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히어로들의 전투가 국내 영화관에서 모두 막을 내렸다. 이들은 3월 24일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아래 <배트맨 대 슈퍼맨>), 4월 27일 <캡틴아메리카 : 시빌 워>(아래 <시빌 워>, 5월 25일 <엑스맨 : 아포칼립스>(아래 <아포칼립스>)까지 한 달 간격으로 전투를 벌였다.

극장에서는 세 편을 한 번에 볼 수 없지만, 이제 여러 매체를 통해 볼 수 있다. 이들 세 편을 가능하면 연이어 보기를 추천한다.

<배트맨 대 슈퍼맨> <시빌 워> <아포칼립스>는 소재와 이야기 구성 요소가 비슷하다. 비판적인 여론, 내분, 봉합이 줄거리를 이룬다. 그래서 세 영화는 기존 슈퍼히어로물와 다른 길을 걷는다. 슈퍼빌런의 악행보다 슈퍼히어로의 선행에 갈등 원인을 맞춘다. '시민'이라는 존재를 그저 화면만 채우는 배경이 아닌 슈퍼히어로 간의 갈등의 원인으로 바꿨다. 슈퍼히어로의 추종자에서 피해자로 시민의 역할이 바뀐 것이다. 슈퍼히어로는 정체성을 혼자 고민하는 대신 비판의 목소리에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그리고 대응 방법에 따라 편이 갈린다.

이런 변화는 슈퍼히어로를 초인에서 실체가 있는 영웅으로 바꿔 놓는다. 우리는 세 편의 슈퍼히어로물을 통해 현실세계의 영웅들 혹은 우리의 태도를 돌아볼 수 있다.

[시민의 자각] 고생은 슈퍼히어로, 희생은 시민의 몫

 기존 슈퍼히어로의 추종자였던 극중 시민들은 세 편을 통해 피해자로 바뀌었다.

기존 슈퍼히어로의 추종자였던 극중 시민들은 세 편을 통해 피해자로 바뀌었다. ⓒ 워너브라더스


슈퍼히어로가 비판여론에 직면하는 서사구조는 대개 틀을 갖추고 있다. 슈퍼히어로가 어떤 문제 때문에 (실제로는 오해라 해도) 악한 짓을 저지르고, 시민들은 이들에 등을 돌리고, 슈퍼히어로는 슈퍼빌런과 싸우며 문제를 극복하고 여론을 되돌린다. <슈퍼맨3>(1983), <스파이더맨3>(2007), <다크나이트 라이즈>(2012), <엑스맨 : 최후의 전쟁>(2006)이 그렇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세 편의 슈퍼히어로들은 그 구조가 다르다. 슈퍼히어로가 이전 시리즈에서 슈퍼빌런과 싸우면서 발생했던 피해는, 시민들에게 비판을 받는 원인이 된다. 그러니 기존처럼 독립적인 에피소드가 아니라 전작에서 이어진다. 기존에는 설령 오해더라도 어찌되었든 슈퍼히어로의 악행이 원인이었다면, 이 영화들은 슈퍼히어로의 선행이 오히려 그들을 비판하는 원인이 된다.

시민이 자각한 것이다, 고생은 슈퍼히어로가 했지만 정작 희생은 자신들이 했다는 사실을. 시민이 깨달은 것이다, 전작에서 삶터, 재산, 가족, 목숨을 잃은 자들은 슈퍼히어로가 아닌 시민들이라는 걸. 희생당한 자는 정의를 위해 침묵하라는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슈퍼히어로들을 "가짜 신"이라 비판하고 "스스로 파멸하라"고 저주한다. 적어도 이를 부당하다거나 악의라고 제3자가 비난할 수는 없다. 그 피해가 슈퍼히어로에게는 부수적이겠지만, 피해 당사자에게는 전부니까.

시민의 자각은 곧 관계의 변화를 의미한다. 슈퍼히어로들은 시민들의 삶에 직접 영향을 준다. 시민들은 슈퍼히어로가 더 이상 무엇을 해도 마냥 좋다고 양해해줄 수 없다. 당연히 세계평화나 인류생존처럼 거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여력도 없다.

원래 시민들과 슈퍼히어로는 시청자와 미디어 스타의 관계였다. 극 안의 슈퍼히어로는 오로지 매스미디어 속에서만 존재했다. 시민들이 슈퍼히어로를 비난하는 것도 리얼리티쇼를 보다가 악역으로 편집된 출연자를 욕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시민들이 과거보다 더 능동적으로 변했고, 슈퍼히어로와 시민 사이의 관계도 더 밀접해졌다. 극중 시민의 태도 변화는 관객을 슈퍼히어로와 분리시킨다. 관객은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시민의 입장에서 영화 속 질문을 받는다.

[슈퍼히어로의 반응] 시민의 언어로 소통하다

 아포칼립스는 열등한 자들의 방식으로 소통하지 않는다. 그는 약자를 지배하기 위해 자신의 언어를 전할 뿐이다.

아포칼립스는 열등한 자들의 방식으로 소통하지 않는다. 그는 약자를 지배하기 위해 자신의 언어를 전할 뿐이다. ⓒ 이십세기폭스


극중 시민의 입장 변화는 슈퍼히어로를 미디어 밖으로 나오게 한다. 슈퍼히어로는 함부로 시민들이 틀렸다고 진단하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슈퍼히어로는 자신을 둘러싼 여론전에 직접 참여해 해법을 찾는다. 슈퍼맨은 청문회에 출석하고, 아이언맨은 슈퍼히어로 등록제를 주도하며, 캡틴아메리카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도망자가 되는가 하면, 프로페서X는 뮤턴트들을 시민과 함께 살 수 있도록 교육한다.

기존 슈퍼히어로는 이렇지 않았다. <핸콕>(2008) 정도가 이미지를 관리했다. 슈퍼히어로에게 여론전은 필요치 않았으니 당연하다. 슈퍼히어로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시민사회를 떠나겠다고 선언했어야 한다. 그러면 시민들은 슈퍼히어로에게 돌아와 달라고 석고대죄 할 것이다. 그동안 배트맨들의 깨진 배트 시그널은 언제나 그렇게 수리되지 않았던가. 바로 그때, 슈퍼히어로가 '짠' 등장해서 적을 무찌르면 시민들은 다시 환호한다. 슈퍼히어로의 명예는 그렇게 지켜지는 것이다. 그게 기존 슈퍼히어로와 시민들의 소통 방법이다.

이번 영화에서도 기존 슈퍼히어로 방식으로 대화하는 캐릭터가 있긴 하다. <아포칼립스>의 아포칼립스다. 그는 열등한 자들의 방식으로 귀찮게 우회하지 않는다. 자신의 방식으로 그저 전달할 뿐이다. 그래서 아포칼립스의 적 개념은 간단하다. 자신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대가 적이고, 찬양하면 같은 편이다. 아포칼립스가 뮤턴트와 일반인을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아포칼립스에게는 자신을 반대하면 뮤턴트도 적이다. 기존 <엑스맨> 시리즈의 매그니토와 다른 점이다. 매그니토는 뮤턴트를 지배하기 위해 뮤턴트와 싸우는 게 아니다.

아포칼립스의 메시지는 명쾌하다. 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 능력이 있고, 이런 나를 인정하면 내가 너희 능력에 조금 더 여유를 줄 테니 스톰처럼 좀도둑질을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매력적인가,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을 이용할 기회를 준다니, 나는 나보다 약한 자만 누르면 된다. 이 메시지에 매료된 약자들을 비난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극 밖의 관객에게만 아포칼립스의 본질이 보일 뿐이다. 아포칼립스는 '내가 옳다, 왜 옳으냐면 나니까'라는 사이비교주의 논리와 비슷하다.

그런데 슈퍼히어로도 아포칼립스 방식으로 비판 여론에 대응할 수 있었다. 슈퍼맨은 로이스와 퓰리처상이나 받다가 배트맨이 둠스데이에게 영혼까지 탈곡당할 때쯤 나타나면 됐다. 캡틴아메리카는 70여 년간 쌓인 퇴직금으로 기부재단을 설립해서 아이언맨보다 더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프로페서X는 목적을 위해서는 뮤턴트들을 버리고 UN사무총장이 되는 편이 더 빨랐다. 그러나 슈퍼히어로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소통 방식에서 아포칼립스와 슈퍼히어로의 차이는 영웅과 강자의 구별점이다. 영웅은 비효율적이더라도 약자의 소통 방법으로 약자와 소통한다. 강자는 효율적으로 약자를 지배하기 위해 자신의 언어로 소통한다.

[슈퍼히어로의 내분과 봉합] 결과를 인정하다

 아이언맨은 캡틴아메리카에게 방패의 자격을 물을 뿐 방패 때문이라고 탓하지 않는다.

아이언맨은 캡틴아메리카에게 방패의 자격을 물을 뿐 방패 때문이라고 탓하지 않는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미디어 밖으로 나온 슈퍼히어로들은 일사분란하지 않다. 중재자 닉 퓨리가 없는 어벤져스들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게 <시빌 워>다. 세 편의 영화는 자신만의 방법을 관철시키고자 한다. 캐릭터마다 다른 대응 방법은 편을 갈라 투쟁하게 한다. <배트맨 대 슈퍼맨>은 싸움, <시빌 워>는 분열, <아포칼립스>는 양육강식을 테마로 양자 대결을 표현한다. 그동안 '내분'이 <엑스맨> 시리즈만의 특징이었다면, 이번에는 세 편이 동시기에 등장했기에 전체 슈퍼히어로 영화의 변화로까지 해석해볼만 하다.

기존 슈퍼히어로의 분열은 문자 그대로 자기분열이었다. 슈퍼히어로는 타락하고 내적 갈등을 겪는다. 그리고 '영웅이 어떻게 문제를 극복할 것인가?', '스스로 문제를 극복한다', '문제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게 영웅이다'의 순으로 질문, 정답, 메시지를 이루는 게 정해진 방식이다.

그런데 양자 대결이라는 외형 변화는 슈퍼히어로물의 전통적인 질문과 답을 바꾼다. '누구 편을 들 것인가?', 관객에게 편을 묻는다. 그러니 영화들이 제시한 답은 페이크다. 이를테면 타이틀롤 격인 슈퍼히어로의 입장이 결과적으로 대변되는 형식이지만, 이것이 관객의 선택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질문과 답이 다르니 메시지도 기존과 다르다. 힘이 센 측이 양보하면서 갈등이 봉합되는 과정은 '대가 소를 위해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도출한다. 새삼스럽다기보다 이 메시지를 구축하는 방식이 기존 문법들과 다르다.

우선 승자의 논리부터 기존 문법과 다르다. 원래 승패는 정해져 있었고, 패자가 악당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승패가 바뀌어도 문제가 없고, 패자가 악당이라고 할 수도 없다. 역설적으로 '상대가 누구든지' 승리 자체가 중요해진다. 예컨대, <아포칼립스>의 프로페서X가 내린 마지막 결정은 전형적인 승자의 해명이다. 프로페서X는 그동안 피닉스를 봉인시키려고 노력을 해왔기에 더욱 그렇다. 승자가 되기 위해 슈퍼히어로들은 영입전까지 펼친다. <시빌 워>의 양측은 검증되지 않은 슈퍼히어로를 영입하고, <아포칼립스>의 엑스맨들은 전투 중에 적까지 설득한다.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 배트맨도, 슈퍼맨에게 시치미를 뗐지만, 원더우먼에게 연락한 것은 둠스데이의 출현을 예상한 게 아니다.

승자 논리가 강조되면서 양보의 주체도 바뀐다. 기존에 양보의 주체는 슈퍼히어로였다. 슈퍼히어로는 악당을 살려주는 식으로 그들을 용서했다. 당연히 악당이 양보하거나 용서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세 영화에서 양보의 주체는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승자다. 양보를 누가 할 수 있는가? 상대보다 강자여야 한다. 약자가 강자에게 양보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약자가 강자에게 양보했다고 주장하면 자위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번 영화들에서는 슈퍼히어로들의 전투 목적은 양보의 주체를 정하는데 있다.

패자를 묘사하는 방식도 기존과 다르다. 패자인 악당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을 용서하고 포용한 영웅을 향해 악당은 반드시 총칼을 겨눈다. 영웅은 어쩔 수 없이 악당을 처단한다. 혹은 살아남은 악당은 상황을 회피하고, 이번에는 양보했다는 식으로 자위한다.

그러나 이번 영화의 패자들은 악당이 아니다. 이 패자들은 승부가 날 때까지 맞붙는다. 그 결과를 인정하고, 핑계를 대지도 않는다. 아이언맨은 캡틴아메리카에게 방패 소유의 자격을 물을 뿐, 패배가 방패 때문이라고 탓하지 않는다. 슈퍼맨도 배트맨이 렉터에게 훔쳐서 만든 크립토나이트 창을 두고 비겁하다고 하지 않는다. 여전히 패자들도 영웅인 까닭이다. 만약 패자가 승부를 인정하지 않고 핑계를 댔다면, 관객은 영화가 끝난 이후 자신이 그동안 알고 있었던 슈퍼히어로의 정체성을 고민했을 것이다.

[시민의 목소리는 원점] 그래도 슈퍼히어로는 변화한다

슈퍼히어로가 중심인 영화이기에 여기까지다. 이 영화들의 발단이 된 비판적 목소리는 말미에 다시 거둬들여져야 한다. 영화 속 다수 시민과 스크린 밖 관객의 시점은 전투가 생중계되는 지점부터 시청자의 시점으로 다시 일치된다. 가령 <배트맨 대 슈퍼맨>의 마지막 장면은 시민들이 슈퍼맨을 청문회에 불렀던 이유를 완벽하게 지운다. <아포칼립스>의 매그니토도 비슷하다.

세 영화의 슈퍼히어로들은 시민 피해를 최소화시켜야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대결 장소가 제한적이다. <배트맨 대 슈퍼맨>은 그 짧은 시간에 해당 시민들을 대피시켰다는 무리한 설명까지 한다. 배트맨 대 슈퍼맨, 아이언맨 대 캡틴아메라카는 아예 폐쇄된 공간에서 맞붙는다. 대결하는 슈퍼히어로들의 화력을 감안하면, 롤랜드 에머리히나 마이클 베이의 전장보다 커도 전혀 무리가 없는데도 그렇다. 그렇게 협소한 전장은 시민 피해를 최소화시킨다.

이들의 선의와 노력이 다수 시민에게 전해지는 방식은 관객의 시각을 도리어 원점으로 복귀시킨다. 이번 전투로 피해를 입은 시민들은 더 이상 슈퍼히어로를 비판하기 힘들다. 하지만 피해자는 오히려 전편의 희생자보다 더 억울할 수 있다. 전작에서는 불가피한 희생이라며 양보하더라도, 이번에는 명백한 피해니까. 이들의 전투는 '지들끼리 싸움질'일 뿐이니까. 그런데 직접 피해를 입지 않은 다수가 대의를 위해 싸우는 슈퍼히어로들을 '생중계'로 시청한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슈퍼히어로를 비판하면, 다수의 시민 혹은 관객은 "너희는 이기적이며 올바르지 않고 따라서 너희가 피해를 입은 것에 더 이상 마음의 빚이 없다"며 소수의 시민을 조롱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피해자는 침묵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원점이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슈퍼히어로물의 변화가 맞다. 슈퍼히어로는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관객은 미리 알고 있다. 프로페서X는 노선을 수정해 영재학교와 <엑스맨>(2000)을 동시에 키워낸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슈퍼맨과 배트맨은 손을 잡고 <저스티스 리그>(2017 예정)를 결성할 것이며, <원더우먼>(2017 예정)은 활동을 재개할 것이다. 캡틴아메리카와 아이언맨도 다시 함께 <인피니티 워>(2018 예정)를 치러낼 것이다.

[슈퍼맨] 소통에 인색한 영웅

 슈퍼맨은 유일하게 상대에게 악으로 지목받는 슈퍼히어로다. <맨 오브 스틸> 당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배트맨이 그를 비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슈퍼맨은 유일하게 상대에게 악으로 지목받는 슈퍼히어로다. <맨 오브 스틸> 당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배트맨이 그를 비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 워너브라더스


지금까지 <배트맨 대 슈퍼맨> <시빌 워> <아포칼립스> 이렇게 세 편의 공통점을 중심으로 되돌아봤다. 마지막으로 셋의 차이점은 가장 이질적인 캐릭터로 정리한다. 슈퍼맨이다.

첫째, 그는 유일하게 개인적인 이유로 움직인 슈퍼히어로다. 로이스를 구하기 위해 치명적인 오해를 사고, 마사를 구하기 위해 상대 영웅에 도전한다. 캡틴아메리카가 버키를 위해 움직이는 건 동시대 친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찌 보면 그는 가장 무뚝뚝한 캐릭터지만, 가장 애틋한 캐릭터다. 대신 그는 렉터에게 크립토나이트보다 더 치명적인 약점을 잡힌다.

둘째, 그는 유일하게 상대방에게 잠재적인 악으로 지목받는 영웅이다. 가령 매그니토는 엑스맨의 추적을 받는 상황이 아니었고, 캡틴 아메리카는 자처한 것이다. 그런데 배트맨은 그를 "지구 전체에 위협이 될 자", "적이 될 가능성이 1%라도 있는 자"로 규정한다. 배트맨은 <맨 오브 스틸>을 겪은 후 그와 조드를 적대적 공생 관계로 보고 책임을 묻는다. 배트맨은 자신이 꾼 악몽 때문에 확신을 갖는다.

배트맨은 꿈속에서 어떤 그룹의 우두머리 행세를 한다. 배트맨이 슈퍼맨에게 갖는 적의는 일반 피해자로서 가능하나 영웅을 자처하는 자로서 적합한 방식도 아니고 정당한 명분도 없다. 배트맨은 그 당시 무엇을 했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배트맨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물며 배트맨은, 이유야 어찌됐든, 알았든 몰랐든, 피해 직원에게 연금도 지불하지 않은 기업 회장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배트맨이 그를 비난하는 것이야말로 이상하다. 그러나 극중 시민들의 여론은 슈퍼맨에게 악화될 뿐이다.

셋째, 그는 상대적으로 소통에 인색한 영웅이다. 배트맨은 악당을 낙인찍어 뉴스로 만들었다. 아이언맨은 합법적인 테두리 안으로 들어갔다. 프로페서X는 교육을 이용했다. 하물며 악당들은 공개적으로 힘을 과시한다. 그런데 그는 그들처럼 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는 청문회에 나서기 전에 해명할 수 있었다. 그는 불안에 떠는 로이스를 위해서라도 미리 해명했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 굳이 해명하지 않는다.

넷째, 그는 유일하게 희생한다. 슈퍼히어로는 아무도 희생하지 않는다. 피격당한 워머신조차 희생이라고 할 수 없다. 슈퍼맨은 유일하게 희생한다. 문제는 그렇게 희생하고 나서야 그의 고뇌를 대중들이 알아준다는 것이다. 대중의 무지라고 탓할 수 없다. 그가 희생을 증명하기 전까지 대중은 그의 고뇌를 짐작할 필요가 없다. 무작정 그를 믿으라는 건 그의 입장일 뿐이다. 슈퍼맨이 <왓치맨>(2009)의 닥터 맨해튼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 대중적 불안감이 배트맨의 망상을 통하자 적의로 나타난 것이다. 그가 끝내 보호하려한 시민들에게 필요한 건 슈퍼맨이지 애도할 기회가 아니다. 그는 더 적극적으로 소통했어야 한다.

다섯째, 그는 유일하게 정체성을 고민 중인 캐릭터이다. 슈퍼맨은 <슈퍼맨 리턴즈>(2006) 이후 감독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맨 오브 스틸>, <배트맨 대 슈퍼맨>까지 정체성 고민을 하고 있다. 이제 그만하자. 그가 후속작 <저스티스 리그>의 리더가 되려면 정체성 고민의 원조인 엑스맨처럼 방법론을 내놔야 할 때이다.

배트맨 대 슈퍼맨 캡틴 아메리카 엑스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