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종묘, 해인사 대장경판, 석굴암 등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훌륭한 조상들의 문화 유적이 많다. 조상들이 물려주신 유산이 세계인들 사이에서 어깨를 당당히 펴고 한 자리 차지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우리 시대는? 우리 시대의 것 중, '유산'이 되어 세계인은 둘째치고, 후손들에게 남겨 줄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이 대답엔 그 누구도 선뜻 답을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건설입국의 나라에서, 오래된 것은 곧, 철거 대상. 어쩌면 우리는 우리 후손들에게 유산 하나 물려주지 못하는 세대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우리의 풍토에서, 지난 24일 방영된 KBS 1TV <다큐 공감>을 통해 방영된 '낙원 상가 살리기, 내 인생의 콘서트'는 이런 우리 시대 문화유산에 대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현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40년 된 세계최대 악기 상가, 낙원 상가

낙원상가는 1968년에 지어졌다. 5층 상가에 15층짜리 아파트가 함께 하는 이 곳은 지어질 당시 한국 최초의 주상 복합 건물이었다. 1960년대식 한 글자가 실종된 '낙원삘'이란 건물 명패가 남아 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엘리베이터가 아직도 건재하게 운행되고 있다. 처음 다양한 상품을 팔던 이곳은 '악기 상가'들이 하나 둘씩 자리잡으면서 이제는 300여 개의 악기상들이 모여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악기 상가'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낙원 상가라고 해서 세월을 순조롭게 넘기지는 못했다. 재개발 열풍이 이곳에도 휘몰아쳐, 2000년대 '도심 재창조' 명목으로 철거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건물 안전 진단 결과, 한강의 모래와 자갈돌이 뒤섞여져 만든 이 건물은 여전히 못 하나 들어갈 틈이 없는 100년은 끄떡없다는 진단을 받았고, 철거의 광풍을 피해갈 수 있었다. 이곳 악기 상인들의 악기상의 메카인 낙원 상가를 지키기 위한 노력도 한몫했다.

서울 중심의 낙원 상가처럼, 곳곳의 특색있는 거리가 정부의 '도심 재창조'를 통해 전통이 무색하게 건물 일부로 그 존재감을 상실하거나, 아예 둥지를 잃은 채 뿔뿔이 흩어져 버린 것과는 다른 거주민 의지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세월을 거스르기는 힘든 법. 한때 도심의 번듯한 주상 복합 건물은 종로 3가 한구석에 웅크린 채 서 있다. '최대 규모의 악기 상가'라는 자부심이 무색할 정도로 행인들의 발걸음이 뜸해지고 있다. 통기타 붐이 일었던 시대에는 기타를 사기 위해 젊은이들이 뻔질나게 발길 하던 곳, 그리고 피아노 열풍이 불던 때는 조율과 수리의 메카였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다 옛날이야기다. 이제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낙후된 건물'이나, 추억의 장소로 여겨질 뿐이다. 낙원 상가 상인들은 악기가 필요한 사람들만 찾는 특수한 곳인 낙원 상가가 아닌, 다시 사람들의 발걸음을 끌어들이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낙원 상가가 나이 드는 법

그 고민의 결과물은 문화유산으로서의 낙원 상가, 다양한 문화적 활동이다. 중고 악기 기부 캠페인이 대표적이다. 시민들에게 악기를 기부받고, 낙원 상가의 기술력으로 그 악기를 소생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살아는 악기는 악기가 필요한 꿈나무나, 학교, 직장인들의 손으로 돌아가 다시 음악을 연주한다. 또 은퇴한 음악인이나 대중 음악인들의 품앗이로 음악 하는 반려 악기 캠페인 등 낙원 상가는 그저 악기를 팔고, 수리하는 '상점'이 아닌, '문화유산'으로서의 존재감을 스스로 새롭게 정립해나가는 중이다.


<다큐 공감>은 1970·1980년대 인기를 끌었던 통기타 동아리 상투스 초기 멤버들의 콘서트를 보여주었다. 1968년에 세워진 낙원 상가가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통기타 붐과 함께였다. 그리고 통기타 동아리 상투스는 1970년대 만들어진 대학생들의 통기타 동아리로, 당시 대학생이었던 젊은이들은 통기타를 사기 위해 낙원 상가를 들렀다.

당시 산 기타와 함께 이젠 희끗희끗한 머리의 중 노년들이 된 이들은 바로 '낙원 상가'를 있게 한 음악의 향유자들이었다. 낙원 상가와 함께 나이 든 이 40년 지기 벗들이 함께 한 공연은 남달랐다. 기타를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기타로 밥을 벌어먹고 살지는 않은 이들. 하지만 여전히 기타로 인해 인생이 행복하다는 사람들. 바로 그들의 존재가 낙원 상가의 지난 40년, 앞으로의 100년을 버텨갈 힘이 되는 것이다.

낙원 상가 4층 야외에 마련된 공연장. 공연에는 한때 장발의 머리로 나팔바지를 휩쓸며 기타를 둘러맸을 젊은이들이 희끗희끗한 머리로 노래했다. 청바지 입은 그들은 눈빛을 교환하고 화음을 맞췄다. 통기타 시절 유행하던 팝송들을 다시 입을 모아 부를 때, 그들은 여전히 젊었다. 그리고, 그 젊음을 소환해낸 낙원 상가 역시, '이 시대의 문화유산'으로 멋지게 늙어가고 있었다.

물론 콘서트는 조촐했다. 하지만 도심 한구석에서 낙후된 건물로 그저 낡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부단히 모색하는 낙원 상가의 모습은 이 시대 우리의 문화유산의 방향을 제시한다. 영국의 오래된 서점 거리 '헤이 온 와이(hay on Wye)'가 이제 영국에 가면 들러봐야 할 유명 여행지가 된 이유는, 그곳을 즐겨 찾는 영국인들의 문화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계 최대'라는 악기 상가의 이름표 대신, '문화 공간'으로서 낙원 상가를 모색하고자 하는 모습을 다룬 <다큐 공감>은 소소한 도전이지만 소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