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일생 동안 성장하고 배웁니다. 신체적 성장은 태어나서 사춘기까지의 기간 동안 마무리 되지만, 지적 능력과 감정의 발달은 생애 단계에 따라 양상을 달리 하면서 천천히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요. 그러니, 다양한 인생을 대리 체험하게 해 주는 소설이나 영화, 연극 같은 내러티브 예술에서 성장에 관한 이야기가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우리나라에서 <비포 선라이즈>를 비롯한 '비포(Before) 시리즈 3부작'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본래 남자의 성장이라는 테마를 즐겨 다루고 특유의 사적인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극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재작년에 개봉했던, 6세에서 18세까지 성장하는 소년의 이야기를 기록한 <보이후드>는 그의 작품 세계를 그대로 요약해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 <에브리바디 원츠 썸!!>은 전작 <보이후드>가 끝을 맺는 지점, 그러니까 주인공 소년이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어머니의 곁을 떠나는 순간 바로 다음 상황에서 출발하는 영화입니다. 주인공도, 배경이 되는 시대도 다르지만, 가정을 떠나 독립 생활을 시작한 소년,남자가 치르는 일종의 통과 의례를 다룬다는 점에서 전작의 연장선상에 있지요.

감독의 의도와 배우의 연기가 맞아떨어지다

 영화 <에브리바디 원츠 썸!!>의 한 장면. 야구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 제이크(블레이크 제너)는 팀 선배 및 동기들과 개강 직전의 떠들썩한 며칠을 보내게 된다.

영화 <에브리바디 원츠 썸!!>의 한 장면. 야구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 제이크(블레이크 제너)는 팀 선배 및 동기들과 개강 직전의 떠들썩한 며칠을 보내게 된다. ⓒ 디스테이션


1980년 여름, 야구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하게 된 주인공 제이크(블레이크 제너)는 개강을 앞둔 마지막 주말에 학교에 도착합니다. 야구팀 멤버들의 기숙사에 짐을 풀게 된 그는, 선배 및 입학 동기들을 만나 개강날까지 시끌벅적한 4박 5일을 보냅니다. 파티와 술, 원나잇, 남자들만의 우정, 야구부 연습, 새 여자 친구 등으로 바쁘게 지낸 끝에 개강날 첫 수업을 맞이하게 되지요.

주인공이 겪는 여러가지 일들은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른 미국의 것이지만, 수많은 할리우드 청춘물에서 익히 봐왔던 것들이어서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감독은 그런 익숙한 상황 설정을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로 삼습니다. 다양한 유형의 이 또래 소년, 남자들의 초상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요.

이 영화에 나오는 여러 캐릭터들이나 그들이 주고 받는 대화는 꽤 보편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 시절을 겪어 본 사람들이라면 국적과 시대를 막론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구석이 많습니다. 실제 야구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한 경력이 있는 감독 자신의 경험도 많이 녹아 있을 텐데, 주관적 취향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게 취사선택한 것이 성공 포인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배우들의 자연스런 연기는 감독의 의도를 탄탄하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미국 인기 드라마 <글리>의 블레이크 제너, 미국 드라마 <틴 울프>에서 데릭으로 나오는 타일러 헤클린, <스텝 업> 4, 5편과 <더 보이 넥스트 도어>에서 매력을 발산한 라이언 구즈먼 등 할리우드의 떠오르는 신예들이 주역을 맡아 좋은 앙상블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좀 아쉬운 것은 오로지 남자들, 그것도 백인 남성의 관점에서 모든 것이 묘사된다는 것입니다. <보이후드>는 소년의 이야기지만, 엄마와 여동생도 적지 않은 비중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비교적 균형잡힌 서술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선 설정상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후반부에 제이크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베벌리(조이 도이치)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녀는 남자들이 생각하는 이상형, 즉 '예쁘고 똑똑하고 배려심까지 있는 백인 여자애'라는 전형에 맞춰 가공된 캐릭터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거든요.

영화가 인간의 삶을 그려낼 때

 영화 <에브리바디 원츠 썸!!>의 한 장면. 제이크(블레이크 제너)는 같은 신입생인 베벌리(조이 도이치)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며 서로를 알아간다. 주요 등장인물들 중 홍일점이라 할 수 있는 베벌리는 남자들의 이상형에 가까운 매력적인 여성이지만, 극 중에서 제이크의 여자친구 노릇 이상은 하지 못한다.

영화 <에브리바디 원츠 썸!!>의 한 장면. 제이크(블레이크 제너)는 같은 신입생인 베벌리(조이 도이치)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며 서로를 알아간다. 주요 등장인물들 중 홍일점이라 할 수 있는 베벌리는 남자들의 이상형에 가까운 매력적인 여성이지만, 극 중에서 제이크의 여자친구 노릇 이상은 하지 못한다. ⓒ 디스테이션


그 때문에 유색 인종, 여성, 성소수자 진영에서는, 백인 남성 감독이 좋았던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는 일종의 자기 합리화 또는 자아 도취에 가까운 영화라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 대해서 '남자들에게 20살 전후의 시기란 뭐든지 할 수 있을 것같은 의욕이 넘치는 때이니, 오히려 가식 떨지 않고 솔직하게 묘사한 것'이라며 반론을 펼치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더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대에 폭발적으로 등장한, 미국의 수많은 독립 영화 감독들 중에서 리처드 링클레이터만큼 꾸준한 생산력을 보여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숱한 영화과 출신 엘리트 감독들이 자아의 문제를 뒤쫓고 새로운 방식의 영화를 고민하며 허송세월하는 동안, 대학 중퇴에 석유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관심사와 이야기를 담담하고 정직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영화들을 통해 여러 나라의 관객들과 교류해 왔습니다.

그의 장수 비결은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성장 테마를 집중적으로 추구한 것에 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자아와 인간 관계에 관심을 두면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떠올려 봤을 문제나 생각들을 가식없이 풀어낸 것이 꾸준한 호응을 받게 된 것이죠. 할리우드의 표준화된 화법이나 제작 방식을 따르지 않으면서도요.

최근 몇 년 간 한국 영화계는 정말 괜찮은 영화들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게 나오면서 부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천만 영화는 매년 등장하고 있지만요. 가장 큰 이유는, 장르적 외형이나 소재가 주는 재미에만 천착할 뿐 그 안에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남다르고 있어 보이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실패하는 경우도 많고요.

이제는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예가 보여주듯 성장, 사랑과 결혼, 언젠가 맞닥뜨릴 죽음 같은 전통적인 주제들을 영화 안에 잘 녹여 넣는 것을 고려해야 할 때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일이니 만큼 잘만 만들면 공감의 폭과 깊이가 남다른, 걸작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2000년대 들어 성장 테마를 적극적으로 채용한 할리우드 영화들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상투적이고 촌스럽다고 외면하지 말고, 이런 주제들을 적절하게 장르 영화에 집어 넣을 생각을 한다면 한국 영화들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좋은 결과물들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 <에브리바디 원츠 썸!!>의 포스터. 작금의 한국 영화계가 한 번쯤 참고할 만한 영화이다.

영화 <에브리바디 원츠 썸!!>의 포스터. 작금의 한국 영화계가 한 번쯤 참고할 만한 영화이다. ⓒ 디스테이션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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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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