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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대학입시를 앞둔 두 고등학생, 영효(가명)와 정빈(가명)이가 있다. 이웃에 사는데다 중학교 시절 내내 단짝이었던 두 아이는 지금 서로 다른 일반계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다. 내신 등급도 비슷한데다 이따금 치르는 모의고사 점수 또한 엇비슷해, 가끔 만나면 같은 대학에서 만나자고 하이파이브를 나눈다고 한다. 둘은 모두 의대 진학을 꿈꾸며, 한창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 종합전형(학종)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둘의 학생부를 들여다보면 '스펙'이 사뭇 다르다. 최상위권인 교과 성적은 비슷한데, 비교과 영역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영효는 정빈이에 비해 수상경력이 화려하다. 각종 교내 경시대회를 휩쓸다시피 했는데, 특히 수학 관련 대회에서는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보고서 경진대회나 교내 토론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냈고, 심지어 지난 2년 동안 받은 선행상만도 무려 네 번이다. 학생부를 출력하면 수상경력만 거의 한 페이지를 다 채우고 있다.

정빈이는 경시대회를 준비하는 게 내키지 않았는지, 1학년 때 과학 탐구대회에서 2등, 2학년 때 영어 스피치 콘테스트와 수학 경시대회에서 2등 한 것이 전부다. 물론, 보통의 아이들의 처지에서야 부러워할 만큼 대단한 이력이지만, 비슷한 성적의 다른 친구들에 견줘 언뜻 초라해 보일 정도다. 수상 경력이 학종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천하태평일 만큼 '낙천적인' 아이다.

영효는 낙선하기는 했지만 학생회장에 출마한 경험도 있고, 지난 2년 간 학급 실장을 역임했다. 고등학교에서 실장의 역할은 사실상 담임교사를 보조하는 것 외에는 딱히 없긴 하다. 아이들조차 누가 맡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형식적인 직책이긴 하지만, 아무튼 2년 간 총무부장, 학습부장, 생활부장, 미화부장 등으로 구성된 학급 자치 조직을 이끈 경험 역시 학종에선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정빈이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실장을 맡아본 적이 없다. 그의 말에 따르면, 초등학교 때 담임교사가 '한 달 실장' 제도를 운영했다고 하는데, 그나마 한 번에 네 명씩 공동 실장이어서 어떻든 1년에 한 번씩은 실장이 되어야만 했단다. 어린 마음에도 그게 하도 우스워, 그 이후로는 실장이든 뭐든 쳐다보지도 않았단다. 그가 여태 경험한 '장'은 딱 하나, 지금도 죽고 못 사는 축구 동아리의 회장뿐이다.

영효와 정빈이, 둘 다 의대를 지망하지만...

둘은 모두 의대 진학을 꿈꾸며, 한창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 종합전형(학종)을 준비하고 있다
 둘은 모두 의대 진학을 꿈꾸며, 한창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 종합전형(학종)을 준비하고 있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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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로부터 "공도 잘 차는 녀석이 공부마저 잘 한다"는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정빈이와는 달리, 영효가 활동하는 곳은 낯선 영문 이니셜을 딴 의학 관련 자율 동아리다. 요즘 들어 선후배끼리 유대 관계가 돈독한 오래된 동아리보다 대학입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신생 자율 동아리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학종이 보편화되면서 고등학교마다 유행하게 된 동아리 활동의 새로운 트렌드다.

의학 관련 서적을 읽은 후 서로 토론을 하고, 인근 병원이나 제약업체 등을 찾아가 진로에 대한 현직 의사나 연구원의 조언을 듣는 등의 활동을 한다. 말하자면, 진로 탐색 활동을 겸한 스터디 그룹 형태의 동아리인 셈이다. 불과 한두 해만에 학교 내에서는 의대를 지망하는 경우라면 자동으로 가입하게 되는, 동아리 활동계의 '아너스 클럽(Honors Club)'이 되었다.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초지일관 의사의 길로 들어선 영효와는 달리, 정빈이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진로를 정했다. 초등학교 때는 축구 선수였다가, 중학교 들어와서는 방송 피디와 기자를 꿈꿨고,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잠시 대체 에너지를 연구하는 과학자를 염두에 두기도 했다. 그런 그가 돌고 돌아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을 굳힌 건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축구를 하다가 한 친구가 공중 볼을 경합하는 과정에서 팔꿈치로 상대 팀 한 아이의 치아 하나를 부러뜨리는 일이 있었다. 학교에서 보험 처리도 하고 양쪽 부모님들끼리 원만하게 타협을 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그의 부러진 치아는 회복되지 못했다. 이내 운동은 아주 위험한 일로 치부됐고, 다친 아이도 부상을 입힌 아이도 그 일 이후 축구화를 내다버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운동을 하는 데 위험 요소를 사전에 제거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나름 고민을 하다 스포츠 의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듣기에 조금은 황당하긴 해도, 그는 먹으면 얼마 동안 뼈를 무르게 해주는 약과 바르면 근육에 탄력을 순간 배가시키는 로션 같은 것을 개발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의대 진학에 마음을 굳힌 상태지만, 여전히 그는 의사가 아닌 축구에 방점이 찍혀있는 셈이다.

원하는 대학 진학을 위한 스펙 쌓기

영효와 정빈이는 봉사활동을 다닌 곳도 전혀 딴판이다. 영효는 지난 2년 동안 주말을 이용해 시내 요양병원과 인근 농촌 지역의 보건소 등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어르신들의 말벗이 돼드리거나 물리치료 등을 돕고 있다. 하루 한두 시간에 불과한 맛보기식의 봉사활동이지만, 이 역시 학종으로 의대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스펙' 중의 하나다.

정빈이는 생뚱맞게 지역의 동물보호소로 봉사활동을 나갔다. 강아지를 워낙 좋아해 집에서도 두 마리를 키우고 있다는데, 길에 버려지는 유기 동물을 여러 차례 본 후 자발적으로 수소문해서 일을 시작했다. 목욕도 시키고, 사료도 주고, 함께 산책도 하면서, 봉사활동이 아닌 '휴가'를 즐기고 있다고 말한다. 대학입시가 코앞이라 요즘엔 자주 못 가지만, 수능이 끝나면 거기서 살다시피 할 거라고 했다.

지금까지 학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영효와 정빈이 둘의 비교과 영역 활동을 개괄했다. 비중 있는 '스펙' 중에 빠진 게 있다면 교과세부능력특기사항과 종합의견, 그리고 독서활동상황 정도다. 그거야 학년 말 교과 담당 교사와 담임교사가 다들 풍성하고 화려하게 수놓을 테니 논외로 하자. 더욱이 그것들은 다른 항목과는 달리, 다분히 작성자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영역 아닌가.

자, 그렇다면 이 둘 중 단 한 명만 의대에 진학할 수 있다고 할 때 누가 최종 합격하게 될까. 아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가 해당 대학의 입학사정관이라면 둘 중 누구를 뽑게 될 것 같은가. 실은 물어보나 마나다. 단언컨대, 정빈이를 선택할 대학은 단 한 곳도 없다. 영효에 견줘, 그에게는 의사를 향한 그의 꿈과 재능을 입증할 '내러티브'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공교롭게도, 영효의 아빠는 의사다. 어릴 적부터 의사 외엔 다른 꿈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도 아빠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백 보 양보해서, 내신이나 모의고사 같은 점수야 본인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라 쳐도, 그의 수상경력과 동아리활동, 봉사활동 등은 온전히 그의 몫이라 보기 어렵다. 부모의 조력에 더해 학교의 물심양면 지원이 보태진 결과라고 보는 게 옳을 성싶다.

자사고나 특목고로부터 비롯된 학종의 '성공 사례'

우선, 의대 진학을 위한 최적의 학생부를 만들기 위해 학교가 발 벗고 나선 흔적이 역력하다. 화려한 수상경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학종 '맞춤형' 동아리활동과 봉사활동이 단연 눈에 띈다. 아무리 학종이 대세라지만, 영효의 경우처럼 자신이 선택한 진로와 비교과 영역 전반이 한 편의 잘 짜인 각본처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경우는 아직 드물다.

이는 자사고나 특목고로부터 비롯된 학종의 '성공 사례'들로, 일반계 고등학교에 이식되면서 이젠 정형화된 교육과정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특히 영효처럼 최상위권의 아이들에게는 아예 대학별, 학과별 전담 교사가 배정되어 '스펙'을 관리해주는 학교도 많다. 말하자면, 의대에 진학하려면 정빈이는 애초 축구 동아리에 가입할 수 없는 것이다. 학생부 관리에 불리한 탓이다.

학종을 위해서는 봉사활동 하는 것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자신의 진로와 '내러티브'로 연결시키기 어려운 거라면, 자칫 낭패가 될 수 있다. 아이들도 학종에 보탬이 안 되는 봉사활동은 서슴없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지경이다. 예컨대, 의대에 가려면 병원이 봉사활동 장소로 제격이고, 사회복지를 전공하려면 장애인복지관, 문헌정보학과를 지망한 경우라면 도서관이 학생부 쓰기가 여러모로 유리하다. 학교가 사전에 개입을 하고, 중간에서 알선을 하는 이유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학종형 인간'이 바로 영효다. 물론, 그를 흠잡을 하등의 이유는 없고, 의대에 진학할 자격 또한 충분하다. 주어진 꿈을 향해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교육부가 만든 입시제도와 대학이 요구하는 수많은 조건들을 빈틈없이 챙겨왔다. 부모의 남다른 조력과 학교의 전폭적인 지원은 더없는 '행운'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그를 부러워할지언정 나무랄 순 없다는 이야기다.

"학벌구조 온존하고 사회 변하지 않는 한 백년하청"

아쉬운 게 있다면 정빈이의 경우다. 그를 두둔하거나 치켜세우려는 건 아니다. 그가 영효보다 의사로서의 자질과 재능이 더 있다고 확언할 순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학종이라면 그는 결코 영효에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단짝일지언정 같은 대학에서 만나자는 그들의 바람은 이루어지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학종에서는 영효와 정빈이는 엄연히 '체급'이 다른 친구다.

요컨대,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며, 정량평가를 지양하고 정성평가를 지향하는 학종이, 현재로선 공교육을 변화시킬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라 여전히 믿고 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안착하기는커녕 갖가지 부작용들만 생겨나고 있어, 갈 길이 아직 까마득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동료교사들은 "학벌구조가 온존하고, 승자독식의 사회가 변하지 않는 한 백년하청일 것"이라며 이구동성 말했다.

일주일에 딱 한 번뿐인 체육시간을 기다리며 오늘도 싱글벙글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수험생 정빈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본다. 모르긴 해도, 그 시간 영효는 경시대회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다. 그런 영효의 학교생활은 과연 정빈이보다 행복할까. 오로지 하나의 꿈을 위해 앞만 보고 거침없이 달려온 그에게 꽃다워야 할 10대의 삶이 얼마나 버거웠을까 싶다.


태그:#학생부 종합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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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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