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라면 좀비 정도야.

남자라면 좀비 정도야. ⓒ NEW


처음 영화 <부산행>을 보고 난 뒤, 나는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다음과 같은 감상평을 남겼다.

"간만에 보는 수작이다."
"<괴물> 같던 사회가 <부산행>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연상호 감독의 영화는 챙겨볼 것 같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불편한 만큼 좀비 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러자 몇몇 친구가 힐난하고 나섰다. 내 이야기를 믿고 너무 기대하고 갔다가 실망했다느니, 아무리 그래도 관객 1000만은 들이기 힘들겠다느니,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비교하기에는 아직 깜냥이 안 된다느니 등등.

응? 내가 너무 영화에 관대했던 건가? 그러고 보니 실제로 인터넷에서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영화에 대한 비판이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판들은 하나같이 설득력이 있었다.

우선 영화의 전형성에 대한 비판. 그렇다. <부산행>은 너무 빤하다. 비록 한국 영화 중에서는 좀비를 가장 잘 표현한 건 사실이지만,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너무 평면적이다 못해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이기적이기만 한 사람과 이타적이기만 한 사람. 과연 세상 사람들을 이렇게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물론 영화에서 주인공의 경우는 이기적이었다가 이타적으로 변해가지만, 이 역시 작위적인 느낌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부산행>은 신파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누구보다도 냉정했던 펀드매니저가 좀비라는 전대미문의 재앙 앞에서 아빠의 이름으로 가족을 위해 헌신하면서 우리가 늘 보아왔던 신파의 주인공으로 변신한다. 그는 아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던지면서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여성을 수동적으로 그렸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여성을 수동적으로 그렸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 NEW


또한 <부산행>은 매우 남성주의 영화이다. 영화에는 많은 여성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남성의 보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로서 무기력하고 수동적이다. 물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건 여성들이지만, 그것은 숱한 남성들의 희생으로 지켜진 목숨일 뿐, 생존만으로 여성이 이 영화에서 능동적으로 묘사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부산행>은 철저히 남성의 시각에서 쓴 영화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부산행>에 대한 비판들. 그것들을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내가 영화를 보면서 가졌던 호감이 너무 안일했던 게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슬며시 들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 <사이비>나 <돼지의 왕>에서 보여주었던 연상호 감독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에 내가 너무 감화되어 <부산행>을 관대하게 본 건가?

그러나 이런 생각은 며칠 전 부산, 울산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사라졌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을 보면서 <부산행>의 진가를 다시금 느끼게 된 것이다. 영화가 영화로서 머물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영화 같이 만드는 힘. <부산행>은 비현실적인 '좀비'를 소재로 현재 우리 사회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오해라는 국가

 항상 누런 옷을 입고 등장하여 '걱정하지 말라'고 외치는 정부. 기시감이 들 수밖에 없다. KBS 뉴스 화면 갈무리.

항상 누런 옷을 입고 등장하여 '걱정하지 말라'고 외치는 정부. 기시감이 들 수밖에 없다. KBS 뉴스 화면 갈무리. ⓒ KBS


며칠 전 부산과 울산 지역에서는 영문 모를 가스 냄새 때문에 신고가 빗발쳤었다. SNS에서는 그전에 일어났던 지진이나 노후 원전, 부산의 미군 독성물질 실험 등과 연결해 대재앙의 전조가 아니냐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최근에는 부산 광안리의 개미떼 죽음과 울산 심해어의 등장까지 더해져서 더욱 많은 사람이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민들의 불안함에 대해 정부의 대응은 안일하게만 느껴진다. 부산시와 정부는 21일부터 신고 전화가 빗발쳤음에도 불구하고 가스 냄새가 지진이나 미군의 실험 등과 상관없다고만 이야기할 뿐, 그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국민안전처 합동점검단도 26일에야 구성했고 현재 대통령은 휴가 중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잘못된 의심이라면 정부의 태도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전문가들도 모른다고 하는 걸 관료들이 밝혀낼 수도 없는 노릇이며, 어쨌든 지역의 공무원들은 신고를 받은 뒤 최선을 다해 그 지역을 뒤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결국 신뢰다. 현재 많은 국민은 정부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당장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버리고 가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가 오히려 되돌아와 국민을 사살했던 이승만 정부까지 거슬러가지 않아도 충분하다. 이미 우리는 이 정부가 국민의 목숨이 걸린 일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태만하고 안이하게 대처했는지, 심지어 거짓말까지 일삼았는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나 메르스, 가습기 살균제 사태까지 현 정부는 매번 괜찮다고만 했지, 아무것도 속 시원하게 밝히거나 해결한 일이 없다. 수많은 사람이 오랜 시간 동안 길바닥에 주저앉아 생계를 내팽개치고 진실을 이야기해 달라 해도 그들은 오로지 믿으라는 말만 할 뿐, 진실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니 어찌 국민이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정부의 보도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항상 있는 자들의 안위를 우선시했고, 국민의 안전보다는 정권의 안정을 더 소중히 여겨왔었다. 그러니 정부가 있는 그대로를 말하더라도 그것은 더는 진실일 수 없다.

<부산행>은 바로 이 부분을 정확하게 우리 앞에 소환해 낸다. 영화 속 정부는 좀비의 출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황 앞에서 여전히 누런 민방위복을 입고 언론을 통해 아무 이상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만 반복한다. 항상 그렇듯 모든 소요는 불순분자들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니 양식 있는 시민들은 동요하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고 한다.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국민을 나누어 상황을 통제하려고 한다.

관객들이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현재 우리는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현실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전 국민이 빤히 지켜보는 상황에서 그 큰 배가 속수무책으로 가라앉아 300명이 수장되는 현실. 그 앞에서 정부는 끊임없이 괜찮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기만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과연 이런 현실을 좀비보다 현실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그런 정부의 발표를 믿지 않는다, 영화 첫머리에서 어느 필부가 읊조리듯 저것들의 말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정보를 얻으려 한다. 실시간 검색어로 사태를 파악하며, 동영상 등을 통해 서로의 정보를 공유한다. 그러나 그 역시 정확하지 않다.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 믿을 수 있는 건 궁극적으로 오직 나 자신과 가족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신뢰가 사라진 우리 사회를 보여준다. 사회에 수많은 정보가 유통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정보에 굶주려 있으며 고독하다. 불신이 가득한 사회는 결국 유지되기 힘들다. 신뢰의 비용 탓이기도 하지만, 사람은 기본적으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에서 모두 패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가 더 괴물인가

 누가 괴물인가. 좀비인가, 생존자인가, 국가인가.

누가 괴물인가. 좀비인가, 생존자인가, 국가인가. ⓒ NEW


<부산행>은 이걸로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좀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을 영화의 한가운데로 끌어당김으로써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뭉개버린다. 그리고 모든 장면에서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당신이면 어찌하겠느냐고.

좀비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감염이 의심되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그들의 악다구니를 보고 있으면 과연 좀비와 그들 중 누가 더 괴물인지 물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다. 비록 영화에서는 비겁하고 비루하게 그려지지만, 그것이 결국 우리들의 실제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단일민족 운운하며 제3세계 노동자를 비하하고, 심지어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조선족이나 탈북자들은 물론이요, 이제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는 이 사회에서 과연 우리는 나와 다른 타자를 얼마나 포용하며 살고 있을까? 온갖 혐오들이 떠도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를 아무리 욕해도, 그는 우리의 민낯이다.

그를 아무리 욕해도, 그는 우리의 민낯이다. ⓒ NEW


많은 관객이 영화에서 김의성 분의 용석을 욕하지만, 그는 우리의 민낯이다. 차마 그처럼 하지 못하더라도 우리 대부분은 그를 핑계로 그의 주위에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음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터부시한다.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굴러왔던 방식이며 우리가 '우리'를 만들어냈던 방법이다.

먹고사니즘을 핑계로 '나만 아니면 돼'라는 명제를 절대화, 내면화시킨 우리 사회는 더는 좀비의 격리가 중요하지 않다. 이미 우리는 좀비보다 더한 괴물이 되었으며, <부산행>의 KTX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를 확산시키고 있다. 그것이 <부산행>이 관객들에게 직접 보여주는 메시지이다.

<부산행>은 현재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현실적이지 않지만, 결코 비현실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영화. 우리는 현재 좀비들과 함께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다. 과연 우리는 이 KTX를 탈출할 수 있을까?

부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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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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