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엄마는 손이 열 개였다. 식당 일을 마치고 고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산더미 같은 집안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이면 도시락을 싸놓고 잠시 졸고 있는 당신을 두고 살그머니 집을 나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편과 두 아들은 리모컨 버튼을 누르듯 당신을 찾아댔고, 고질적인 관절염은 그때부터 서서히 발현을 준비했을 것이다.

적당히 철이 들 무렵,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치우친 가사노동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스스로 밥을 차려 먹고, 많지 않은 빨래는 세탁기를 거쳐 건조대에 널었으며, 주말이면 으레 청소기를 돌렸다. 어쩌면 그때부터 집안일에 대한 나의 숨겨진 능력이 계발됐는지 모른다.

이번 '남자의 취미' 주제는 바로 집안일이다. 집안일이 과연 취미가 될 수 있는가? 더구나 맞벌이가 대세인 요즘 어느 정도의 가사분담은 필수 아닌가? 그렇다. 집안일은 취미라기보다 노동 혹은 과제로 여겨질 수 있으며, 이미 여러분들은 그러한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니 이왕 할 바에야 취미라고 생각하고 즐겨보자는 말이다.

행여나 아내가 전업주부라고 여전히 손 하나 까딱 안하는 시대착오적인 분들이 계시다면 이 글을 읽고 나서 발상을 전환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얼마 전 영국의 한 보험회사에서 직업 만족도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다. 결과는 의외로 전업주부가 1위를 차지했다. 어디까지나 영국 이야기다. 우리나라 전업주부들은 과연 행복할까? 남편이 몇 가지라도 도움을 준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집안일에 대해 논해보자. 4대 집안일이라 하면 청소, 빨래, 요리, 설거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세부적으로 따져본다면 재활용 쓰레기 분리나 도어록 배터리 교환까지 한도 끝도 없을 테지만, 조금만 노력하고 크게 생색낼 수 있는 대표적 집안일은 위의 네 가지다. 이중 자신의 성격에 부합하는 주 종목을 한두 가지 정도 고른다. 필자의 경우는 요리와 빨래를 택했다.

먼저, 요리에 관하여. 지금이야 텔레비전만 틀면 나오는 게 먹방이고 인터넷 검색만 하면 넘치는 것이 레시피므로, 약간의 관심과 노력만 있다면 누구나 손쉽게 요리를 할 수 있는 세상이다. 내가 요리를 시작한 15년 전만 해도, 요리할 줄 아는 남자는 소개팅이나 맞선자리에서 50점 먹고 들어가는 시대였다.

집으로 초대해 크림소스 파스타 정도 가볍게 만들어낸다면 비호감도 급호감으로 돌릴 만큼 작업에 있어서 요리는 정석이었고, 훌륭한 수단이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밥맛이 없는 아이들에게 자주 만들어주는 아침식사
▲ 아이들 아침용 소세지 초밥 아침에 눈뜨자마자 밥맛이 없는 아이들에게 자주 만들어주는 아침식사
ⓒ 이정혁

관련사진보기


아이들 아침을 위해서도, 아침밥 못 먹고 출근하는 직원들을 위해서도 만들어보는 자칭 황제 주먹밥. 밥을 제외하고 들어가는 재료만 열가지나 되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 황제 주먹밥 아이들 아침을 위해서도, 아침밥 못 먹고 출근하는 직원들을 위해서도 만들어보는 자칭 황제 주먹밥. 밥을 제외하고 들어가는 재료만 열가지나 되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 이정혁

관련사진보기


그렇다고 작업의 수단으로 요리를 시작한 건 절대 아니다. 군복무를 대체하기 위해 배치된 지역이 하필 도서지역이었다. 사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라면으로 때우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날이 거듭될수록 집밥에 대한 갈망이 용솟음쳤다. 그래도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자그마한 식당을 운영하는 식당집 아들 아니었던가? 3년이면 개도 풍월을 읊는다는데, 환경은 잠재된 가능성을 계발시키는 법이다.

손쉬운 된장찌개, 김치찌개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물론, 그 중간 즈음에서 결혼을 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요리에 소질과 애정이 없는 아내가 가까스로 만들어낸 음식에다 찬사를 보내는 건, 양심이 존재하는 지성인에게 적지 않은 죄의식을 유발한다. 연애시절부터 내가 해준 요리에 입맛이 길들여진 아내를 탓할 수는 없었다. 작업 수단이 부메랑이 돼 나를 옥죄게 될 줄 그땐 몰랐던 것이다.

1만 시간의 법칙은 어디에든 적용된다. 직원들 사기 진작용으로 월요일 아침에 준비하는 황제 주먹밥(재료를 열 가지쯤 쏟아부은 주먹밥)부터, 아이들 아침 식사로 제격인 미니 김밥에다, 아내의 생일날 준비하는 오믈렛과 손님 대접용 아귀찜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어지간한 건 레시피 한 번 훑어보면 가능한 수준이 됐다.

일요일 저녁, 가족을 위해 무언가 특별한 메뉴를 준비하고 싶을 때는  마파두부밥이 제격이다. 아이들이 먹을 수 있게 고추가루를 최소량만 넣었다.
▲ 마파두부밥 일요일 저녁, 가족을 위해 무언가 특별한 메뉴를 준비하고 싶을 때는 마파두부밥이 제격이다. 아이들이 먹을 수 있게 고추가루를 최소량만 넣었다.
ⓒ 이정혁

관련사진보기


안주가 필요하다고 아내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10분이면 뚝딱 만들어내는 술안주용 낙지 볶음.
▲ 술안주용 낙지볶음 안주가 필요하다고 아내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10분이면 뚝딱 만들어내는 술안주용 낙지 볶음.
ⓒ 이정혁

관련사진보기


큰 아이 유치원 졸업식... '아빠 감사합니다' 인사에 눈물 '울컥'

요리하는 남편 혹은 아빠로써 가슴 뿌듯했던 기억 하나를 소개한다. 큰 아이 유치원 졸업식 때 부모님께 쓴 감사 상장을 주는 순서가 있었다. 대부분 아이들이 '엄마 고맙습니다' 로 시작하는데, 우리 집 큰 아이는 '아빠, 맛있는 음식해주셔서 감사합니다'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간 피땀 흘리며 먹인 보람이 있구나'라는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질 뻔했었다.

사실 요리란 누군가 맛있게 먹어주길 기대하며 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도 아내와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나, 그 자체만으로 배가 부른 건 아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나르시스적인 요리사라고 할까? 내가 만든 음식이 제일 맛있는 거다. 한 끼를 먹더라도 국 끓이고 반찬 두어 가지를 만들어서 먹는 편이다 보니, 내가 먹으려고 요리를 하게 되고 그렇게 만든 걸 남이 맛있게 먹어주면 그저 고마운 정도인 것이다.

부엌이라는 곳이 처음에는 발 딛기 어색한 공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적응하다 보면 그만큼 편한 공간도 없다. 배고플 때, 출출할 때, 안주가 필요할 때, 눈치 보며 부탁할 필요 없이 냉장고를 뒤적이면 속을 채워줄 무언가를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 식사준비를 할 정도가 되면 가끔씩 치는 사고(예를 들면, 술 마시고 새벽에 들어가 신발장 앞에서 잠드는 것 같은 사소한) 정도는 아내가 눈감아 주게 된다.

다음으로 빨래에 관하여.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집안일은 실제로 요리가 아닌 빨래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빨래를 털어 널던 향수가 있어서인지, 빨래를 하게 되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토요일 오전, 아내를 출근시켜놓고, 햇살이 비치는 거실에서 빨래를 널고 있노라면 영혼까지 맑아지는 느낌이다. 음악을 들으며 커피 한잔까지 더한다면 영락없는 낙원이다.

요리할 때와 먹을 때 두 방면에서 동시에 즐거움을 얻는다면, 빨래는 널 때와 갤 때 시간차를 두고 즐겁다. 탈수 후 구겨진 빨래를 팡팡 털어서 건조대에 가지런히 널 때의 심정은 내 안에 정리되지 않은 잡념과 생각들을 질서 있게 정리하는 기분이다. 가공된 향이기는 하지만 집안 구석 은은히 퍼져나가는 섬유유연제의 향기는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빨래를 탈탈 털어 널어놓고 나면 기분까지 상쾌해진다. 집안일에 손도 안대본 초보자에게 추천하는 분야다.
▲ 건조대 위의 빨래들 빨래를 탈탈 털어 널어놓고 나면 기분까지 상쾌해진다. 집안일에 손도 안대본 초보자에게 추천하는 분야다.
ⓒ 이정혁

관련사진보기


그렇게 널어둔 빨래가 적당한 햇살과 소소한 바람에 고실하게 마르고 나면 그것을 개키는 작업 또한 매력적이다. 햇볕에 말랐다기보다 햇살을 품은, 바람에 건조된 것보다 바람의 기억을 간직한 빨래를 차곡차곡 정리하다 보면 곳간에 음식을 쌓아두는 것처럼 든든한 기분이 든다. 면 소재의 빨래를 갤 때의 보송한 감촉과 거기서 자연스레 풍겨 나오는 특유의 맑은 향기를 눈감고 느껴볼 수 있는 여유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다.

이상으로 집안 일 중 요리와 빨래가 주는 묘미를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40여 년 삶을 살아오며 내린 결론은 집안일은 정해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해야 하고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피곤한 아내보다 먼저, 바쁜 아이들보다 한 발 앞서 집안일을 시작해보자. 예상보다 빨리 가정의 평화를 이룩할 것이다.

아빠가 해 준 아침을 먹고 등교하고 주말이면 아빠의 특별 요리를 기다리며 아빠가 빨아준 옷을 입고 뛰노는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안정이 될 수밖에 없다. 몇 개월간 기본기를 다져야 한다거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한 일도 아니고, 딱 하나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니 오늘 당장이라도 시작해보기 바란다. 나는 오늘도 전업주부를 꿈꾸며 벅찬 행복에 빠진다.

덧붙이는 글 | 위의 글은 영남일보 6월 24일자 위클리포유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태그:#전업주부
댓글9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