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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도시에서 괴상한 사람을 만났다. 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딸과 아들 이름은 안다. 그는 주점을 운영하면서, 딸과 아들 이름을 상표화한 술을 팔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알려지는 것도, 술집이 알려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페이스북은 하지만, 자기 술집을 대놓고 홍보하지 않는다. 자신이 만들어둔 메뉴판조차 부정했다.

"메뉴판은 의미없습니더. 저희 주점에는 최신 상품과 최고 제품이 들어옵니더. 그러니 메뉴판을 볼 필요도 없고, 단골들은 냉장고 안을 들어다보고 눈에 드는 새로운 술을 꺼내갑니더."

이 주점에서 손님은 술만 주문할 수 있다. 안주는 그 술을 다 마실 때까지 주인이 알아서 제공한다. 꼬치구이, 타코야키, 감자고로케(크로켓), 조개젓갈, 초밥 등이 나온다. 그렇다고 통영의 다찌집이나, 전주의 막걸리집처럼 한상 차림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부족하지 않게, 주인이 눈치껏 감각적으로 낸다.

하지만 주인이 지키려는 원칙이 하나 있다. 술맛을 가리는 안주를 내지 않는다. 즉, 자극적이고 화려한 안주를 내지 않는다. 격조 높은 술을 즐기는 사람들은 술맛에 몰입하려들지 안주를 탐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가족 이름이 새겨진 술을 내놓다

술을 잘 이해하는 방법 하나, 술을 만든 사람에게 술 이야기를 듣기.
 술을 잘 이해하는 방법 하나, 술을 만든 사람에게 술 이야기를 듣기.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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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제공하는 최고의 서비스는 차별화된 술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한정 생산된 술을 가져다 놓기도 하고, 양조장에서 주문자 상표를 붙여 가져오기도 한다. 그가 주문해서 제조한 술이 세 종류가 있었다. 쌀과 누룩만으로 빚은 '딸 이름' 제품이 있는데 술 한 병 값은 13만 원이다. '아들 이름'의 술은 좀 더 고급스럽고 더 비싼 가격에 팔린다. 그리고 최고의 술은 가족 이름을 달고 있다. 그는 술을 팔지만 무엇보다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술집 주인은 3년 계약으로 일정한 물량을 팔기로 하고 양조장에 아들 딸 이름을 붙인 술을 주문 제작해 온다. 보증은 그 술을 유통하는 업체가 진다. 주문하는 술값이 3년에 1억 원 어치 정도 된다. 기발하고, 특별하다. 주점에서 자기 이름을 붙인 술병을 내놓다니, 그런 요구를 받아주는 양조장이 있다니 대단하다.

그는 요리사인데, 조금 더 자기 스타일에 몰입하고 싶어서 술 공부를 했다고 한다. 술을 빚은 경력은 없지만 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양조 과정을 공부했다. 어느 유통업자 못지 않게 다양한 술 이름을 외우고 있다.

그는 우리 앞에 술의 정보를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지칠만하면, 그는 닭모가지를 잡고 오듯이 새로운 술의 병목을 잡고 온다. 향이 기막히다며, 양조용 쌀 품종을 읊조리며 시음하라며 따라준다. 무료 시음주는 그의 말을 잘 들어준 대가로 내리는 하사품 같다. 우리는 조용히 시음주를 받아들고, 그가 말한 향기를 찾아내려고 킁킁거린다. 아주 충실하고 고분고분한 학생이 된 듯하다.

"술을 좀 아신교?"

술을 잘 이해하는 방법 둘, 다양한 술을 맛보기.
 술을 잘 이해하는 방법 둘, 다양한 술을 맛보기.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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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주점에는 이미 마셔버린, 100만 원이 넘는 술이 쉽게 눈에 띈다. 그 술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도 없다. 모든 정보는 그에게서 나온다. 그는 자신보다 우월한 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무림의 고수처럼, 술에 관련된 정보와 지식을 쏟아놓는다. 그는 술을 통해서 사람과 소통하고, 술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그는 술의 정보를 모으기 위해 수시로 양조장들을 찾아간다. 사람들은 그의 말에 압도당하고, 그가 따라주는 술에 감탄하고 감동한다. 나를 그곳까지 이끈 단골은 그의 술집에 들어서면, 다른 세상에 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맛의 지배자고, 자신은 맛의 포로가 된다고 했다. 그의 말을 믿기 시작하면, 그는 좀 더 수준 높은 술의 정보를 제공하고, 비장의 무기처럼 숨겨둔 술을 제공한다.

그는 말하는 틈틈이 "술을 좀 아신교?"라고 묻는다. 당연히 잘 모른다고 고개를 저어야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들을 수 있다. 그는 술을 유통하는 이들에게도 큰 손으로 통하고, 양조장 사람도 그의 가게에 들어와 다양하고 고급한 술의 진열에 놀라고 고개를 숙이고 간다고 했다. 그의 말은 거침없고, 그의 표정과 몸짓은 도도하다.   

"술에서 가장 중요한 게 쌀 아닌교, 양조 벼는 키가 큽니더. 벼의 크기가 내 어깨 정로로 올라옵니더. 그리니까 바람 불면 픽픽 스러집니더. 일반 논에서는 키우기 어렵십니더. 막걸리 빚을 때도 쌀을 골라서 써야 합니더. 동네에 가면 기름기가 적은 쌀을 구해서 술을 빚어보이소. 기름기가 있으면 효모의 먹이가 풍부해서 효모에서 고유한 향기가 나지 않습니더. 기름기가 없고 밥맛이 없는 쌀을 가지고 빚어야 효모가 쌀 속에 암덩어리처럼 박힌 심백을 먹다가 지쳐 진을 팍팍 내 뿜씁니더."

그러면서 그는 효모 향이 강한 술을 꺼내온다. "술을 삼키고 나서 하나 둘 셋 세고 나서, 코숨을 길게 내 뿜어보이소. 향이 느껴지지예." 그 향은 마치 위스키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굳세고 강렬하다. 그의 말에 취해있자니, 향기가 빠져버린 술이란, 혼이 빠져버린 술 같다.

그의 인도 하에 새로운 세계로... 퇴로란 없다

술을 잘 이해하는 방법 셋, 술의 원료를 이해하기.
 술을 잘 이해하는 방법 셋, 술의 원료를 이해하기.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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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손님들에게 술을 적극적으로 강력하게 추천한다. 그 추천을 단골 손님에게 주는 선물로 여긴다.

"술 향이 좋아 와인 잔처럼 굴곡을 준 전용잔을 씁니더. 전용잔으로 마시면 술 맛이 다릅니더. 한 잔(180㎖) 분량의 전용 잔에 가득 채우면 술을 천천히 나눠 마시게 되는데 그러면 차츰 향이 진해지고 술맛이 두꺼워집니더. 반 잔(90㎖)을 따르면 금방 마시니까 술을 깔끔하게 즐길 수 있십니더."

그의 말을 들은 손님은 새로운 술맛을 알게 되고, 새로운 세계로 진일보하게 된다. 감각적인 사람들은 그 길은 스스로 물러설 수 없는 다른 경지의 세계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이다. 

주점을 다시 둘러보니, 벽면의 선반에는 마셔버린 술병이 전시되어 있고, 빈 벽에 술 상표도 붙어있다. 그가 서 있는 바의 뒷벽에는 술 관련 자격증이 선거 벽보 크기로 걸려있다. 두건을 두르고 앞치마를 세련되게 엉치뼈에 두른 그가 다시 다른 탁자로 옮겨가서 속사포처럼 술 이야기를 쏟아낸다. 

술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그가 파는 술이 일본술이라는 것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는 일본술을 알기 위해 일본을 수시로 여행한다. 그는 소비자를 키운다. 아주 위태롭게 소비자를 가르치기도 하지만, 소비자를 성장시킨다. 그래서 전혀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는 땅으로 소비자를 옮겨놓는다.

술을 잘 이해하는 방법 넷, 함께 술을 맛보기.
 술을 잘 이해하는 방법 넷, 함께 술을 맛보기.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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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소비자는 새로운 맛을 즐기면서 새로운 세상을 본다. 소비자는 그 전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 전이 비루하고, 지금이 흥미롭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맛의 세계에서는 후퇴란 없다. 한번 궤도에 올라선 미식가는 그 미식의 연주를 즐기려 하고, 그 환청을 들으려 한다. 한 끼의 식사, 한 잔의 술이 최선 아니면 최적의 선택이기를 바란다. 그 과정에서 특별한 술, 차별화된 술, 자기 취향에 맞는 술을 찾는 힘도 갖게 된다.  

그런 소비자가 있어야 개성 있고 차별화된 술을 구매하는 시장이 열린다. 무감미료 막걸리나 국내산 좋은 쌀로 빚는 막걸리,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지는 수제 전통술들을 찾는 소비자들도 생겨난다. 그러지 않으면 대량생산되는 값싸고 달달한 술들만 판을 친다. 

그처럼 "술을 좀 아신교?" 하면서 술을 파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무림의 고수처럼 술의 매력을 정신없이 퍼뜨리면서 술을 파는 사람을 어떻게 키워낼 수 있을까? 좋은 판매인은 소비자를 성장시킨다. 새로운 상품의 권유는 또 하나의 선물이라야 한다. 우리 술을 놓고 선물처럼 팔 수 있는 사람을 어떻게 키워낼 수 있을까? 그런 능력을 지닌 술 해설사를 만들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낯선 도시, 처음 가본 괴상한 주점에서 한참 동안 그런 생각을 했다.


태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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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평론가, 여행작가. 술을 통해서 문화와 역사와 사람을 만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술문화연구소 소장이며 막걸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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