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인 디판이 목숨을 다해 갱들로부터 가족을 보호한다.

아빠인 디판이 목숨을 다해 갱들로부터 가족을 보호한다. ⓒ 그린나래미디어


세속적·실용적 시각으로 보는 세상은 불평등하다. 아기는 살아갈 나라와 도시·부모·외모·재능을 선택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전이 일고 있는 시리아의 아기·여자·노인은 절대적 약자이자 난민이다. 그들에게 거리는 살아있는 공동묘지에 가깝다. 버려진 시체는 가족·친구이고, 정부군과 반군은 아는 사람이다. 그 지난한 전쟁 속에서 죽음을 예감한다.

스크린 너머로 난민의 질린 얼굴을 보는 이는 세상의 불평등을 인식한다.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 경험적으로 자각하기도 한다. 내전이라는 극단이 아닌, 평범한 사회에도 크고 작은 차별이 지뢰처럼 숨어있다는 것을 말이다. 유토피아는 머나먼 얘기다.

난민이 느끼는 그 모든 공포와 당혹감에 대해

F. 스콧 피츠제럴드가 자신의 저서 <위대한 개츠비>에서 말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

난민이 느끼는 공포·슬픔·당혹감은 곧 종군기자의 영상과 사진, 글의 공간을 넘어 전해진다. 공감을 일으킨다. 터키의 해안가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세 살배기 '쿠르디'를 담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난민에 대한 유럽의 여론 뒤바꿨다. 절대적 약자인 난민을 공감하는 이 지점에서, 사회는 보편적 평등을 지향한다.

난민의 비감한 시선을 담은 영화가 있다. '쿠르디'처럼 사회를 꿈틀거리게 할지도 모르는 영화다. 2015년에 제작되고, 같은 해 국내에 개봉한 프랑스 드라마 영화 <디판>(감독 자크 아디아르, 에포닌 모멘큐)이다. 상영시간은 114분. 이 작품은 제 68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제 40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제 2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식 초청작으로 상영됐다. 프랑스로 이만가는 스리랑카 난민, 디판(제수타산 안토니타산 분), 얄리니(칼리스와리 스리니바산 분), 일라얄(콜로딘 비나시탐비 분)이 등장한다.


 아빠인 디판이 목숨을 다해 갱들로부터 가족을 보호한다.

아빠인 디판이 목숨을 다해 갱들로부터 가족을 보호한다. ⓒ 그린나래미디어


디판과 얄리니, 일라얄은 이민을 목적으로 브로커가 위조한 이름이다. 6개월 전에 죽었지만, 서류에는 살아있는 낯선 가족의 이름이다. 서른다섯, 스물여섯, 아홉 나이도 가짜다. 따라서 디판과 얄리니 일라얄은 실제로는 본명이 따로 있고 가족도 아니다. 난민촌에서 만난 생면부지의 사람들이다. 선진국, 프랑스로 이민가기 위해서 브로커를 매수한 것이다. 그래야 부모와 형제를 죽음으로 내몬 지옥과 같은 스리랑카 내전에서 벗어난다.

스리랑카 내전은 영국에게서 독립 후 벌어진 불평등으로 1983년 발발했다.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정부에 집권한 불교계 싱할라족은 소수 힌두교계 타밀족을 차별했다. 싱할라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대학 입학, 공무원 진출에 싱할라족을 우선 배정했다. 종교도 불교를 우대했다. 국기는 싱할라족을 상징하는 사자를 고안해서 만들었다. 이에 타밀족은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라는 반군을 조직하여 해방 전쟁을 치렀다. 2009년 정부군의 제압으로 종식된 스리랑카 내전은 수많은 사상자와 부상자, 난민을 발생시켰다.

다른 민족에 의한 갑작스런 식민지 해방은 또 다른 차별을 불렀다. 유사한 민족 간의 차별이 일어난다. 다시 전쟁이다. 그 연속되는 무지한 차별의 무게에서 디판과 얄리니, 일라얄은 벗어나기로 작정한다. 더 나은 이상(理想)사회를 꿈꾼다. 세 사람의 탈출은 이기적이지 않다.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사회에 반항하여 내린, 합리적인 결단이고, 용감한 도전이다.

"정부가 학교를 불태웠어요?"

 영화 속 난민의 이야기는, 영화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존재하는 이야기이다.

영화 속 난민의 이야기는, 영화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존재하는 이야기이다. ⓒ 그린나래미디어


스리랑카의 난민촌은 모래사장에 있다. 이곳엔 다양한 주거지가 있다. 버려진 얇은 철판으로 만든 집, 짚을 뭉텅이로 엮어 지붕을 만든 집, 천막으로 만들어 바람에 흔들리는 집이 있다. 나뭇가지로 더위만 듬성듬성 가린 집도 있다. 엉성하고 초라하다.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의 잔해를 활용해 급박하게 모래사장에 지은 느낌이다. 상태가 이렇기 때문에 전기, 수도, 가스는 이용은 불가능하다. 정규 교육도 마찬가지. 난민은 당장 마실 물과 음식을 걱정하고, 이웃이 욕심에 눈이 머는 것을 경계하고, 자살폭탄테러나 총격전의 위협에 시달린다. 모래사장에 내던져진 존재인 난민의 지상 과제는 '생존'에 있다.

이 난민촌은 실재했던 스리랑카 물라이티부 해안의 난민촌을 연상케 한다. 2009년 정부군과 반군의 전쟁이 격화되자, 물라이티부 해안의 모래사장에 사격금지 구역이 설정됐다. 12만 5000여명의 난민이 몰려들었다. 반군은 이들을 인간방패로 삼았고, 정부군은 이를 알고도 공격했다. 난민이 사격금지구역에서 죽어나갔다. 그곳에 남아있던 난민에게 도피처는 사실상 없었다.

디판과 얄리니, 일라얄은 운이 좋게도 브로커를 매수하고, 신분을 위조하여 한 가족이 됐다. 해외로 이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족에게 세상은 시련을 끝내지 않는다. 차가운 밤바다를 건너야 한다. 인도의 마드리스 공항에 도착하면 프랑스로 건너가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시련은 이질적 사회에 이민자로서, 이방인으로서 정착해 살아야 한다는 것에 있었다.

한편, 영화에서는 난민이 바다를 건너는 장면을 짧게 다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다로 나가는 난민의 대다수는 '보트피플'이 되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넌다. 그중에 배가 난파돼 그대로 바다에 수장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목적지에 도착해도 되돌아가야 하는 상황도 빈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스리랑카,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지에서 난민이 거친 바다를 향해 출항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2유로... 2유로밖에 안 해요"

 착취되는 사회 밑바닥에 놓인 '난민', 디판과 가족이 멋진 사랑의 기적을 보였다.

착취되는 사회 밑바닥에 놓인 '난민', 디판과 가족이 멋진 사랑의 기적을 보였다. ⓒ 그린나래미디어


어렵게 도착한 프랑스 파리, 그곳은 이상(理想)사회가 아니었다. 디판과 가족이 정착하는 데 사회가 채워주지 않는 공백이 있다. 프랑스 정부는 디판과 가족을 심사했다. 난민에게 영주권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 사이, 디판은 가장으로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야 디판과 가족이 먹고 살 수 있었고, 미래를 예비할 수 있었다.

디판이 파리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도붓장수다. 프랑스어를 못하지만, 그 범법 일은 디판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고양이 귀 모양의 머리띠를 하고 디판이 말한다. 그 언어가 단순하다.

"안녕하세요. 2유로예요. 비싼 거 아니에요. 부인. 라이터."

이 말을 반복한다. 야옹, 야옹. 디판에게 더 필요한 건 고양이처럼 밝은 귀와 재빠른 다리다. "경찰 떴어! 뛰어!"하는 외침에 즉시 반응해야 한다. 조각난 달 아래 쓰레기통을 기웃거리는 고양이와 다를 바 없다. 디판의 일의 범위는 도시에서는 좁다. 바깥에서도 좁지만, 화려한 자본의 도시 한 가운데는 어울리지 않는다. 자연히 정부는, 디판과 가족에게 어울리는 일자리가 있는 도시 외곽으로 일을 줌으로써, 거주지로 구분선을 그었다. 파리 외곽, '르 프레'. 그곳은 스리랑카의 무질서와 다를 게 없는 갱들이 판치는 야생(野生)사회였다.

"경계 넘지 마!"

 인간은 악한가. 인간은 왜 싸우는가. 인간을 인간끼리 싸우게 만드는 건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인간은 악한가. 인간은 왜 싸우는가. 인간을 인간끼리 싸우게 만드는 건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 그린나래미디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도둑질·살인·간음·탐욕·악의·사기·방탕·시기·중상·교만·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성경 신약에 적힌 말이다. 파리 외각 '르 프레'에 있는 허름하고 낡은 네모난 아파트에 디판과 가족이 도착한다. 바닥의 시멘트는 군데군데 파손돼 있고, 그 사이를 잔디와 낙엽이 어지럽게 매웠다. 아파트는 A동부터 B, C, D, E, F, G, H동까지 여덟 개 동이 있다. A동에서 D동이 한 아파트에 있고, 마주보는 아파트도 동일하게 나머지 네 개 동이 묶여있다. 아파트 옥상에는 총을 든 남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다.

디판은 A동에서 D동까지 아파트를 관리한다. 계단을 쓸고 닦고, 우편함의 편지를 정돈하는 일이다. D동은 갱들이 차지했다. 얄리니는 맞은편 아파트 G동에서 가정부로 일한다. 아비브라는 노인을 돌보는 일이다. 노인의 방 옆으로는 갱들이 모였다. G동은 D동처럼 갱들이 차지했다. 일라얄은 초등학교 특별반에 입학했다.

아파트 D동과 맞은편 G동 갱들 간에는 극심한 대립이 있었다. 대낮 아파트 공터에서 사나운 총격전이 벌어진다. 유리창이 깨지고 사람이 죽는다. 스리랑카 정부군과 반군 간 내전의 축소판이다. 이 갈등은 다시금 축소되어 디판과 가족에게 나타난다. 국가, 도시, 가족의 갈등의 연쇄이다.

난민촌을 벗어나기 위해 꾸려진 디판과 가족의 갈등은 필연적이다. 서로를 잘 모르고 동행하게 됐다는 점에서, 미래의 갈등은 내재되어 있었다. 영주권을 얻는다는 목적이 달성되면 해체되어도 무방한 가족이다. 디판과 가족의 설정은 갈등을 더욱 부추긴다. 디판은 반군의 민족인 타밀족이고, 얄리니는 정부군의 민족인 싱할라족이다. 갈등을 암시한다.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디판과 얄리니의 대립이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이들이 갖는 민족의 상징성은 의도적이고 내면적이다. 디판과 얄리니 사이에서 일라얄은 자기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침묵으로 반항한다. 디판과 얄리니를 부모처럼 여기지 않는다. 나아가 디판과 얄리니가 일하는 장소인 아파트 D동과 G동 갱들 간의 대립도 역시 영화를 관통하는 갈등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 남편 해치지 마세요."

 난민들이 보여준 기적, 우리는 더 많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난민들이 보여준 기적, 우리는 더 많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 그린나래미디어


그러나 디판과 가족이 겪는 갈등은 스리랑카 내전과 갱들의 총격전처럼 서로를 살해하는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다. 디판과 가족을 둘러싼 사회도 갈등의 심화를 노골적으로 재촉한다. 그들도 좌로나 우로 흔들린다. 그러나 디판과 가족은 끝내 사랑으로 갈등을 풀어낸다. 영주권을 얻는다는 목적 이상의 행동을, 진짜 가족의 이타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먼저 아빠인 디판이 목숨을 다해 갱들로부터 가족을 보호한다. 아파트 사이에 하얀 경계선을 긋는 그를 총은 묶어두지 못했다. 영국으로 간다는 얄리니의 주장을 끝내 받아준다. 여권을 돌려주고, 여비까지 챙겨준다. 그러자 얄리니도 변한다. 심각한 표정의 갱 두목 앞에서, 디판을 남편이라며 해치지 말라고 말한다. 디판에게 일라얄을 영국으로 데려간다고 말한다. 그 사이 일라얄도 마음을 연다. 친구의 생일 파티에 가는데 자식처럼 디판과 얄리니의 동의를 우선 구한다. 침묵이 사라졌다.

이처럼 디판과 가족은 사랑으로써 서로에게 용기있게 내줬다. 자기가 중심이 아닌 타인이 중심이었다. 그러자 갈등이라는 악한 것이 허물어졌고, 그 비어진 공간을 포용과 관용, 배려와 인정이 채워졌다. 착취되는 사회 밑바닥에 놓인 '난민', 디판과 가족이 멋진 사랑의 기적을 보인 것이다.

디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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