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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모음이 윤정기 편집자를 발령 보낸 사무실 사진
 자음과모음이 윤정기 편집자를 발령 보낸 사무실 사진
ⓒ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 출판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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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자음과모음'이 윤정기 편집자를 쓰레기장과 같은 사무실로 발령한 일과 출판계에서 그동안 일어났던 유사한 일들을 소개하는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고 망설인 건, 내가 이미 떠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떠난 사람은 말할 수 없다는 의견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떠난 내가 과연 현재적인 이야기들을 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또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이미 떠난 사람이라서 쉽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있을 테다.

이 좁디좁은 한국사회, 더 좁은 출판계에서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다음 취직자리 걱정을 안 할 수 없는데, 나는 그런 면에선 자유롭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떠난 사람이니만큼, 살아남은 자들, 남아서 싸우는 자들에게 조그만 보탬이라도 되고 싶은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쓰레기장과 창고 사이

자음과모음이 윤정기 편집자를 발령 보낸 사무실 사진에 많은 사람이 격분했다. 도저히 사무실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그곳의 풍경은, 출판노조의 말마따나 "윤정기에게 모욕을 주려는 의도" 말고는 다른 이유를 생각하기 어렵다. 사진들을 보면서 나 또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격정적으로 분노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어이없는 사진은 처음 보지만, 이보다 덜할 것 없는 일들을 출판노동자들은 겪어 오질 않았던가.'

노조가 만들어진 뒤 노사갈등을 심하게 겪은 어느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는 최근 경영난을 이유로 희망퇴직자를 모집한 뒤, 남은 직원들을 데리고 파주 출판단지에서도 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물류창고로 사무실을 옮겼다.

경의선 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도 없는 길을 10분 넘게 걸어가야 한다는 그 물류창고 사무실은 서늘한 공기와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여 있다고 한다. 도화동의 쓰레기장 사무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일 순 있겠지만, 그 창고 역시 책 만드는 노동을 하기에 적당한 공간은 아니다.

자음과모음보다 더 세련된 방식이었을 뿐, 또 다른 윤정기들이 회사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저항하고, 저항하다 무너지고 있다.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 시대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책에 보인 관심의 반의 반만이라도 그 책이 만들어지는 노동환경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널리 알려졌을 이야기들이 두꺼운 책들 밑에 무수히 깔려있다.

쓰레기장과 창고 사이 어디쯤 놓인 출판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아주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란 말이다.

책동네의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

쓰레기장과 창고 사이 어디쯤 놓인 출판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아주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다.
 쓰레기장과 창고 사이 어디쯤 놓인 출판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아주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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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계는 특별함과 진부함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내가 만난 출판노동자들은 대체로 책 만드는 일을 사랑했고, 그 일에 열정적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고, 좋은 책을 내서 세상을 좋게 만들 수 있다고 여겼다. 인류가 쌓아온 지식과 지혜가 모두 책에 담겨 있고 책을 매개로 저자와 독자를 이어주는 일이라니, 게다가 박봉에 격무까지 감내해 가며 그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세상에 헌신하는 사회운동가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출판계에서 나와 내 동료들이 겪은 일들은 한편으로는 진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리해고, 구조조정, 성폭력, 독재적인 경영자, 부당해고, 부당징계, 반성문 강요, 일터 괴롭힘. 신문 사회면에서 볼 수 있는 일들, 아니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 책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일들이 그 책을 낸 출판사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한때 베스트셀러 출판사로 유명했던 쌤앤파커스에서는 인사권을 가진 간부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인턴 직원을 성추행했다. 소란출판사가 직원과 외주자들에게 지급하지 않고 있는 임금은 지난 1월 기준 2300만 원에 이른다. 수당 없는 야근은 출판업계의 상징처럼 되어 있고, 민음사 같은 대형출판사조차도 제대로 된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고 오랜 세월을 보냈다.

이러한 부당한 현실에 저항하려는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했는데, 다른 업계와 마찬가지로 노사갈등이 심각하게 일어나기도 했다. 몇몇 회사의 경영진은 매우 열정적으로 노동조합을 혐오했다.

내가 다닌 회사 대표는 평소 회사에 비판적이었던 직원의 말을 꼬투리 잡아 징계위원회를 열었다. 노조의 반대로 징계가 여의치 않자 대기발령을 내린 뒤 컴퓨터를 못 쓰게 하고, 오로지 회사 책만 읽고 독후감을 써내고 반성문을 써내라고 했다. 그 직원은 컴퓨터가 없으니 손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앞서 언급한 최근 파주 외진 곳으로 이사한 출판사는 노조가 만들어진 뒤 출퇴근 체크기를 도입하고 지각에 대해서 급여를 삭감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런 사례를 들자면 정말 한도 끝도 없다. 안 좋은 이야기만 쭉 늘어놨는데, 그렇다고 출판업계가 다른 업계보다 노동권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회 비판적인 책을 내고, 재벌기업 비판하며 노동운동을 옹호하는 책을 낸다고 해서 다른 업계보다 더 훌륭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책 동네의 조금 특별한 이야기

앞서도 말했지만 출판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높다. 페미니즘, 맑시즘, 파시즘... 인간이 만든 모든 매혹적인 생각과 위험한 생각들을 다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책이니, 그 매력적인 책을 만든다는 자부심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내가 겪은 바로는 특히 출판사 경영진들이 그러한 자부심이 대단한데, 스스로를 상품을 파는 장사꾼으로 여기기보다는 출판을 사회 운동으로 생각하며 스스로를 책을 통해 사회 변화에 기여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측면이 강하다.

좀 더 면밀한 조사나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실제로도 많은 출판사 사장들이 교양 있고 양식 있는 시민으로 한국 사회 제반 문제들을 바라보고, 개입하고, 비판한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실제 사회운동에 헌신한 사람이기도 하고, 노동조합을 후원하려고 출판사를 만든 이들도 있다. 출판사를 만들어 사회 비판적인 책들을 펴내면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에 기여한 면도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출판노동자들이 겪는, 다른 업계와는 구별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름 진보적인 개인이 경영진으로 있고, 회사가 추구하는 방향도 진보에 가까운데, 회사에서 겪게 되는 노동 현실은 진보적이기는커녕 진부하기 이를 데 없다. 촛불집회나 노동절 집회에 갔다가 집회 참여 중인 회사 경영진을 만나고, 회사로 돌아와선 그 경영진들에게 징계나 부당해고를 당하는 노동자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출판계다.

진보인사로 이름난 내 첫 직장 대표이사는 비정규직 직원을 해고하려 할 때 노조가 반발하자, "비정규직은 나쁜 제도입니다. 우리 회사 철학과 맞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정규직으로 계약을 연장할 수 없습니다"라며 해고를 정당화하려 했다.

우리 사회의 온갖 소수자 문제를 다룬 책을 내는 출판사의 사장은 어느 직원에게 "나는 학벌 지상주의자들인 다른 사장과 다르다, 지방대 나온 너를 이렇게 뽑지 않았느냐"면서 "지방대 나온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더 노력하라"고 했다고 한다.

가장 왼쪽에 있는 이야기들을 책으로 만들면서, 전혀 왼쪽이지 않은 대우를 받는 이들이 바로 출판노동자들이다.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한다. "<전태일 평전>을 만들려고 야근 수당 없이 근로기준법 어겨가며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나는 거기에다 한마디 더 보탠다.

"모든 출판사 사장들이 전태일이나 김진숙을 저자로 모시기를 바라지만,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전태일이나 김진숙이 자기 회사 노동자로 들어오는 것은 굉장히 싫어할 거다."

특별하거나 말거나, 보편적인 권리

사람들이 책에 보인 관심의 반의반만이라도 그 책이 만들어지는 노동환경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널리 알려졌을 이야기들이 두꺼운 책들 밑에 무수히 깔려있다. (사진에 나온 책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사람들이 책에 보인 관심의 반의반만이라도 그 책이 만들어지는 노동환경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널리 알려졌을 이야기들이 두꺼운 책들 밑에 무수히 깔려있다. (사진에 나온 책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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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떤 노동운동가가 술에 잔뜩 취한 채 "출판노동자들은 고공농성을 하는 사람도, 해고에 맞서 몇 년째 싸우고 있는 사람도 없지 않으냐"며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그 말을 두 가지로 이해했는데, 하나는 출판노동자들은 별로 열심히 싸우지 않는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출판노동자들은 힘든 싸움을 감내할 만큼 열악한 처지가 아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노동조합의 역사가 길지 않은 만큼 투쟁의 역사가 길지 않고 투쟁 역량도 보잘것없다는 진단에는 나도 반박할 마음이 없다. 하지만 출판노동자들의 처지가 다른 곳보다 열악하지 않다는 데에서는 나도 모르게 발끈했다. 누가 더 열악한지를 경쟁해야 하는 사회가 가장 폭력적인 사회라는 인식은 접어두더라도, 출판노동자들이 겪는 일상과 모욕이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치부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업계의 특성상 하루아침에 수천 명이 문자로 정리해고 당하지 않을 뿐이지, 매 순간 아주 조용히 소리 소문 없이 많은 출판노동자들이 해고를 당하거나 해고나 다름없는 사표를 내던지고 일터에서 쫓겨난다. 조용하다고, 가시적이지 않다고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좀 더 점잖게 출판노동자들에게 충고하는 분들도 있다. 출판계는 문화를 다루는 곳이고, 또 열악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노사관계와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한다. 나도 그 말에는 일면 동의한다. 잘나가는 출판사라고 해봤자 연 매출 몇 백 억 수준이니, 다른 업계와 비교하자면 구멍가게 수준이다. 게다가 대기업과 다르게, 출판노동자들은 대부분 회사에서 사장을 일상적으로 마주하며 지내야 한다. 복잡한 인간관계와 감정이 얽히고설킨 만큼 노사의 갈등이 감정싸움으로 번지게 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이 설득력 있으려거든 출판사 사장들에게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영난에 정리해고라는 아주 진부한 접근 말고, 경영상의 어려움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노사가 함께 어려움을 타개할 방안을 모색하고 함께 책임지자고 해야 한다. 어느 출판노동자가 마다하랴.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못 봤다. 노동자들이 함께 책임지겠다며 월급을 자발적으로 삭감할 테니 동료를 해고하지 말라고 제안하는 것은 봤어도, 그 제안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본 적은 거의 없다.

출판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들 가운데 많은 부분은 개별적인 출판사 안의 노사관계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종이 매체의 쇠락, 정부의 출판 정책, 점점 축소되는 출판 시장 규모와 같은 문제들을 출판사 사장에게 해결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무수히 많고 많은 다양한 업종들의 특수성들의 위에 있는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근로계약서를 쓰고, 성희롱이나 성폭행을 당하지 않고, 부당한 징계나 해고를 당하지 않을 권리를 말하는 것이다. 회사가 어려울 때면 왜 어려운지 함께 살펴보고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하고 함께 노력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쓰레기장과도 같은 사무실로 윤정기 편집자를 발령냈던 자음과모음은 저자들과 독자들, 출판노동자들의 비판이 거세지자 대표 명의로 사과문을 발표했다고 한다. 언론노조 서울경기 출판지부가 성명서에서도 밝히고 있는바, 이 사과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여전히 모호하고 애매한 사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출판노동자들이 겪는 일들은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문제들이 실질적으로 변화를 가져오기까지 아주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윤정기와 더 많은 윤정기들의, 출판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출판노조 서울경기지역분회 이승한 분회장의 도움을 받고, <출판, 노동, 목소리> (출판노동자 11인 지음, 숨쉬는 책공장, 2015년 7월)를 참고해서 썼습니다.



태그:#자음과모음, #출판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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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를 하면서 평화를 알게 되고, 평화주의자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출판노동자를 거쳐 다시 평화운동 단체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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