연 그가 택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기자님도 아시겠지만 솔직히 대학 나와서 전문직 아니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가 쉽지가 않잖아요. 그나마 직장을 구해도 빠듯한 월급에다가 살벌한 경쟁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아예 직장은 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어요.(웃음) 대신 섬에서 부모님을 도와서 김 양식이나 꽃게잡이, 보트 관광을 하면 충분히 성공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과감히 대학 중퇴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들은 고생하더라도 자식들에게 만큼은 고생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교육에 열을 올리는 것이 부모의 마음일 터. 그의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3년 동안 섬에서 눈치 보면서 열심히 부모님 일을 도와드렸는데 당신들께서는 제가 섬에서 일하는 것이 오히려 불효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다시 복학해서 졸업을 하고 따박따박 월급 받는 곳에서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매일같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결국 부모님과의 갈등으로 군산으로 나오게 된 청년 백수 장성원, 그나마 섬이라는 비빌 언덕 때문에 과감한 대학 중퇴도 했건만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졌으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무리 못나도 자식은 자식인가봐요. 3년간 일한 몫으로 적금을 해놓으셨더라구요. 부모님께 얼마나 감사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웃음) 이참에 방랑을 하는 것보다 군대를 가서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입대 준비를 했습니다. 기왕 가는 것 쫌 빡세게 하고 싶어서 해병대하고 공수부대 지원을 했는데 제 몫이 아니었나 봅니다. 주저하지 않고 육군 보병으로 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대 운전병 배치후 얼마 있지 않아서 자이툰 부대 파병 자원 소식을 알게 된 이병 장성원은 주저없이 자원을 했다. 위험천만한 타국 군대생활, 그것도 중동사태의 한 복판인 이라크로 자원 파병이라..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제가 군대가기 전까지 비행기 타본 적이 한번도 없는 촌놈이잖아요. 공짜로 태워준다는데 한번 타봐야죠.(웃음) 당시 이병 월급이 7만 원인가 했어요. 근데 파병하면 2백만 원을 넘게 준다니 돈 벌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요. 고민하면 생각이 바뀔지 몰라서 즉시 결정을 해버렸습니다."

6개월 여의 위험천만한 파병 생활에 힘든 점은 없었는지? 후회는 없었는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지?.. 기자의 속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답을 주었다.

"지금도 체력과 체격은 자신있습니다. 해병대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운동을 진짜로 진짜로 많이 했었습니다. 덕분에 이라크 파병시 훈련에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단지 이라크 현지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복귀할 때까지 고생을 좀 했습니다. 저는 이라크가 석유 부국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실상을 보니 참담했습니다.

낙도 오지에서 나고 자란 저도 겪어 보지도 못한 배고픔에 허덕이고 학교 건물 등이 다 파괴되어서 공부할 곳도 없고요. 그런 참담한 환경을 보니깐 즐거움만을 위해 살아온 과거를 반성하게 되고 파병 생활에 대해서 사명감이 커지게 되더라구요. 누구보다 더 이라크 지원활동에 성실히 임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우리 고군산에서 제가 이라크 파병 최초라는 거지요.(웃음)"

6개월간의 파병은 그 스스로 과거에 대한 반성과 현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해줬단다.

 귀항후 마을 어귀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장성원 사장
 귀항후 마을 어귀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장성원 사장
ⓒ 이생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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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후 본격적인 섬생활, 이젠 부모님도 인정

이라크 6개월 파병으로 모은 돈을 통장으로 만들어서 고스란히 부모님께 드린 예비역 병장 장성원, 군생활 동안 고민했던 삶의 목표는 군대 가기 이전과 변함없이 섬에서 부모님 모시고 사업하는 거였단다.

"부모님 말고는 누구 밑에서 일한다는 것에 자신이 없었어요. 아니 섬 일이 그냥 좋았어요. 섬에서 살려면 부모님을 설득해야 하는데 극구 반대를 하시는 부모님께 딱 1년만 저에게 섬생활에 대하여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간절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정말로 1년간은 숨쉬는 것 빼고 일만 했습니다.

가장 먼저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같이 일하는 직원들보다 더 일을 많이 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잖아요. 운이 좋게도 그 해 김 양식에서 대박을 쳤습니다. 김 양식에서 사고가 없었고 김 값도 상당히 높았습니다. 제가 도와서 사업이 잘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간 고생한 것들에 대해서 보상을 받는 것 같아서 정말로 기분이 좋더라구요."

수산전문가를 꿈꾸다

군 전역 후 섬에서 사업을 한 지 10여 년, 강산이 한 번 변했다. 강산이 변한 만큼 그의 마음도 변했을까?

"처음 부모님께 1년만 지켜봐 달라고 했습니다. 열정을 다해서 한 만큼 결실을 잘 맺어서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첫 3년 간은 앞뒤 가리지 않고 직원들과 똑같이 일을 했습니다. 이후 5년은 아버지를 대신한 책임자로써 어장과 직원들 관리하는데 집중을 했고요. 2년 전부터는 수산업도 이젠 기술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군산대학교 '수산전문가 CEO 양성 12주 과정' 을 수료했습니다."

처음 가졌던 마음가짐처럼 성실하게 임하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들은 답에선 책임감 있는 젊은 CEO의 채취가 느껴졌다.

"기자님, 김 좋아하시나요? 국내에서 가장 맛 좋은 김이 이곳 무녀도에서 나온 김입니다. 요즘에는 일본 수출길이 매우 활발하여 값도 톡톡히 받고 있어서 섬 사업하는데 효자입니다. 수산전문가 과정을 밟게 된 것도 요 김 때문인데요. 예전에는 기술보다는 감으로 했지요. 겨우내 기상 조건이 좋으면 풍년이 들고, 기상 조건이 나쁘면 흉년이 들고요. 

하지만 수산전문가 과정은 나쁜 기상 조건에서도 최악의 상황을 면하게 하는 방법들에 대해서 논의하고 연구를 하는 체계적인 전문 프로그램입니다. 현장 실습과 김 양식 선진국인 일본 견학 등을 통해서 배운 지식으로 이곳 무녀도 주민들과 기술을 함께 공유해서 같이 가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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