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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와 나무> 책표지.
 <슈베르트와 나무> 책표지.
ⓒ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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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 없이 오고가는 차 소리로 시끄러운 도시의 거리를 걷는 것이 그래도 즐거운 것은 곳곳에 여러 나무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다투며 걷는 출근길에나, 피곤에 절은 퇴근길에 만나는 나무들은 여유를 갖게 하고, 적잖은 위로가 된다.

나무를 좋아하게 되면서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순간이 많았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나무의 변화와, 어느 날 갑자기 나무가 내보여주는 꽃을 보고 감탄하면서 시각장애인으로 평생 집 주변만 더듬다 삶을 마감한 고향 마을 아저씨 두 분을 회상한 적도 있다.

이런지라 한 시각장애인이 나무들을 답사해 어떤 나무이며, 어떤 느낌인지를 들려준다는 <슈베르트와 나무>(휴머니스트 펴냄)는 호기심이 특히 많이 앞섰던 책이다.

매우 궁금했다. 나무를 눈으로 보지 않고 나무를 아는 것, 그리고 구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눈을 감고 줄기와 잎, 꽃을 만지면 어떤 느낌일까?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김예지는 어떤 사람일까? 시각장애인들에게 나무는 어떤 존재이며, 어떤 모습으로 기억할까? 등, 참 많은 것들이 말이다.

지난 봄과 같은 순서로 나무를 찾아갔다. 능소화가 제일 먼저다. 활짝 피었던 주홍색 꽃송이를 볼 수 없다는 것 외에 나는 별다른 변화를 찾을 수 없다. 그녀가 능소화 앞에 다가섰다. 스스로 능소화 덩굴을 찾아내 어루만졌다. "지난 번 하고는 다른데요."

기대는 했지만, 반응은 예상보다 빨랐다. 줄기든 잎이든 한참을 탐색한 뒤에야 한두 마디 나무의 특징을 이야기하던 여느 때와 달리 덩굴 줄기에 손이 닿고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여름과의 차이가 느껴진다고 그녀가 말했다.

"껍질부터 달라요. 그때에는 촉촉하면서, 덩굴이 감고 오른 나무줄기에 바짝 붙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나무줄기와 덩굴 사이가 좀 비었고, 덩굴 줄기의 겉껍질도 좀 떠올랐어요. 음, 마치 도배를 잘못한 벽지 처럼요."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김예지 씨가 세상과 소통하던 손으로 나무를 관찰하고 있다.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김예지 씨가 세상과 소통하던 손으로 나무를 관찰하고 있다.
ⓒ 휴머니스트·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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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와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김예지 씨와 나무 안문학자 고규홍 씨.
 능소화와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김예지 씨와 나무 안문학자 고규홍 씨.
ⓒ 휴머니스트·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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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가까이 나무를 찾아다니며 그간 여러 권의 책을 통해 나무와, 나무와 함께 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나무 인문학자 고규홍씨와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김예지씨가 1년 동안(2015년 4월부터 2016년 1월까지) 일상의 나무들을 관찰했다. 책은 함께 나무들을 바라보고, 각각 느낀 것들을 주고받는 한편 고씨가 나무에 대한 인문학적 지식을 들려주는 형태로 되어 있다.

김씨는 사고로 두 살 때 시력을 잃었단다. 나무라는 존재 자체를 모를 그런 나이에 나무를 아예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그녀에게, 안내견 찬미의 도움을 받으며 이동하는 그녀에게 나무는 걸음이나 활동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김씨는 고씨가 이끄는 대로 그녀가 자주 오가는 길과 고향집, 천리포 수목원의 여러 나무들을 만난다. 김씨는 손으로 만지거나, 냄새를 맡거나, 나무 둘레를 돌거나, 나무를 등지고 바깥쪽으로 걷는 등,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무를 관찰한다. 그리하여 그 느낌과 계절이나 환경에 따른 변화 등을 들려준다.

"가을 되면 바람 소리가 여름과 확실히 달라져요. 잎이 마르기 시작하니까 바람소리가 더 크게 들려요. 소리에 귀 기울이면 나무의 전체적인 생김새를 짐작할 수도 있어요. 물론 나무의 높이라든가 규모를 정확히 알아내는 거야 내가 할 일이 아니겠죠. 하지만 그 규모도 대강 느낌으로 알 수 있어요"

(…)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잠시 무엇인가 탐색하더니, 선 자리에서 직각으로 돌아서서 숨을 들이쉬었다. 다시 얼마 정도를 돌아서 큰 숨 한번, 또다시 돌아 한숨. 그렇게 한바퀴를 조금 넘게 돌았다.

"소리뿐 아니라 다른 게 더 있어요.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운데, 방향을 달리하면 온도의 차이를 느낄 수 있지요. 바람도 달라요. 막힘없이 그대로 흘러가는 쪽과 나뭇가지에 부딪치며 흔들리는 움직임도 다르게 느껴져요."


이 부분을 읽으며 몇 년 전 자주 오가던 길에 보았던 은행나무 몇 그루가 떠올랐다. 여섯 그루 중 두 그루는 유독 단풍이 늦었다. 주변 나무들이 모두 샛노랗게 물들었을 때 그 두 그루는 초록색을 벗어나지 못하곤 했다. 나란히 섰는데도 차이가 심했다.

해마다 그랬다. 그 뚜렷한 차이를 몇 년 동안 보면서 주변의 건물이나 인근의 산 때문에 바람이 스치는 정도가 달라 그럴지도 몰라. 뿌리 저 아래 물줄기가 달라서 그럴지도 몰라 지레짐작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비밀은 역시나 바람 때문이었나 보다. 아마도 말이다.

그녀에 의하면 그 나무가 어디에 섰는지, 그 나무 곁 어느 쪽에, 어떤 방향에 있는가에 따라 바람이 다르다. 그리고 같은 나무일지라도 어느 계절인가에 따라 나무줄기와 나뭇잎의 두께가 달라진다. 봄에 두꺼웠던 잎들은 단풍을 앞두고 얇아진다.

그녀는 아마도 나무에 대해 어지간히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 짐작조차 못할, 아니 머리로만 이해하거나 짐작했을 것들을 들려준다. 경이로운 한편 고맙다. 눈에 의존해 보던 것과 또 다른 방법으로도 나무를 보고 느낄 수 있음을, 그 방법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동행.
 아름다운 동행.
ⓒ 휴머니스트·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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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고규홍 씨는 어느날 한 그루 나무를 여러 방향에서 찍은 사진들로 나무 모형을 만들어 김예지 씨에게 나무를 느끼게 한다. 앞을 못보는 터라 나무를 모르는 시각장애인들이 나무를 느낄 수 있는 좋은 방법같다.
 저자 고규홍 씨는 어느날 한 그루 나무를 여러 방향에서 찍은 사진들로 나무 모형을 만들어 김예지 씨에게 나무를 느끼게 한다. 앞을 못보는 터라 나무를 모르는 시각장애인들이 나무를 느낄 수 있는 좋은 방법같다.
ⓒ 휴머니스트·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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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라는 덩굴식물에 대해 이야기했다. 능소화는 홀로 서지 못한다. 물론 광합성을 해서 스스로 양분을 짓기는 하지만, 담장이나 다른 나무를 타고 올라야 하는 식물이다. 능소화를 이야기한 건, 우리는 누구나 언제나 누군가에 기대며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마치 김예지가 찬미(주:안내견)에게 기대어 사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경우가 바뀌면 찬미가 김예지에게 기대어 산다. 세상살이가 그렇다. 어느 순간에는 누군가에게 기대야 하지만, 다른 순간에는 그 누군가가 내게 기댈 수 있다는 게 우리 삶의 위치 아니었던가. (…) 직접 만나기 전까지 그녀를 '치유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세상을 느끼는 방식이 다를 뿐, 치유가 절실한 건 아니다. 더구나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단 말인가.


이처럼 사람간의 관계 등 우리 삶과 맞물려 들려주는 것도 이 책이 인상 깊게 와 닿는 이유 중 하나이다.

요즘 우리집 앞 능소화가 꽃을 한창 피우고 있다. 책 덕분에 그리 경이롭게 와 닿지 않았던 능소화가 처음 만났던 10여 년 전 그날처럼 새롭게 보이고 있다. 기억에 거의 없던 능소화 줄기까지 처음으로 보게 하면서 말이다.

올 여름 찾는 나무그늘 아래서, 가을 단풍든 나무 앞에서 이제까지 읽었던 수많은 나무 관련 책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의 특별한 나무 체험 방법들을 시도해 보리라. 나무에 대한 다른 느낌과 감동들을 만날 수 있을테니.

덧붙이는 글 | <슈베르트와 나무> | 고규홍 (지은이) | 현진(사진) | 휴머니스트 | 2016-05-02 | 정가 16,000원



슈베르트와 나무 -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와 나무 인문학자의 아주 특별한 나무 체험

고규홍 지음, 휴머니스트(2016)


태그:#김예지(피아니스트), #고규홍(나무 인문학자), #능소화, #슈베르트와 나무, #시각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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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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