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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중심부의 유적 포룸 로마눔. 포룸은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광장이다. ⓒ 장호철
넷째 날 밤, 우리는 로마 외곽의 낡은 호텔에서 묵었다. 유럽에 머무는 동안 아내는 늘 어두운 실내를 못 견뎌했다. 대낮에도 들어가는 방마다 등부터 켜고 보는 사람이니 침침한 조명은 곤욕 자체였던 것이다. 게다가 욕실의 거울은 또 왜 그렇게 높게 달려 있었는지...

로마, 제국의 영광과 쇠락

이튿날 아침, 우리는 로마(Roma)로 향했다. 로마는 현 시점에선 이탈리아의 수도에 지나지 않지만 세계사의 맥락 속에서 그 의미는 매우 중층적이다. 로마는 로마제국의 수도이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심지로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럽에서 로마를 '세계의 머리', '영원한 도시'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팍스로마나(Pax Romana)'를 구가했던 제국(帝國)의 영광 시대를 기준으로 로마를 이해한다. 그것은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한다'나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고 하는 따위의 로마 관련 격언이 이 땅에서도 자연스럽게 통하는 것으로 맥을 잇고 있다.

학창시절에 '세계사'를 배우긴 했지만 타국의 역사를 일관되게 꿰는 건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유럽이 오늘날의 판도로 재편되기까지 복잡한 왕가들의 계보 따위에 지레 질려 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에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지극히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시저'로 더 잘 알려진 카이사르, '폭군' 네로, 기독교 박해와 지하묘지 카타콤(Catacomb), 콜로세움과 검투사 따위가 로마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이다. 물론 후기 스토아학파 철학자 세네카, 정치가 키케로,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왕녀 클레오파트라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들 이미지들은 시대 구분 없이 우리의 기억 속에 혼재하고 있다.

전설은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테베레강 동쪽의 팔라티노 언덕 위에 로마를 건설한 것이 기원전(B.C) 753년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팔라티노 언덕에서 B.C 8세기부터 시작되는 철기 시대 유적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보면 로마는 전설보다 더 오래된 도시다. 

건국 이후 왕정 체제로 이어지던 로마는 기원전 509년에 왕정이 끝나고 이후 450년간 공화정 체제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그 후 로마는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B.C 264~B.C 146)과 마케도니아 전쟁에 승리하며 지중해의 패자로 등장한다.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코끼리 군단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을 꺾은 전쟁이 바로 포에니 전쟁이다.

이후 권력투쟁기를 거쳐 갈리아 전쟁과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을 승리로 이끈 카이사르(B.C 100~A.D 44)가 종신 독재관으로 권력을 장악한다. 그러나 그는 공화파(그 유명한 '브루투스'도 포함)에게 암살당하고 기원전 31년 마침내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칭호를 얻어 로마제국 시대를 연다. '폭군' 네로(37~68)는 바로 이 왕조의 제5대 황제다.

로마의 황금기인 오현제(五賢帝) 시대(96~180)와 팍스로마나(로마의 평화,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을 최소화하면서 오랜 평화를 누렸던 시기) 시대(B.C 27~180)를 거치며 로마는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누렸다. 제국의 영토는 최대였고, 이 시기 로마는 인구 100여만 명으로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서기 235년 이후, 로마 제국은 40여 년간 20여 명의 황제가 암살되는 혼란의 시기를 거치며 쇠망의 길로 들어선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사두(四頭) 정치로 제국의 위기를 막으려 했으나 쇠락의 추세를 멈추지 못했다.

그동안 박해 받아온 기독교가 공인된 것은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내리면서다. 330년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한 비잔티움(현 이스탄불)으로 천도한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갈라진 것은 395년, 서로마제국이 게르만 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한 것은 476년이었다.

로마, 현존하는 유럽의 역사 도시
‘모든 신을 위한 신전’ 판테온(Pantheon). 소석회 반죽과 화산의 부석(浮石), 주먹 크기의 돌들로 만들어진 콘크리트 돔의 중량은 자그마치 4,535톤에 이른다. ⓒ 장호철
15세기 중반 이후, 교황령의 수도로 로마는 다시 번창해져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교황의 치세 가운데 성벽 개수, 궁전 건설, 교회 수복 공사 등이 이루어지면서 로마는 유명 예술가나 건축가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15세기 말의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등이 교황을 위해 예술 활동에 전념한 대표적 예술가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로마는 급격히 성장하여, 밀라노를 제치고 이탈리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행정수도이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본산인 로마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 시국(市國)을 품고 있는 로마는 유럽을 대표하는 관광도시가 되었다. 로마는 도시 자체로도 현존하는 유럽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 바티칸 관광을 마친 뒤에 우리는 이른바 '벤츠 투어'를 시작했다. 세 시간쯤 걸린 벤츠 투어는 벤츠 승합차를 타고 로마의 유적지를 도는 상품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하면 많은 곳을 들르다 보니 이 투어는 '수박 겉핥기'에 가까웠다. 어쨌든 보고들은 것을 명념하고 그 속내를 챙기는 것은 전적으로 여행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벤츠 투어로 만난 첫 유적이 '모든 신을 위한 신전' 판테온(Pantheon)이었다. 최초의 판테온은 기원전 27년 아그리파가 건립하여 신에게 바쳤지만 서기 80년의 로마대화재(네로가 시를 읊은 배경이 되었다는 그 화재)로 불타 없어졌다. 현존하는 판테온은 서기 125년경에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중에 세워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76~138)는 동방을 널리 여행했으며, 그리스 문화에 경도된 국제적인 감각의 통치자였다. 그는 모든 신에게 바칠 신전으로 판테온을 건립했으며, 이는 로마제국 안에 로마의 신들을 믿지 않거나 다른 이름으로 로마의 신들을 섬기는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판테온, 혹은 2천 년의 시간

판테온의 돔은 천 년도 뒤인 1436년 피렌체 대성당(두오모)이 완공될 때까지 이탈리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었다. 소석회 반죽과 인근 화산에서 가져온 가벼운 부석(浮石), 주먹 크기의 돌들로 만들어진 콘크리트 돔의 중량은 자그마치 4535톤에 이른다. 판테온의 돔과 열주(列柱, 기둥) 양식은 르네상스 건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판테온이, 중세 초기에 많은 고대 로마 건물들이 겪은 파괴와 약탈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은 7세기 이후부터 이 신전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래로 판테온은 무덤으로 사용되어 라파엘로를 비롯한 유명 화가, 작곡가, 건축가들이 묻히기도 했다.

판테온은 그 규모가 사람을 압도한다. 이 거대한 건물이 거의 2천 년 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가늠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다. 2천 년이라는 시간의 무게 앞에 백 년을 사는 것도 쉽지 않은 인간 존재의 한계는 참으로 덧없는 것이다.

내부로 들어서면 전개되는 화려하다 못해 현란한 장식과 기둥들, 그림과 조각 등이 연출하는 실내 경관도 경이롭다. 원형의 천장 한가운데 뚫린 돔의 구멍에서 쏟아져 내리는 한 줄기 빛은 판테온이 빚어내는 신비로운 공간감의 절정을 이룬다.
천정 한가운데 뚫린 돔의 구멍에서 쏟아져 내리는 한 줄기 빛은 판테온이 빚어내는 신비로운 공간감의 절정을 이룬다. ⓒ 장호철
판테온 신전 앞 로톤다 광장엔 이집트에서 옮겨온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다. ⓒ 장호철
판테온 앞의 로톤다 광장엔 신전 앞 광장을 장식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옮겨온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었다. 오벨리스크 기단부의 조각상에서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광장 주변의 노천카페엔 관광객들이 <로마의 휴일>(1953)의 오드리 헵번처럼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다음으로 만난 유적은 '진실의 입'으로 유명한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뒤에 있는 치르코 마시모(Circo Massimo, '대형 경기장, 광장'의 뜻, 라틴어로는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였다. 기원전 600년께 목재로 지은, 고대 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전차 경기장이었다는 거대한 타원형 광장엔 햇살이 따가웠다.

전차 경기장, 빵과 서커스

원래 이탈리아 중부의 고대 왕국 에트루리아(Etruria)의 왕들이 경기와 오락을 위해 지은 이 경기장은 기원전 50년께 카이사르가 약 2만 7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다시 지었다. 그 후 25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도록 확장되었으며 서기 549년에 마지막 전차 경기가 벌어졌다고 한다.

굽은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언덕 아래 펼쳐진 경기장에선 로마 시민들을 위무하기 위하여 1인승 2륜 또는 4륜 전차 경기가 벌어졌다. 야트막한 언덕과 계단 쪽이 객석이었는데, 거기 앉아서 로마 시민들은 손에 땀을 쥐고 목숨을 건 질주를 벌이는 전사들에게 열광하였을 것이다. 

기원전 50년에 이 경기장은 로마 시민 2만 7천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2천 년 후, 서울 잠실야구장의 수용 인원은 2만 6천이다.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의 수용인원은 10만 명, 그런데 마시모는 25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로마제국은 왜 시민들을 위한 오락 시설을 이토록 거대한 규모로 건설했을까.

로마 황제들은 마시모의 시설을 확장하거나 더 화려하고 웅장하게 장식하는 데 애썼다. 이들은 화려하고 박진감 넘치는 전차 경기라는 볼거리를 제공함으로써 국정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호도했다. 또 이를 황제 숭배 및 절대군주제를 강화하는 정치적 수단, 즉 우민화 정책으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전차 경기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 황제는 시민들에게 화려하고 박진감 넘치는 전차 경기라는 볼거리를 제공함으로써 국정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호도했다. ⓒ 장호철
대중을 지배하고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전차 경기는 매우 유효한 수단이었다. 황제들은 전차 경기를 통하여 정세나 민심을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경기를 후원하였다. 더 커지고 화려해진 전차경기장은 이들 황제들의 욕망의 표지이기도 했다.

매월 무상으로 지급받는 밀로 먹거리를 해결하고 전차 경기장이나 콜로세움에 무료입장하여 각종 축제와 공연을 즐기는 것은 로마시민의 특권이었다. 로마의 축제일 수는 카이사르 때는 연간 56일이었지만 오현제시대에는 120일,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던 5세기쯤에는 175일에 이르렀다.

결국 로마 시민들은 1년의 절반을 키르쿠스(circus, '서커스Circuses'의 어원)를 즐기면서 쉰 셈이었다. 그러나 대신 그들은 지배계급의 의도대로 비판의식이 마비된 채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기원전 1세기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Juvenalis, 55~140)는 자신의 권리를 물질과 향락으로 바꾼 로마인들을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 56~117)가 <연대기>에서 지적한 것도 다르지 않았다.

"레무스(로마를 건국한 로물로스의 동생)의 타락한 자식들 무리!... 이 전락한 백성은 타는 목마름으로 세상에서 단 두 가지만 희망하게 되었으니 빵과 키르쿠스다." - 유베날리스, <풍자시> 중에서

"아우구스투스는 먼저 하사금으로 군대를, 염가의 곡식으로 민중을, 또 평화의 즐거움으로 세계를 만족시키고 나서 조금씩 득세하기 시작하여 한 몸에 원로원과 장관과 입법부의 직능을 모았다. 반대파는 하나도 없었다. 가장 용감한 사람들은 전장에서 쓰러졌거나 공공의 적으로 분류되어 목숨을 잃었다." - 타키투스, <연대기> 중에서

경기장 건너편의 구릉지가 로마신화에서 로물루스 형제가 늑대와 함께 발견된 팔라티노(Palatino) 언덕이다. 로마의 기원인 이 신성한 언덕은 권력과 부를 가진 지배계급의 주거지였고 뒤에 아우구스투스 이래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네로 등 황제들의 궁전(Palazzo)이 지어졌다.
로마의 기원인 팔라티노(Palatino) 언덕은 권력과 부를 가진 지배계급의 주거지였고 로마 멸망 후 약탈의 표적이 되면서 오늘날의 폐허로 남았다. ⓒ 위키백과
이 언덕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콜로세움, 상업과 물류의 중심지이며 가축시장이었던 보아리움(Boarium) 포룸, 전차 경기장, 행정 중심지 포룸 로마눔(포로 로마노)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전차 경기장에서 바라보는 팔라티노에는 과거의 영화 대신 넓은 정원과 허물어진 건축물의 잔해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었다. 로마 멸망 이후, 황제와 귀족들의 궁전이 있었던 팔라티노는 약탈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팔라티노 언덕의 폐허만 보이지 않았다면 전차경기장은 어디 한국의 한적한 시골 공설 운동장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경기장 한복판에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오벨리스크를 세운 중앙분리대와 경기장을 에워싼 3층의 관중석이 있었던 때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경기장을 가로지르는 한 쌍의 남녀를 바라보면서 판테온에서 압도되었던 시간의 무게가 시나브로 눈앞에서 증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콜로세움, 시민을 위한 최고의 복지시설

마지막 여정은 팔라티노 언덕 너머 콜로세움(Colosseum)이었다. 로마와 로마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원형 경기장이 도시 외곽 지역에 있었던 것과 달리 콜로세움은 도시 중심부에 있었다. 이 경기장이 네로 황제가 지은 거대한 별장인 황금궁전의 인공호수를 메운 자리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은 건립 당시에도 76개의 출입구로 5만여 명의 관중이 빠르게 출입할 수 있었고 곳곳에 식수대가 마련되어 있는 완벽한 시설이었다. ⓒ 장호철
콜로세움이 세워질 때는 팍스로마나(Pax Romana)라고 불리는 로마 최고의 전성기였다. 1천 개가 넘는 공중목욕탕과 28개의 도서관, 수많은 신전과 대규모 원형 경기장 등 시민을 위한 공공시설이 넘쳐났고, 귀족과 부자들은 거대한 저택에서 호화 생활을 누리던 때였다.

콜로세움은 서기 70년 플라비우스 왕조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10년 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공하였다. 네로의 개인 공간을 공공시설로 바꾼 베스파시아누스의 정치적 의도는 분명했다. 그는 콜로세움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로마 시민의 통합을 꾀하고자 했다.

직경의 긴 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의 타원형, 외벽은 높이 48m의 4층 구조인 콜로세움은 건립 당시에 이미 수용인원이나 편의시설 등에서 완벽한 시설이었다. 76개의 출입구로 5만여 명의 관중이 빠르게 출입할 수 있었으며, 내부에도 곳곳에 식수대가 설치되어 있어 오늘날의 스타디움과 비겨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원형 경기장은 전차 경기장과 마찬가지로 시민들을 위해 세워진 로마의 대표적인 공공 건축물이었다. 콜로세움은 시민들에게 검투사 경기 같은 여흥을 제공하고 전쟁 포로와 제국의 반역자들을 공개 처형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경기장은 또한 해상 전투를 재현하거나 고전극을 상연하는 무대로도 사용되었다.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 포로들 가운데 뽑은 용맹한 전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검투사끼리 또는 맹수와의 목숨을 건 싸움은 관중들에게는 최고의 구경거리였다. 콜로세움에서 벌이는 경기나 의식은 결국 로마 시민으로서의 자부심과 일체감, 공동체 의식을 느끼게 해주는 매체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시민은 누구인가

최고의 통치자인 황제가 이처럼 여흥과 오락까지 제공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로마 시민은 누구였던가. 로마 시민은 특권층이 아닌, 로마를 구성하는 자유민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이었다. 로마 시민은 세금 납부 등의 책임뿐만 아니라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갖고 있었다. 이들 자유민들은 황제와 권력층을 움직일 수 있는 중요한 세력이었다.

그래서 국가와 황제는 각종 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하고 이들의 반응을 민감하게 살펴야 했다. 지배계급이 공공 조형물과 건축물 건립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로마 사회에서 시민이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콜로세움은 그런 점에서 통치자와 피치자의 욕망이 만나는 공간이었다. 황제는 콜로세움을 시민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해 자극적인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시민들에게 알렸다. 또 시민들은 원형 경기장에서 열리는 다채로운 경기나 의식을 통하여 잠재된 욕망을 대리 충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콜로세움의 내부. 콜로세움은 시민들에게 검투사 경기라는 여흥을 제공하고 전쟁 포로와 제국의 반역자들을 공개 처형하는 장소로 활용되었고 해상 전투를 재현하거나 고전극을 상연하는 무대로도 사용되었다. ⓒ 위키백과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2000)의 한 장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콤모두스 황제 통치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검투사 영화다. ⓒ 유니버설 스튜디오
그런 뜻에서 콜로세움은 시민들을 위한 최고의 복지시설이었다. 이 경기장에 한꺼번에 최대 5만 명이 입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 뜻하는 바는 적지 않다. 제국의 영토를 최대 판도로 넓힌 트라야누스 황제 재위(98~117) 시기의 로마 인구는 100만이었다. 이는 산술적으로 보면 모든 로마시민들이 한 차례씩 콜로세움에서 경기를 즐기는 데 20일로 충분했다는 뜻이다.

콜로세움의 관람석은 계급에 따라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시민과 노예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는 것보다는 시민과 노예, 도시 빈민들도 무료로 콜로세움에 입장해 경기를 즐길 수 있었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더 안락하게 자신의 저택에서 경기를 벌일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황제나 귀족들은 굳이 시민, 노예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공연을 즐겼다.

이는 콜로세움이 시민 복지를 위한 공공시설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동시에 신분의 차이를 넘어 황제와 노예가 같은 공간에서 여흥을 즐기는 구조가 최하층의 로마 시민에게도 자긍심과 소속감을 느끼도록 해 주는 장치였다는 사실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608년까지 경기장으로 사용되었던 콜로세움은 중세에는 군사적 요새로 이용되었다. 그 이후 이 거대한  경기장의 돌과 부재(部材)는 교회나 다른 건축물을 짓는 데 필요한 자재로 뜯겨나갔다. 한때 로마의 영광과 로마 시민의 자부심이었던 콜로세움이 오늘날과 같이 황폐한 모습으로 남은 이유다.

시민들이 누린 여흥의 피비린내와 로마의 쇠락

콜로세움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나는 맞은 편 언덕에 오르거나 주위를 빙 돌면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따가운 햇살에 겉옷을 벗었는데도 땀이 배어났다. 콜로세움 앞쪽의, 312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서로마 통일을 기념해 세웠다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앞의 화단 턱에 앉아서 아내와 잠깐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판테온도 그렇고... 우리야 구경을 잘 하지만 저렇게 엄청난 건물을 짓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땀을 흘렸을까? 누구유? 노예?"
"그렇겠지. 노예 말고도 전쟁 포로도 있었을 테고. 세계 최강의 로마제국이었으니 인부 조달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겠지..."
"그런데 천 년 만 년 갈 것 같이 저리 대단했던 로마제국은 왜 망했우?"
"글쎄, 제국의 시스템이 변화된 사회를 따라가지 못했겠지. 어느 나라 없이 망하는 데는 다 합당한 이유가 있으니까 말이야."    

대제국 로마가 멸망한 원인을 들여다보는 것은 한가한 여행자의 몫은 아니다. 비잔티움 제국(동로마)을 포함할 경우 무려 2천 년 동안 존속했던 대제국 로마가 멸망한 원인을 어찌 한 가지로 제시할 수 있을까. 그것은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 이유들이 종합적으로 맞물린 복합적인 문제였을 터였다.

그러나 전차 경기장이나 콜로세움 같은 공공시설에서 벌어진 전차·검투 경기를 통해서 로마 시민들이 누린 여흥의 피비린내도 그 멸망을 재촉하는 요소의 일부였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들 공공시설은 지배계급과 시민 대중들의 욕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체제의 유지에 이바지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콜로세움 앞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315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서로마 통일(312)을 기념하여 원로원이 건조하여 봉헌했다. ⓒ 장호철
콜로세움에서 제공된 갖가지 여흥은 당대 로마 사회가 맞닥뜨린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회피하고 쾌락을 추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후대로 갈수록 로마의 시민 대중은 폭력과 잔인함에 기울어지면서 도덕적 타락으로 치달았다. 그것은 미로처럼 생긴 벽과 기둥이 있었다는 콜로세움의 바닥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상승되면서 전개되었을 것이다.

어느새 해가 설핏 기울어져 있었다. 버스에 올라 내다보니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너머 콜로세움의 허물어진 벽이 보였다. 나는 콜로세움 완공 후 100여 일 동안의 경기에서 희생되었다는 9천여 마리의 야생동물과 2천여 명의 검투사의 비명을 덮었을 시민들의 함성을 떠올려 보고 있었다.
태그:#로마, #판테온, #콜로세움, #전차 경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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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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