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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필자는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로부터 황당한 통보를 전달받았다. 요지는 필자가 독립유공 공적심사를 요구한 신명균(1889∼1940) 선생이 포상대상에서 탈락하였다는 내용이었다. 공훈심사과는 포상되지 못한 이유로 "적극적인 독립운동 참여여부 불분명"이라고 한 줄로만 기재하였다. 너무도 불성실한 답변이었다.

필자는 1백개가 넘는 자료를 공훈심사과에 제출하였고,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방대한 자료를 제출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근대사 전공자여서 그나마 가능하였다. 며칠 뒤에 71주년 광복절을 맞이한다. 광복절을 앞두고 독립유공 포상에서 이러한 불성실한 통보를 받은 분이 한 두 명이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공문에는 독립유공자 공적심사가 한국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교수, 전문연구자 등으로 구성된 '독립유공자 서훈공적심사위원회'에서, 독립운동 당시의 공적확인 자료에 근거하여 심사 대상자의 공적사항, 기여도, 희생도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이루어지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포상 신청자가 이번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에서 포상되지 못한 사유로 제시된 사항을 해명하거나 독립운동 공적을 보완하는 자료를 제출하면 다시 심사할 수 있다고 안내하고 있다.

포상 탈락자가 공훈심사과에 재심을 요구하려면 '포상되지 못한 사유'를 해명하든지, 공적을 보완하는 자료를 제출해야만 가능하다. 추가로 공적을 밝힐 수 있는 새 자료가 나온다면 제출해서 재심을 요청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포상되지 못한 사유'를 한 줄로만 간략히 기재하여 통보하는 데에 있다. 한 줄로 기재된 '포상되지 못한 사유'만을 가지고, 포상 탈락자가 제대로 해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포상 못하는 사유' 단 한 줄로 통보

1927년 보성전문학교 졸업앨범
▲ 신명균 선생의 모습 1927년 보성전문학교 졸업앨범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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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공훈심사과가 신명균에 대해 기재한 '포상되지 못한 사유'가 타당하지 못함을 낱낱이 제시한다. 이 글로써 신명균에 대해 재심을 하여 주기를 정중히 요청한다.  

첫째, 신명균은 일제의 조선어 말살에 맞서 언어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조선어연구회와 조선어학회(2대 간사장, 3대 간사)에서 조선어 철자법 제정위원으로써 한글 맞춤법통일안 완성에 기여하였고, 표준어 사정위원으로 활동하여 표준어의 제정에 도움을 주었다.

조선어 문법의 통일에 기여하고자 <조선어문법>(1933)을 저술하였으며,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조선 민중에게 널리 소개하고자 하여 <조선어철자법>(1934)을 저술하였다.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을 편집하고 간행하는 업적도 남겼다.

아울러 1929년에 출범한 조선어사전편찬회에서 상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이극로, 이윤재, 최현배와 함께 조선어학회의 핵심인물이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조선어학회 사건' 예심판결문(1943)에 상세히 나와 있다. 그가 일제에 항거하고자 자결을 하지 않았다면, 최현배처럼 징역 4년형을 언도받았을 것으로 필자는 판단한다. 왜냐하면 그가 조선어학회의 중심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 일제보다도 판단 후퇴

조선어학회 발행
▲ <<한글>> 표지 모습 조선어학회 발행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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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는 <한글역대선>(1933), <주시경선생유고>(1933), <조선문학전집 제1권-시조집1>(1936), <조선문학전집 제2권-가사집>(1936), <조선문학전집 제5권-소설집1>(1936), <조선문학전집 제6권-소설집2>(1937) 등을 발간하여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집대성하였다.

필자는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가 조선어학회 등의 활동을 포상요건에 따른 적극적인 독립운동으로 보고 있지 않기에, 신명균이 "적극적인 독립운동 참여 여부 불분명"이라고 기재하였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판단은 침략자 일제보다도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을 문화적 민족운동이고 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한 민족독립운동의 점진형태('조선어학회 사건 예심종결 결정문'(1944, 9, 30. 함흥지방법원 판결)로 규정하여 조선어학회 관련자를 검거하여 탄압하였다.

일제 재판부는 1945년 8월 13일에 이극로 등이 조선독립을 열망하고 극히 농후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자이고, 조선어학회의 어문운동이 10여 년간 극히 심대한 악영향을 끼쳤기에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昭和二十年 刑上 第五九號 判決'(1945, 8, 13. 고등법원 판결. 이것이 '조선어학회사건 일제의 최종 판결문'이다.) 이처럼 일제도 언어투쟁을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판결하였다.

총칼 들고 싸우는 무장투쟁만이 적극적인 독립운동인가? 일제의 조선 민족 말살 정책에 맞서 싸운 문화투쟁은 적극적인 독립운동이 아니라는 말인가? 신명균의 경우 무장투쟁과 같은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았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이 아닌 조선어학회 등의 활동만을 하였기에, 독립유공 포상을 할 수 없다는 것으로 공훈심사과는 보고 있는 것 같다.

현재까지 조선어학회에서 언어독립운동을 전개한 33인 가운데 24명이 독립 유공자로 포상되었다. 그렇다면, 현재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의 논리대로라면 24명은 적극적인 독립운동은 하지 않았으나, 포상을 받은 셈이 된다. 조선어학회의 활동 등은 그간 형을 받은 분에 한해 포상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필자는 현재의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의 논리가 잘못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필자가 보기로는 196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의 공훈심사과의 논리는 언어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그로 인해 일제로부터 형을 받은 인사에게 포상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의 공훈심사과는 형을 받은 인사로만 포상 대상자를 한정하고 있다.

신명균의 경우 일제로부터 형벌을 받지 않았기에, 이번 포상 심사에서 탈락하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창씨개명 강행에 항거하고자 자결했다는 역사적 사실(事實)

조선어학회 발행
▲ <<개정한 한글맞춤법 통일안>>(1940) 조선어학회 발행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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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신명균은 일제의 우리말 말살과 창씨개명에 항거하여 1940년 11월 20일 자결하였다. 이에 대해 필자는 방증할 수 있는 여러 자료를 제시하였다. 일제는 조선 민족을 말살하고자 1938년에 학교에서 조선어 교과를 폐지하였고, 1940년에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일제가 우리말을 말살하고 창씨개명을 강행하자, 이에 항거하고자 그가 자결하였다는 역사적 사실(事實)을 여러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죽기 하루 전날 신명균과 대화를 나눈 작가 홍구(洪九,1908-?)는 "일본제국주의 야만적 정치는 조선으로 하여금 영원한 노예화를 목적으로 언어와 성명을 박탈하였다. 그때 선생의 비분은 말할 수 없었다. 이것이 선생이 자결하시기 직전의 사회적 사건(事件)이었다."(홍구, '주산선생(珠汕先生)', <신건설>, 1945, 12, 48쪽.)

이관술(李觀述, 1902-1950)은 "연전(年前) 일제의 모욕적인 창씨제도에 반항하여 자살해버린 신명균 선생이 있었다. 그는 일생을 양심적 민족주의자로서 마쳤거니와 또 내가 안 단 하나의 철저한 반일적 민족주의자이었다"(이관술, '반제투쟁의 회상'(상), <현대일보>, 1946, 4, 17.)

김오성(金午星, 1908-?)도 "저 민족적 치욕이던 창씨제도에 반항하여 자살해버린 양심적 민족주의자 신명균씨 단일인이었다."(김오성, '이관술론', <지도자군상>제1권, 대성출판사, 1946, 168쪽.)라고 기술하였다.

조지훈은 조선어학회 회관을 1936년 늦은 가을부터 출입하기 시작하였기에 누구보다도 조선어학회 사정을 잘 알 수 있었다. <한국민족운동사>(1964)를 저술한 조지훈은 "창씨문제가 나왔을 무렵에 신명균선생이 그 스승 나철 선생의 사진을 품은 채로 자결하셨다"라고 밝혔다.(<고대신문>, 1955, 10, 31.; 조지훈, <돌의 미학>, 1964, 42쪽)

언어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조선어학회에 대해서도 일제는 1930년대 말엽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가맹하라고 압박하였다. 이 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조선어학회도 해산이 불가피하였다. 조선어학회의 간판도 '국민총력조선어학회연맹'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당시 조선어학회는 외래어표기법의 통일과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마무리 중이었다. 이 일의 완성을 위해 조선어학회는 1939년 2월 6일 임시총회를 열어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들어갔다. 그러나 간판의 교체도 용납할 수 없었던 신명균은 자결을 시도하였다.(한설야, '두견', <인문평론>, 1941, 4, 163-164쪽.)

이처럼 소설가 한설야는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항거하여 자결한 신명균의 고결한 삶을 길이 예찬하고자 소설 <두견>을 발표하여 후세에 남겼다.

조선어학회에서는 그가 11월 20일 별세하였다고 기술하였다.(<한글>, 조선어학회, 1940, 12, <지난달 소식>부분.) 이병기는 그가 양력 11월 21일에 음독 자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병기는 22일 홍제원 화장장에 나갔고, 오후 1시에 영결식을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이병기, <가람일기>2, 신구문화사, 1976, 518쪽.) 

독립운동사 전공자가 심사에 참여했는지 의문

이상을 종합해 보면 신명균은 1940년 양력 11월 20일에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와 우리말 말살에 항거하여 음독 자결하였고, 그 날부터 계산하여 3일이 되는 11월 22일에 발인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공훈심사과는 이러한 자료가 일제의 탄압에 대해 항거하고자 신명균이 자결한 직접적이면서도 분명한 사유로 보이지 않는가? 이러한 자료가 일제에 맞선 항거 자료가 아니라면 필자는 할 말이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국민 여러분이 현명하게 판단하여 주고, 역사는 필자의 주장이 맞다고 평가해 주리라고 믿는다.

1962년 국가보훈처는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자결한 조병세와 민영환에게 각각  '대한민국장'을 포상하였다. 같은 해 을사늑약 체결에 찬동한 5적을 참수하기를 상소하고 1910년 9월에 단식 순사한 이중언에게 독립장을 포상하였다. 이에 덧붙여 자결 순국한 인사들이 포상 받은 사례는 많다. 신명균의 공적도 이들에 뒤지지 않는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필자는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에 요구한다. 독립유공 포상 탈락 사유를 상세히 밝혀주기를 바란다. 달랑 한 줄로 기재함은 포상을 바라는 독립유공 후손이나 관련 인사들의 간절한 처지를 무시한 것이다.

자세히 밝혀주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울러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 구성도 다양하게 하기를 권고한다. 문화운동 관련 독립운동사 전공자가 심사에 참여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에 지적하는 것이다.



태그:#신명균,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조선어학회, #한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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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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