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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3일 개봉한 영화 <서프러제트> 공식 포스터.

영화 <서프러제트> 공식 포스터. ⓒ 필름4, BFI, 인지니어스 미디어, 카날+


세탁공장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일하는 엄마에게 업혀 자란 모드 와츠. 모드의 엄마는 세탁공장에서 일하다 4살 때 죽었고, 아빠는 누군지도 모른 채 살았다. 세탁 공장 사장 테일러에 의해 14살부터 세탁공장에서 일을 시작한 그녀는 24살이 되기까지 고된 세탁일을 하며 한 남자의 아내로, 웃음 많고 사랑스러운 아들 소니의 엄마로 살아왔다.

20세기 초, 영국은 최저수준의 여성인권을 보유하였다. 그로 인해 여성들은 가정에서, 사회에서 마땅히 대우받아야 할 한 인간의 권리를 박탈당했다. 여성의 역할은 많았지만, 여성의 지위는 없었다. 남성에게 거의 종속된 상태였다.

서로에게 진심 어린 충고인 듯 "네 마누라 간수 좀 잘해라" 말하는 그 당시 남성들에게는 아내의 삶을 자신이 이미 규정해 놓았다는 결정론적 심리가 있었다. 여성들도 어떤 사회적 의견에 대해 제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상태로 오랜 시간 살다 보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자기 물음을 할 생각조차 못 하고 살았다.

서프러제트의 등장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서프러제트 단원이 연행 당하는 장면.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서프러제트 단원이 연행 당하는 장면. ⓒ UPI코리아


그 와중에 여성의 인권을 상승시키기 위해 나선 전설의 그분, '팽크 허스트'를 믿고 따르는 여성동맹의 무리가 등장한다. 그들이 바로 서프러제트. 모드와 같은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바이올렛은 여성투표권 쟁취를 위한 선거법 개정을 주장하며 시위대에 가담해 거리에서 돌을 던지고 유리창을 깬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변화 없이 무차별 폭력을 가한다면 변화를 원하는 이들도 행동으로 똑같이 맞서야 한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었다.

"행동 없는 말로는 투표권을 쟁취할 수 없어."
"지금의 이런 삶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유리창을 깨고 부수는 일이 법을 위반하는 행위라고만 여겼던 모드에게 바이올렛과 함께 여성투표권을 부르짖으며 행동으로 나서던 그녀들은 말한다.

"법도 지킬 가치가 있어야 법이지."

행동으로 법을 어기는 자가 아니라 법을 만드는 자가 되어야 한다며 말이다.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엄청난 에너지로 개혁을 촉구하는 행동을 하는 여성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누구에게나 와 닿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건 변화를 원치 않는 권력가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모드와츠의 남편은 그녀가 두 번째로 감옥에 다녀온 날, 짐을 챙겨 던져 주고 그녀를 집에서 내쫓았다.

양육은 엄마의 몫, 하지만...

 영화 <서프러제트> 속 한 장면. 양육은 엄마의 몫이다.

남편은 아이 양육을 아내에게 떠넘기지만, 아내의 동의 없이 아이를 입양 보내기로 결정한다. ⓒ UPI코리아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는 일조차 쉽지 않았던 그녀가 아들 생일에 찾아왔을 때, 문을 열고 자신의 아내를 보자마자 당황하던 낯빛의 남편의 뒤를 쫓는 일은 실로 엄청난 괴로움이었다. 더는 자신 혼자 아이를 키울 수 없다며 아이 생일날 입양을 보내려고 계획해 두었던 남편의 행동에 대한 결과는 충격 이상의 분노였다. 아이의 선택도 엄마의 선택도 무시한 채 혼자 입양을 결정하고 행동에 나선 남편의 행동은 그 시대 대부분의 남성을 포괄하여 대변하는 도구였다.

선택의 결정권을 쥐고 흔들며 상대를 종속시키려는 그 저질스런 의지의 밑바닥에 켜켜이 쌓여있는 세속적인 성적 우월감. 주인공을 점점 더 곤경에 빠트리려는 영화의 작위적인 전개는 차치하더라도, 어린아이와 엄마와의 관계를 무책임한 결정권으로 끊어내려 한 남편은 비난받아 마땅했다.

"당신은 내 아내야. 그게 당신의 삶이야."

한 사람의 인생을 '아내'라는 의미로 규정지으려 했다.

"우리가 아들이 아닌 딸을 낳았다면 그 애는 어떻게 살았을까?"
"어떻게 살긴. 당신처럼 살았겠지."


남편은 사랑스러운 딸이 태어난다고 해도 아이의 인생에 벌어질 아름답고 다양한 일들엔 관심이 없다. 다짐하는 듯 모드와츠의 눈빛은 그랬다. 누구의 딸이든 여자로 태어나서 살아야 하는 그 운명을 마주할 때,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온갖 것들을 넘나들며 살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어떤 일도 불사하겠다는 그녀의 의지는 아내로, 엄마로 살던 때의 눈빛이 아니었다. 한 사람으로서 살고자 했다.

가정에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경제활동까지 죽을힘을 다해 해내야만 했던 그때의 고된 여성들에게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희망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투표권이었다. 여전히 그때와 동시대인 것처럼 자본의 힘은 자유와 선택을 압박하고 있지만, 희망을 놓을 수 없는 건 또 역시 마찬가지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순지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blog.naver.com/rnjstnswl3)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서프러제트 여성참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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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문화, 다양한 사회현상에 관해 공부하고 씁니다.

오마이뉴스 스타팀에서 방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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