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은 한국 영화 최초의 제대로 된 좀비 영화다. 한 발짝 떨어져서 영화의 골격을 훑어보면 1000만 관객을 노골적으로 겨냥했음이 느껴지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만큼은 한 발짝 떨어지는 게 쉽지 않다. 그만큼 몰입도가 높고 강렬하다. 좀비물을 손발이 오그라들지 않게, 아니 그럴 틈조차 없게 만들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기립박수를 보내도 모자란다.
'잔가지는 쳐낸다'<부산행>의 목적은 뚜렷하다. 좀비(감염)가 발생하게 된 원인?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 우리가 쟁취할 수 있는 결과? <부산행>은 그런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다. 오로지 열차라는 직선 상의 좁은 공간에 집중하고, 아비규환이 된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지금 이 순간의 사투에만 집요하리만치 몰두한다.
관객들은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좀비의 출현, 그것도 떼로 달려드는 이 끔찍한 상황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건 무력감이다. 그래서 상화(마동석 분)의 등장은 묘한 안도감을 준다. 원인, 해법, 결과와 같은 곁길을 돌아보지 않는 영리한 선택 덕분에 <부산행>은 관객들을 혼돈 속으로 밀어 넣고, 더욱 집중하고 몰두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어떤 방어도 할 수 없이 순식간에 좀비에 감염돼 버리는 사람들처럼 관객들은 어느새 <부산행>에 감염된다.
하지만 영화 곳곳에서 아쉬운 대목들이 눈에 띈다. 우선, 전형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측을 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좀비와는 달리 이야기의 흐름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예측할 수 있게 흘러간다. 그건 영화 속 캐릭터들이 지나치게 평면적이기 때문이다. 재난 영화에서 실질적인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재난인 것처럼, <부산행>의 진짜 주인공은 끊임없이 각기 춤을 추는 좀비처럼 보인다.
극단적인 악마성을 드러내는 용석(김의성 분)과 상화는 지나치게 경직돼 있다. 아무리 살고자 하는 욕망, 그 처절한 이기주의가 인간 본연의 것이라지만, 용석의 그것은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도드라진다. 또 좀비마저도 손쉽게 제압하는 상화의 압도적인 힘은 어이 상실 수준이다. "마동석 10명이면 좀비들 다 때려잡겠는데?"라는 실소가 절로 나온다. 무엇보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 농담하는 여유라니!
<부산행> 속 여성 캐릭터?영화 후반부에 석우(공유 분)가 보여주는 고해성사는 제법 눈물샘을 자극한다. 신파라 하더라도 재난 영화의 특성상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사실 이런 부분들은 이미 지적됐던 내용들이기도 하고, <부산행>의 좀비물로서의 가치에 비하면 눈감아도 무방할 단점이다. 그보다 우리가 함께 고민해 봐야 할 아쉬움은 <부산행> 속에서 여성 (캐릭터)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부산행>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여성은 석우의 딸 수안(김수안 분)과 상화의 아내 성경(정유미 분), 고교 야구선수 영국(최우식 분)을 좋아하는 진희(안소희 분)정도일 것이다. 물론 정체를 알 수 없고,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자매 종길(박명신 분)과 인길(예수정 분)도 있다. 솔직히 말하면, 이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좀비와 싸우는 데 <부산행> 속의 여성들은 방해가 될 뿐이다.
수안은 여자 어린이(아들이었던 설정이 딸로 바뀌었다고 한다)다.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임신해 배가 잔뜩 부른 성경은 어떤가? 당연히 보호의 대상이다. 그녀는 연신 상화를 찾는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이 새끼야!"라며 소리치곤 넓디넓은 '마요미' 마동석의 가슴을 쥐어박는다.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기 바쁜 진희도 영국에게 기댈 뿐이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부산행> 속의 여성들은 '누군가의 OO'로만 존재한다.
'등신같이 착하게만 살아온' 언니 인길이 좀비로 변한 것을 확인하고, 좀비들이 안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열차 문을 활짝 열어버린 종길은 공교롭게도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인간들을 응징하는 롤을 수행한다. 하지만 특별한 의지를 갖고 한 행동은 결코 아니다. 어쩌면 민폐라고 볼 수도 있는 행동이다. 기껏 살겠다고 용쓰는 사람들까지 죽여버릴 건 뭐란 말인가.
하지만 <부산행>에서 끝내 살아남는 것은 두 여성이다. 여기에서 감독의 의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남성들은 여성들을 지키다 희생된다. 물론 혼자만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못난 남성들도 있지만, 어린이와 임산부, 보호가 필요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건 당연한 일. 연상호 감독이 그려낸 '기사도 정신'은 사회의 미덕일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존재로만 그려진 것은 못내 아쉬운 대목이다.
어째서 <부산행>에는 여성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만한 싸움이 펼쳐지지 않는가. 어째서 모든 의사결정은 남성들이 도맡아 하고, 여성들은 그에 순응하거나 거부하는 존재로만 그려질까? 어째서 장렬히 싸우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여성은 보이지 않는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가 그 지옥 같은 싸움 속에서 거침없이 활약하는 모습을 <부산행>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면 금상첨화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