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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엔 영화 <서프러제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최근 개봉한 <서프러제트>는 영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여성 참정권 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정치적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들이 투표권을 얻기 위해 얼마나 지난한 투쟁을 했는지 보여준다.
 최근 개봉한 <서프러제트>는 영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여성 참정권 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정치적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들이 투표권을 얻기 위해 얼마나 지난한 투쟁을 했는지 보여준다.
ⓒ UPI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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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한 <서프러제트>는 영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여성 참정권 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정치적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들이 투표권을 얻기 위해 얼마나 지난한 투쟁을 했는지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바 있던 여성운동의 한 장면이다.

경고, 극 중 사건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 김혜리 <씨네21> 기자


그러나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교과서 속 과거인 반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생생한 현실이다. 단지 상점과 관료의 저택을 파괴하는 물리적 폭력이 없을 뿐이지, 여성들은 계속 투쟁하고 있다. 당신과 내가 보았던 강남역에서의 추모현장에서 말이다.

이것은 가까운 현실의 문제이다. 20대의 여성이 강남역의 한 노래방 화장실에서 생면부지의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 문제가 아니었다. 여성에게 한국사회가 얼마나 안전하지 않은지, 더 나아가 남성이 여성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명백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것이 자신의 문제임을 직감한 여성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남역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드의 증언처럼, 봇물 터지듯 나온 여성의 자기 서사

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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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추모 집회가 시작이었다. 페이스북 페이지 '강남역 10번 출구'를 필두로 하여 많은 이들이 물리적 공간인 10번 출구로 쏟아져 나왔고, 자유발언을 했다.

실제로 나는 10번 출구 추모 집회에 세 번 갔는데,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처음에 모인 사람들이 자유발언을 하고 있을 때 '이게 뭔가'하고 몰려온 이들이 즉흥적으로 자기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겪어왔던 부당한 일들에 대한 발화가 이어졌다.

<서프러제트>의 주인공인 모드와 많이 겹치는 대목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투표권을 주장하기 위한 증언대에 서게 되었지만, 대신 읽기로 되어 있던 글을 읽지 않고 자기의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고 있으며, 독박육아를 하고 있고... 등등. 세탁공장 여성 노동자로서의 자기서사를 준비하지도 않았는데 술술 꺼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여성들의 현실에 무지했던 기득권 남성을 술렁이게 했다.

실제로 강남역에서 즉흥적으로 자유발언을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결코 준비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늘 겪어오던 서사였다. 그리고 그 발언들은 여성 당사자가 아닌 나같은 남성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영화에서 여성 투표권을 위한 총리 관저 집회에 처음 참가한 모드는 총리가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을 거부했다는 관료의 말에 "거짓말쟁이! (Liar!!)"라고 외친다. 그러나 이는 분명하게 터져나온 분노가 아니라 자기 주변의 여성들이 분노하며 내뱉은 말이 얼떨결에 모드의 입에 맴돈 수준이다.

하지만 그 시점쯤부터 모드는 이 상황이 굉장히 부조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강남역에서의 자유발언이 분노를 숨겨왔던 여성들의 자기서사를 밖으로 꺼내는 역할을 했던 것처럼.

투쟁은 계속된다, 목소리를 들어라

경찰이 강남역 살인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규정한 것에 대해 분노한 20대 여성들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서초경찰서 앞에서 '여성혐오가 죽였다!'라는 내용으로 항의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경찰이 강남역 살인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규정한 것에 대해 분노한 20대 여성들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서초경찰서 앞에서 '여성혐오가 죽였다!'라는 내용으로 항의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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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에서의 추모집회가 종료된 이후에도 여성들은 계속 싸웠다. 젠더폭력에 관련한 집담회를 열었으며, 안전한 밤길을 보장하라며 수차례의 도보행진을 열었다. 또한 포르노적으로 성폭행 사건을 소비한 언론사에 항의해 사과를 받아냈다. 이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 이후 여성들의 움직임은 서프러제트와 닮았으면 닮았지 결코 다르지 않다. 하지만 서프러제트 운동을 했던 당시에도 그랬듯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남성들은 이 움직임에 불편해했다. 이해를 하지 못했다. 실제로 이 영화와 관련한 리뷰를 찾아보는 과정에서 이런 볼멘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이 저 때처럼 투쟁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냐', '참정권을 보장받지 못한 저 때랑 지금이랑 같냐'.

이 불편함의 목소리에 대한 반박은 단순하지 않는가. 지금은 참정권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안전한 거리, 남성과 동등한 여타 권리를 위한 투쟁이다.

유리를 깨거나 폭탄을 터뜨리는 식의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인신공격을 하는 것을 보면 분명 지금도 투쟁의 순간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들어야 한다, 그들이 여태 이 땅에 살아가면서 겪었던 비참한 일들을. 그리고 연대해야 한다. 남성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반성해야 하며, 여성들의 투쟁에 동참하여 아직도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비난만 일삼는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태그:##서프러제트, ##여성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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