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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태로 진행되면 우리 지역의 황폐화는 피할 수 없는 수순입니다."
"대체산업 육성 없이 무조건 폐광하면 지역경제는 몰락합니다."



지시봉을 잡고 발표하는 아이들 입에서 낯선 언어가 튀어나왔다. 뉴스에 나온 문장을 그대로 옮긴듯한 날 선 표현이 솜털 보송보송한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발표를 듣고 있던 다른 학생들이 이해한다는 듯 끄덕였다. 고개가 갸우뚱해질 풍경이었다. 교과서 지문 읽다가도 몇 번씩 단어 뜻을 설명해줘야 하는 친구들이었다. 일주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시작은 교과서였다. 초등학교 4학년 사회 2단원 중 '우리 지역의 도시 문제 조사' 활동이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었다. 벽지학교로 분류되어 있는 촌락 지역에서 도시 문제를 조사하라니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교사용 지도서를 펼쳐보니 우리나라 인구의 90% 정도가 도시에 살고 있기 때문에 도시 문제를 찾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고 적혀있었다. 그럼 나머지 10%는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아이들에게 물었다.


"도계는 다른 도시들처럼 주택문제, 교통문제가 심각하지 않아요. 여러분은 뭘 조사할 건가요?"
"폐광이요! 아빠 말로는 옛날에 여기 도시였다는데요?"




'도시 문제'만 다룬 편협한 교과서... 아이들이 낫다


 
도계역. 과거 이 철길을 따라, 석탄과 시멘트를 싣은 화물열차들이 무수히 다녔다.
 도계역. 과거 이 철길을 따라, 석탄과 시멘트를 싣은 화물열차들이 무수히 다녔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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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싶었다. 성호의 당찬 음성에는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있었다. 지금은 인구 1만2천여 명의 작은 읍이지만 1980년대 중반만 해도 5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도계에 살았다. 동네 강아지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지난날의 영광은 사라졌지만 사람들 가슴속에는 여전히 잘 나가던 시절의 향수가 남아있었다. 그러던 중 대한석탄공사 폐지 보도가 터진 것이었다.


6개의 모둠이 모두 만장일치로 폐광 이슈를 지역의 '도시 문제'로 선택하였다. 여긴 미칠 듯한 전셋값 폭등이나 숨 막히는 출퇴근길 같은 현상은 없다. 다만 과거 도시였던 지역이 현재 촌락으로 위세가 줄어들었고, 그나마 남은 삶의 터전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으니 진짜 '도시 생존 문제'라고 볼 수 있었다.


"동균이는 인터뷰하고, 주민이는 글씨 쓰고, 인정이는 사진 찍는 게 어때?"
"우리 큰 아빠가 석공(대한석탄공사)에  있어. 내가 갔다 올게."



조사 기간은 7일. 아이들은 스스로 역할을 나눠 흩어지고, 모이고, 정리하고를 반복했다. 발표 당일, 전지(A1 사이즈의 종이)에다 조사한 내용을 기록한 학생들의 표정이 진지했다. 모둠별로 제출한 스마트폰에는 인터뷰 음성 파일이 담겨 있었다. 컴퓨터에 모아보니 11개나 되었다. 발표는 예상보다 훨씬 훌륭했다. 글씨는 못생기고, 자료 배치는 어설펐지만 설명이 귀에 잘 들어왔다. 결정적으로 대본이 발표자의 손에 없었다. 그건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는 증거였다.


학교에서 아이들 발표를 시켜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어디서 대충 긁어온 자료인지 아니면 내용을 잘 흡수해서 자기 언어로 풀어내고 있는지 말이다. 헷갈릴 때는 질문을 몇 가지 던지면 되는데 이 날은 교사가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머지 학생들이 알아서 날카롭게 지적했기 때문이다.


"석탄공사가 폐지되면 우리 지역 말고 다른 지역에는 어떤 문제가 생기나요?"
"폐광을 막기 위하여 초등학생들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나요? "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성심껏 대답하는 모습에 솔직히 놀랐다. 말하는 모양새가 단편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형태 그 이상이었다. 지역을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절실함이 담겨있었다. 질문자들도 상대 모둠의 허점을 파고들기보다 조사하면서 해결되지 않은 의문점에 집중했다. 교실에서 교사가 강의식으로 가르쳤다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장면이었다.


'도대체 뭘까? 조사 프로젝트 여러 번 했었는데 그 때는 별로였는데. 갑자기 이렇게 잘할 수 있나?'


약간의 놀라움과 의구심을 품고 있던 차에 인터뷰 음성 파일을 재생할 차례가 되었다. 11개의 인터뷰를 하나씩 들어보았다. 석탄회관 앞 편의점 할머니, 천일약국 약사 아주머니, 고려명과에 빵 사러 온 아저씨, 우체국 직원... 앳된 초등학생의 목소리와 마을 사람들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광산이 문을 닫으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억울한 일이 생기지. 산업 전사라는 말을 들으면서 막장에 들어갔는데 지금 와서 나가라니까."
"적자 때문에 석공을 폐쇄하는데 방법이 없을까요?"
"그럼 다른 일자리를 가질 수 있게 대체 산업을 마련해야지."



인터뷰 파일 하나마다 평균 재생시간 1분 30초. 어리다고만 여겼던 녀석들이 삼삼오오 스마트폰을 들고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고 하니 새삼 대견스러웠다. 또 공무원, 노조 활동가, 주부, 자영업자 등 다양한 직군을 취재하였기에 여러 입장을 비교하여 들을 수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대부분 폐광에 반대하는 분들이었지만 찬성 입장에 선 아저씨 한 분도 있어 흥미로웠다.


'이리 멋지게 해낼 줄 알았다면, 평소에 더 자주 학교 밖으로 내보낼걸.'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은 학생들에게 수고한다며 손에 주스와 과자를 쥐어주시기도 하였다. 인터뷰 내용을 편집하고 조리 있게 안내하는 아이들의 아담한 뒷모습이 문득 커 보였다. 또 학급에서 유일하게 폐광에 찬성하는 원혁이가 소신껏 주장을 피력할 때도 청중들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을 뿐, 야유나 폭력적 언사가 쏟아지지 않았다. 조마조마하게 마음 졸인 건 소심한 담임 혼자였다.


선거하고 투표하는 아이들, 학교는 민주시민이 되는 기본 과정을 경험하는 곳이다.



교과 진도는 밀렸지만, 후회는 없다


 
선거하고 투표하는 아이들, 학교는 민주시민이 되는 기본 과정을 경험하는 곳이다
 선거하고 투표하는 아이들, 학교는 민주시민이 되는 기본 과정을 경험하는 곳이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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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동안 '도계 폐광' 프로젝트를 수행하느라 사회 교과 진도가 조금 밀렸다. 그럼에도 학생과 교사가 모두 만족한 활동이었기에 후회는 없었다. 아이들이 거리와 상점, 기차역과 식당에서 배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부끄럽게 고백하자면 나이가 적다고, 나중에 알아서 차차 알게 될 거라고 애써 교육활동에서 경시해왔던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과 권리 아니었을까?


너무 당연해서 자주 잊고 사는 대한민국 헌법 1조는 말한다.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국민은 평등권, 자유권, 참정권 등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공기처럼 누리는 '주권재민'의 사상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독립운동, 4.19, 5.18... 우리는 모두 자유와 인권을 위하여 싸운 사람들의 피와 땀에 빚지고 있다.


우리 반 학부모들이 포함된 '대한석탄공사 폐광 저지를 위한 범시민비상대책위'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가두행진을 할 수 있는 것도, 주민들이 정부 결정에 반대하는 현수막을 도로 곳곳에 설치할 수 있는 것도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도 국민이다. 어린이들이 주권자임을 강하게 인식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 누구에게도 불합리한 이유로 주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지닐 수 있도록 북돋아주고, 자신의 주권을 실현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가르쳐주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책을 외우고, 시험지를 푸는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다. 직접 경험하게 해야 한다.


정부는 2021년까지 석탄공사를 단계적으로 구조조정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탄광의 작업 규모는 줄어들고, 언젠가는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른다. 고향을 떠나거나, 부모님이 직장을 잃을 위기에 처하면 아이들이 꼭 기억해주길 바란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으며, "국가와 민족의 영광을 위해" 희생되어야 함은 더욱 아님을. 다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니고 행복을 추구할 소중한 존재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태그:#대한석탄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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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사입니다. <선생님의 보글보글> (2021 청소년 교양도서)을 썼습니다.

'좋은 사람'이 '좋은 기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에디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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