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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철교
▲ 압록강 철교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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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7월 19일 오후 7시 26분]

사드배치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한민구 국방장관은 8일 국회를 찾아 "북한의 핵과 탄도미사일 위협으로부터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고 한미동맹의 군사력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 조치로 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를 주한미군에 배치하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대륙의 지각변동을 감지하지 못하면 환란을 겪었습니다.

1636년 12월 1일. 심양을 출발한 청나라 군사 12만 명이 압록강변에 포진했습니다.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쳐들어갈 것이다'라고 위협을 가하며 조선의 동태를 살폈습니다.  그들도 잘 압니다. 병서(兵書)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을...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는 말입니다. 그보다 고수가 부전이승(不戰而勝)입니다. 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말입니다.

청나라는 부전이승을 노리고 단둥에서 머뭇거렸습니다. 헌데, 서북 방면군 사령관 도원수 김자점은 '청나라 군사가 출동했다는 소식이 도성에 알려지면 괜히 소란스러워진다'고 정방산성에서 봉화를 차단해버립니다.

조선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자 청나라군이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의주를 지키던 임경업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백마산성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선두를 보내고 후미를 공략하겠다는 복안이었지만 그들은 청나라 군대를 공격할 엄두를 못 내고 성안에 바짝 엎드려 있었습니다.

청나라 군사는 질풍노도와 같이 정주-평양-개성으로 치고 내려왔습니다. 청군이 개성을 지나간 연후에야 '청나라 군사가 개성을 통과했다'는 개성유수의 장계가 올라옵니다. 그 만큼 전선 소식이 깜깜이였습니다.

양천리 표지석
▲ 양천리 표지석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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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군대가 양철리(녹번리)에 도착했을 때 인조 임금이 부랴부랴 궁을 나섭니다. 지난 난리(정묘호란)에 몸을 지켜 주었던 강화도로 가기 위해 숭례문에 도착했을 때, 강화 가는 길이 끊겼다는 보고가 올라옵니다. 정묘호란 때 임금을 놓쳐버린 청나라는 지난번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특공대가 행주에서 강을 건너 김포에 진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구문(광희문)을 빠져나온 인조는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때 산성에는 50일분의 식량과 13000명의 군사가 있었습니다.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여덟 아들을 데리고 나가 목숨을 바치겠다'고 큰소리 뻥뻥 치던 윤황은 아들 윤선거와 부인은 강화도로 보내고 자신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갑니다.

강화에 들어간 윤선거는 김익환, 김상용 등과 함께 청나라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순절하기로 한 약속을 깨고 모친과 강화도를 빠져나옵니다. 그의 명분은 '아버지가 있는 남한산성에 들어가 아버지와 같이 죽겠다'라는 것이었는데 그는 남한산성에 들어가지 않고 충청도 금산으로 숨어들었습니다.

동지섣달 살을 에는 밤이 지나고 해가 떠오르면 밤사이 보초 서던 군사가 앉은 그대로 얼어 죽어 있었습니다. 먹을 식량이 없어 군사들이 말을 잡아먹고 임금도 끼니를 건너뛰어야 했습니다.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나라 군사는 왕을 구원하기 위하여 각처에서 출동한 근왕병을 차단하며 인조를 압박했습니다. 그 때 산성에서는 청나라의 요구를 들어주자는 '주화파'와 어버이 나라 명나라를 배신할 수 없다는 '척화파'가 격하게 대립했습니다. 주화파는 오랑캐라 멸시하는 청나라의 실체를 인정하자는 주장이었고, 척화파는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내세웠습니다.

남한산성 서문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항복하기 위해 나섰던 문이다
▲ 남한산성 서문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항복하기 위해 나섰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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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파와 주화파의 갑론을박에 임금의 귀는 주화파에 솔깃했습니다. 인조가 주화파의 손을 들어준 결정적인 계기는 주화파와 청나라 진영 간에 벌어진 강화협상에서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준다는 밀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조가 서문을 나와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에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절할 때마다 세 번 이마를 찧는 삼배구고두를 행하고 항복했습니다.

목숨을 구걸한 인조는 창경궁으로 들어갔고 산성에서 저항하던 군사들은 두 손이 묶인 채 심양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것뿐만이 아닙니다. 청나라 군사는 보이는 대로 약탈했고 여염집 부인까지 끌어갔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습니다만 대략 70~80만 명이 끌려갔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심양으로 끌려간 부녀자가 탈출하여 1700리 머나먼 길을 산넘고 물건너 죽을힘을 다해 조국으로 돌아오면 '환향녀'라고 내쳤습니다. '몸을 더럽혔다' 고 '환향년'이라 멸시했습니다. 지들이 힘이 없어 지켜주지 못한 여자들이 곤욕을 치렀는데 감싸주기는커녕 여자들을 내쳤습니다. 이것이 조선 사대부들이었습니다.

항복하기 이틀 전, 행궁에서 어전회의가 열렸습니다.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영의정 김류가 홍서봉, 이홍주와 입시하여 "홍익한 한사람만 내주면 적이 화친을 허하지 않을 것이니 예조판서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 전 대사간 윤황의 아들 윤문거, 오달제, 윤집, 김수익, 김익희, 정뇌경, 이행우, 홍탁 등 열 명을 적진에 보내자"라고 제안합니다.

'청나라 사신이 한양에 들어오면 목을 베어 명나라에 보내자'고 주장했던 홍익한은 극렬한 반청분자로 낙인찍혀 청나라에서 압송을 요구한 인물이지만 그 밖의 인물은 청나라에서 요구하지 않았는데 헌상하자는 것입니다. 결국 윤집, 오달제로 낙찰됩니다. 전쟁에 책임을 지고 적진으로 잡혀갈 사람들은 다 빠지고 제일 어린 사람들만 뽑아서 희생시킵니다. 이 때 윤집 31살, 오달제 28살이었습니다.

전쟁은 참혹합니다. 전쟁이 나면 희생되는 것은 부녀자와 아이들입니다. 66년 전 6월 25일. 38선이 터졌습니다. 탱크를 앞세우고 물밀 듯이 내려오는 북한군의 위세에 국민들이 불안해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걱정하지 말라. 정부가 국민을 지켜줄 것이다.' 라는 녹음을 하고 본인은 한강을 건너 서울을 빠져 나갔습니다. 그 후, 한강 다리는 국군 공병대에 의해 폭파되었고 정부를 믿었던 서울 시민들은 서울에 갇혀 고난을 겪었습니다.

서초동 외교안보연구원에는 흉상이 하나 있습니다. 서희입니다. 993년, 요(거란)나라가 80만의 군사를 일으켜 고려로 쳐들어 왔습니다. 송나라와 관계를 끊고 거란을 섬기라는 요구였습니다. 송과 손을 잡고 있는 고려를 자신들의 편으로 돌려 놔야 송과의 전면전에서 배후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이 그 중간을 점거하고 있어 육로로 가는 것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왕래하기가 더 곤란하다. 그러니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탓이다.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의 옛 땅을 회복하여 길을 통하게 한다면 어찌 국교가 통하지 않겠는가?"

서희의 말에 거란군은 철군했고 고려는 압록강 동쪽 280여 리의 영토를 받았습니다(강동6주). 싸우지 않고 거란의 대군을 돌려보내고 영토까지 얻었습니다. 이것이 외교의 힘입니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대륙의 지각변동에 촉각을 세우지 않으면 생존에 위협을 느낍니다. 원-명 교체기. 만주는 무주공산이었습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정도전이 '요동정벌론'을 선제적으로 흘려 명나라의 압박을 벗어났습니다. 명-청 교체기에도 국제감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면 병자호란은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2016년. 지금 우리는 선택지를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사드입니다. 서희같은 출중한 인물이 그리워지는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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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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