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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유명 기도처라는 낙산사 홍련암. 삼사순례에 나서 첫번째로 들린 곳이다
▲ 홍련암 우리나라 유명 기도처라는 낙산사 홍련암. 삼사순례에 나서 첫번째로 들린 곳이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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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들은 '삼사순례'라는 의식을 치른다. 한 번 길을 나서 절 세 곳을 돌아오는 행위를 말한다, 하지만 삼사순례란 그저 절집 세 곳을 들려오는 것은 아니다. 아마 간절한 바람이 있기 때문에 세 곳을 절을 들려 자신이 간구하는 바를 구구절절이 머리를 조아려 이루어질 수 있게 청원을 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우리 풍속에 삼사순례는 윤달을 맞이하여 말 그대로 세 곳의 사찰을 돌며 삼독(三毒 =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번뇌를 없애고 부처님과의 인연을 두텁게 하고자 하는 불교 수행의 한 과정이라고 한다. <동국세시기>에는 "윤달에는 달이 다 가도록 불탑을 돌며 불공을 드린다. 이렇게 하면 극락에 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꼭 극락을 가기 위한방법으로 삼사순례를 하는 것은 아니다. 윤달이 아니라고 해도 자신이 간절히 염원하는 바가 있다면 삼사순례를 하면서 기원하는 바를 정성껏 서원하다보면 하늘인들 감응하지 않을까? 그런 감응을 받기 위한 것이 삼사순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날이 무덥긴 하지만 주말과 휴일(25일~26일)을 맞아 강원도에 있는 절 세 곳을 돌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홍련암을 들어가기 전 만나는 의상대는 절경 위에 서 있다
▲ 의상대 홍련암을 들어가기 전 만나는 의상대는 절경 위에 서 있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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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기도처라는 낙산사 홍련암을 찾아가다

정성은 아무 생각없이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서원할 바를 정확하게 알고 어디를 돌아올 것인가는 미리 마음 속에 정해야 한다. 가급적이면 정한 바를 정성스럽게 돌아오는 것이 치성을 드리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아니겠는가? 종교를 떠나 산천초목에 기원을 하든, 명산대천에 기원을 하든 본인의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 아니겠는가?

주말인 25일 아침 7시 반에 길을 나섰다. 가장 먼저 기도를 하기 위한 장소를 강원도 양양군 낙산사 홍련암으로 결정을 하고, 첫날 두 곳과 둘째 날 한 곳을 돌아보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주말이라 강원도로 가는 차들이 도로를 메우고 있다. 막힌 길을 이리저리 돌아 낙산사 주차장에 도착 한 것이 12시 30분. 걸음을 재촉해 홍련암으로 향한다.

개인적으로 낙산사와는 인연이 남다른 곳이다. 2005년 4월 강원도 일대를 집어삼킨 화재사고 때 난 낙산사 곁을 지나고 있었다. 그날 TV 중계를 통해 당시 보물 제479호인 낙산사 동종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는지 모른다. 그리고 2007년 4월 7일 낙산사 동종이 다시 복원이 되어 종을 다시 울리는 날도 그 자리에 있었다.

낙산사를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조형물인 해수관음. 수많은 사람들이 디도를 하기 위해 찾아온다
▲ 해수관음 낙산사를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조형물인 해수관음. 수많은 사람들이 디도를 하기 위해 찾아온다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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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화재가 일어나고 난후 찾아갔던 낙산사의 아픔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낙산사이기 때문에 가급적 찾아가는 것을 자제하고는 했다. 하지만 마음속에 간절히 기원할 것이 있으니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간구를 하는 홍련암을 찾아갈 수밖에. 주말이라 그런지 이른 시간인데도 낙산사 홍련암에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겨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머리를 조아린다. 그리고 서원하는 바를 간구한다.

날이 무덥지만 바닷바람이 불어 땀을 식힌다. 그런 바람이 고마울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연신 들락거리지만 무슨 상관이랴. 그저 내 마음속에 간직한 서원을 들어달라고 간구를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땀범벅이 되어 홍련암 문을 나선다. 피곤함과 허기짐으로 인해 지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수미단에 좌정하고 계신 부처님의 얼굴을 한 번 올려다본다. 간구에 대한 무슨 답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간구는 마음에서 우러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간구하는 바를 모른 체 하실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긴다. 다리가 천근이지만 걸음을 옮겨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 해수관음 앞으로 다가선다. 반사된 햇볕으로 인해 해수관음의 안면이 빛이 난다. 저 빛이 간구에 대한 답변은 아닐까? 멋쩍은 생각을 하면서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잠시 땀을 식힌다.

두번 재 기도처임 고성 금강산 건봉사
▲ 건봉사 두번 재 기도처임 고성 금강산 건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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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건봉사에서 두 번째 간구를 하다

낙산사를 떠나 고성 화진포를 잠시 들려 찾아간 곳은 부처님의 치아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는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로 723에 소재한 금강산 건봉사이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인 520년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758년에 발진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스님 등과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염불만일회의 시작이었다.

염불만일회에는 신도 1820인이 참여하였다. 염불만일회를 시작한 지 30년이 지난 787년에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살아있는 채로 극락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한다. 건봉사 뒤편 산등성이에 자리한 '등공대'가 그러한 것을 말해주고 있다.

건봉사는 고려 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서봉사로 바꾸었으며, 1358년에는 나옹스님이 중건하고 건봉사로 개칭하여 비로소 염불과 선, 교의 수행을 갖춘 사찰이 되었다.

건봉사로 들어가는 길목인 보물 능파교
▲ 능파교 건봉사로 들어가는 길목인 보물 능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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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5년에는 세조가 이 절로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으로 삼은 뒤 어실각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써서 하사하였다. 건봉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기병한 곳으로 호국의 본거지였고, 1605년에 사명대사가 일본에 강화사로 갔다가 통도사에서 왜군이 약탈하여 갔던 부처님 치아사리를 되찾아 와서 이 절에 봉안하였다.

1878년 4월 3일에 산불이 일어나 건물 3183칸이 모두 전소되었는데 다음 해에 대웅전, 어실각, 사성전, 명부전, 범종각, 등을 중건하였으며 지금까지도 건봉사 경내에는 수많은 석물들이 널려있어 과거 이곳이 얼마나 큰 사찰이었나를 가늠할 수 있다.

건봉사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사리 3과를 사리탑에 모셔놓고 있는 곳이다. 사리를 모신 곳에는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사리탑이 보이도록 유리로 벽면을 조성한다. 이미 몸은 지칠대로 지쳤지만 서원을 게을리 할 수가 없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른다. 그저 일어섰다 엎드리기를 반복할 뿐이다.  

금강산 팔만구 암자 중 첫번째 절이라는 금강산 화암사
▲ 화암사 금강산 팔만구 암자 중 첫번째 절이라는 금강산 화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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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세 번째 절 금강산 화암사를 찾아가다

금강산 팔만구암자의 첫 번째로 손꼽히는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에 위치한 화암사(禾巖寺). 신라 혜공왕 5년인 769년에 진표율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인조 11년인 1633년 택당 이식(李植, 1584~1647)선생이 간성군수로 있을 때 썼다는 간성지 화암사조에 의하면,
"천후산 미시파령(天吼山 彌時坡嶺=미시령) 밑에 화암(禾岩)이란 바위가 바른편에 있기 때문에 절 이름을 화암사라 했다. 이절은 산허리에 위치하고 있어 가까이는 영랑호, 멀리는 창해에 임해있고 양양, 간성의 모든 산과 평원심곡이 눈 아래 보이고 넓고 아름다운 경치는 절이 토해 놓은 것 같다. 절 뒤에는 반석과 폭포가 특수한 모양을 하고 있어 가히 볼만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서 "광해군 14년인 1622년에 절이 불에 타버렸으며, 옛날에는 크고 우아한 문루가 있었는데 망가졌다. 문루에서 바라보는 창해에서 해 뜨는 모습은 강호를 찾는데 있어 이곳보다 나은 곳이 없건만 옛사람들을 찾아와 돌아보지 못했으며 지방사람들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고 또 관동지방에는 이름난 곳이 많아 과객들이 이곳까지 올 겨를이 없었으므로 절 이름이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화암사는 창건 이래 고종 원년까지 1096년간 화재가 5번이나 났는데 이것은 '화암'이란 이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절 이름을 개칭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는 했다. 5년 만에 다시 들린 화암사는 그동안 많은 불사가 이루어져 딴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런 달라진 모습에 눈을 돌린 여유도 없이 바로 삼성각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한다.

화암사 앞에는 '쌀바위'라는 거대한 바위가 자리를 하고 있고 휴일을 맞아 수많은 등산객들이 화암사 경내로 몰려든다.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신 사람들은 본격적인 산행준비를 하기 위해 소란을 피우지만 그런 소란과 무관하게 조용한 삼성각에서 난 내 마음속의 간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마음을 대해 고개를 땅에 붙인다.

미시령 전망대에서 바라다 본 울산비위. 이 바위를 보면서 지극한 정성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 울산바위 미시령 전망대에서 바라다 본 울산비위. 이 바위를 보면서 지극한 정성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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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 나이는 21살. 음력 ○○월 ○○일생. 남자아이입니다. 수술을 하면 수술 덕을 입게 하시고 부처님의 가피로 밝은 세상을 보게 하옵소서. 그저 어린아이의 눈이 세상만물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사 하는 간구입니다."   

무릎을 보호하기 위해 좌복(예불을 드릴 때 깔고 앉는 방석)을 두 장이나 겹쳐 놓았지만 무릎에 전해오는 통증이 심해진다. 머리가 닿는 부분은 흐르는 땀으로 인해 흥건하게 젖었다. 이런 것이 정성일까? 꼭 이렇게 몸을 고통스럽게 해야 서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일까? 화암사를 나와 미시령을 넘다가 전망대에서 바라본 울산바위. 얼마나 오래 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울산바위를 바라보면서 마지막 서원을 속으로 이야기한다. 물질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직 마음 하나만으로 천지의 기운을 움직여보겠다는 생각이다. 이번에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시 시간을 내어 삼사순례를 할 생각이다. 이루어질 때까지 노력하면 언젠가는 서원하는 바가 하늘을 움직일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한 젊은이를 위해 스스로 고통스럽다는 삼사순례를 시작한 지 두 번째. 이런 고행이 얼마나 계속되어야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면식도 없는 젊은이를 위해 이 절집 순례를 남들은 '미쳤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조건도 없이 다만 젊은이 하나를 강건하게 만들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원을 갖고 시작한 절집순례가 이제 30년 가까이 답사를 계속해 온 문화재를 만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것도 내가 짊어질 업보일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티스토리 블로그 바람이 머무는 곳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삼사순레, #홍련암, #낙산사, #금강산 건봉사, #금강산 화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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