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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 말
괴시마을 정경 종택 뒤 언덕에서 바라다본 괴시마을 정경. 종가, 물소와고택, 천전댁이 보이고 마을 앞에 괴시뜰이 넓게 펼쳐있다. ⓒ 김정봉
영해3.18독립만세기념탑 영해장터로터리에 있다. 여느 고을과 달리 만세기념탑이 고을 한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 김정봉
[기사 수정 : 2일 오후 9시 54분]

동해안에서 가장 넓은 들을 가진 고을이 영해(영덕군 영해면)다. 동해안에 있어도 밭보다 논이 많다. 영해평야, 영해들을 마당삼아 괴시마을, 인량마을, 원구마을에 오래전부터 세도가들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영해는 '작은 안동'으로 불렸다.

인량마을에 8성씨, 12종가가 들어섰고 원구마을에 3성씨가 뿌리내렸다. 괴시마을은 고려말 목은 이색의 외가, 함창김씨가 터 잡은 뒤, 수안김씨, 영해신씨를 거쳐 400년 전, 영양남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영해는 1914년 영덕으로 편입되기 전까지 영덕보다 더 큰 고을이었다. 영해면 누리집에도 '영덕의 중심, 영해'라고 소개하고 있다. 영해는 믿기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 1919년, 영해장터에서 벌인 3.18독립만세운동에 2000명이 참여, 한강이남에서 벌인 만세운동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는 것이다.

평민 출신으로 항일의병대장으로 활약한 신돌석 장군도 영해에서 났다. 장군이 난 곳은 현재 영덕 축산면이지만 예전에는 영해였다. 2014년 말 기준, 독립유공자가 경북에 2071명 있는 가운데 안동 344명, 영해를 비롯한 영덕이 206명이라는 점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영양남씨 집성촌, 괴시마을...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고택들
마을담과 마을 고택 마을담은 흙으로 쌓은 토담, 마을 담이 끈이 되어 고택들을 잇고 있다. ⓒ 김정봉
영해장터 코앞에 있는 괴시마을에도 동학혁명에 관여하거나 항일운동을 한 인물들이 수두룩하다. 동학혁명의 사후관리를 맡아본 남유진, 신돌석 의병장을 후원하고 영해3.18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남계병,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순국한 남진두와 이밖에 남효진, 남응하까지 모두 영양남씨 괴시파 후손들이다. 

괴시마을에 맨 처음 터 잡은 영양남씨는 남두원(1610-1674). 그의 아들 남붕익(1641-1687)은 영양남씨 괴시파종택을 지었다. 종택을 중심으로 주변에 자손집들이 가득하다. 종택, 대남댁, 괴정, 해촌고택, 구계댁, 물소와고택, 경주댁, 주곡댁, 영감댁, 백회재고택, 천전댁, 사곡댁까지 얽힌 타래처럼 고택들이 얽혀 있다. 

물소와고택, 말맛이 재미있다. 물소와(勿小窩)는 작은 집(小窩)으로 여기지 말라(勿)는 의미인가? 작은 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니, 작은 것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는 의미일 게다. 일찍이 한나라 소열제(유비)는 '선은 작다고(小) 행하지 않으면 안 되고(勿) 악은 작더라도(小) 행하면 안 된다(勿)'라고 했다. 물소와에는 이런 철학이 담겨 있다. 작은 선이라도 자주하면 적선이요, 작은 악을 반복해서 하면 적악이 되니 이를 경계하는 것이다.
물소와고택 영양남씨종택 아래에 있다. 사랑마당에 있는 배롱나무가 근사하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헛담을 높이 쌓아 두 집처럼 보인다. ⓒ 김정봉
주곡댁 물소와 남택만의 아들, 남경괄이 지은 집이다. ‘미재’와 ‘지암’ 현판을 달고 있어 물소와고택만큼이나 말맛이 좋은 집이다. ⓒ 김정봉
물소와 철학은 아들 집 주곡댁으로 이어진다. 사랑채 처마 밑에 '미재(未齋)'와 '지암(遲庵)' 현판이 달려있다. 미재는 아직 덜 된 미완성 집이고 지암은 더디게 살아가는 집이라는 뜻이다. 아직 부족한 게 많고 더디게 살아가는 사람이 거처하는 집이라는 의미다. 막 캐 온 양파를 다듬고 있는 주곡댁 주인양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말문을 트고 안채를 들여다볼 겸 주인양반께 '미재'와 '지암'에 대해 물어보았다. 내가 짐작한 것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여기에 한마디 덧붙인 것은 모두 선조의 호라고 하였다. 안채에 들어가 보았다.

펑퍼짐한 섬돌 위 방문에 달려있는 토적성산(土積成山)이 눈에 확 들어왔다. 흙이 쌓여 산을 이룬다는 뜻으로 작은 것이 쌓여 큰 것이 된다는 뜻이다. 작은 것은 결코 작지 않다는 '물소와'와 뜻이 통한다. 누가 물소와 자식 아니랄까봐! 속으로 웅얼거렸다.
주곡댁 안채 방 문 위에 붙여놓은 토적성산 글귀가 눈에 띈다. 흙이 쌓이면 산이 되고 선이 쌓이면 적선이 된다. 작은 것 하나라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는 ‘물소와’와 통한다. ⓒ 김정봉
영감댁, 경주댁, 영은 고택, 구계댁... 괴시마을 굴뚝들

괴시마을에서 맨 처음 눈에 띄는 굴뚝은 영감댁 굴뚝이다. 굴뚝 몸은 암키와로 주름무늬를 내고 몸체에 오지를 두개 연결해 연기구멍을 만들었다. 처마 밑, 주름진 몸에서 불쑥 밖으로 내민 오지굴뚝은 좀 민망해 보이기는 해도 개성이 강한 굴뚝이다.

올망졸망한 항아리 곁에 있는 경주댁 굴뚝은 자기새끼 돌보는 토실한 '어미암탉'같고 영은고택 네모난 굴뚝은 명품 연적(硯滴) 닮았다. 연도(煙道) 따라 마루 밑 깊숙한 곳에서 마당까지 나온 구계댁 굴뚝은 흙과 막돌로 만들어져 질박하고 대남댁 굴뚝은 사당을 지키려는 듯 그  모양이 제법 당당하다.
영감댁 굴뚝 굴뚝 몸은 암키와로 주름무늬를 만들고 몸체에 오지를 두개 연결해 연기구멍을 만들었다. ⓒ 김정봉
경주댁 굴뚝 반질반질한 항아리 곁에 있는 굴뚝은 병아리 살피는 어미암탉 닮았다. ⓒ 김정봉
영은고택 굴뚝 새로 만든 굴뚝으로 보이나 명품연적을 보는 것 같다. 잘 생겼다. ⓒ 김정봉
구계댁 굴뚝 마루 밑 깊숙한 곳에서 시작한 연도는 마당까지 이어졌다. 흙과 막돌로 질박하게 만든 굴뚝이다. ⓒ 김정봉
물소와고택 굴뚝은 어떻게 생겼을까? 문이 잠겨 통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종가에서 담 너머로 봐야 한다. 집 모퉁이에 하나가 보였다. 회칠로 새 단장한 굴뚝이어서 감동을 주지 못한다. 주곡댁이나 종가 굴뚝도 거의 마찬가지다. 집안 철학을 담아, 뭔가 부족한 듯, 작지만 작지 않은 굴뚝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낮은 굴뚝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 마을 굴뚝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해도 괴정 굴뚝이다. 문을 닫아 놓아 담 너머로 어렵게 보았다. 굴뚝은 괴정 뒤에 숨었다. 함실아궁이와 나란히 있는 보기 드문 굴뚝이다. 고래를 타고 들어간 연기가 구들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아궁이 쪽으로 나오도록 놓은 되돈고래에 설치하는 굴뚝이다. 의도적으로 불기운을 가급적 멀리하려고 하는 정자나 서당에 주로 쓰이는 굴뚝이다.   

다시 물소와 고택 앞에 섰다. 작은 것, 작은 선은 무엇인가? 남유진을 비롯한 영양남씨 후손들은 나라 잃은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로 만세운동에 동참하거나 주동하였고 항일운동에 몸 담았다. '마땅히' 해야 할 도리이므로 이들은 아주 작은 일, 작은 선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들에 대한 평가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괴정 굴뚝 아궁이(왼쪽)와 나란히 있는 굴뚝(오른쪽)으로 다른 굴뚝과 아주 다른 굴뚝이다. ⓒ 김정봉

덧붙이는 글 | 6/27~29에 청송, 영덕, 영덕에 다녀와 쓴 글입니다

태그:#영덕 영해, #괴시마을, #굴뚝, #물소와고택, #주곡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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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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