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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최남단 강정마을을 처음 찾은 것이 2011년 봄이었다. 벌써 5년이 되었다.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는 너럭바위 구럼비 해변은 내게 겨우 딱 한 번씩의 봄과 여름만을 허락했다. 그 짧은 기간에 난 강정 앞바다에서 짭조름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커피를 마셨고, 온종일 태양을 받아 따뜻해진 구럼비 바위에 누워 하늘을 봤으며, 중덕사 평상에서 파도 소리 들으며 잠들고 깨기를 반복하며 아침을 맞았다.

수시로 제주를 오가면서 이미 오랫동안 제주해군기지반대 투쟁에 전념해왔던 강정주민들과 제주시민사회의 단단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정현 신부님이 제주 강정으로 아예 이주를 해서 해군기지 건설반대 평화활동을 시작했을때, 나는,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 싸움에서 비켜설 수 없을 것이라는 것도 예감 할 수 있었다.

강정을 다섯 번쯤 방문했을 때, 우리는 강정에서 대규모 평화콘서트를 열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한진 희망버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평화콘서트로 향하는 강정 '평화비행기'를 띄우기로 했다. 한 항공사의 항공편 한 회차를 통째로 빌리는 계약을 맺자마자 난 적금을 깨서 계약금 500만 원을 입금했다. 분명 방해 공작이 있을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본격적으로 평화비행기 탑승객을 모으고 언론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항공사 담당자에게서 바로 연락이 왔다. 당연히 계약을 해지하자는 요청이었고 여러 기관에서 계약을 파기하라는 압력이 계속 들어온다는 직원들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물러서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계획대로 모든 준비가 되고 있었고 비행기 한 대가 다 차서 바로 10분 뒤 출발하는 새로운 항공편의 자리도 빠르게 채워가고 있었다. 나는 준비를 위해 일주일 넘게 강정에 머물고 있었고 육지에서 속속 제주로 모이는 사람들의 소식을 들으며 설레고 있었다.

2011년 9월 2일, 평화비행기를 띄우기 전 날... 

강정마을
 강정마을
ⓒ 김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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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콘서트 날은 2011년 9월 3일이었다. 그런데 비극은 바로 하루 전날 우리가 조금 방심하고 있을 때 시작됐다. 9월 2일 오전 5시 아직 동이트 기 전, 마을방송 스피커로 엄청난 소리의 싸이렌이 울려 퍼졌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새벽, 경찰이 구럼비 해변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인 중덕삼거리 통로를 막고 울타리를 치는 공사를 위해 쳐들어온 것이다.

이미 오랫동안 주민들과 활동가들은 그 삼거리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다. 매일 노숙을 했고 목에 사슬을 감고 결사항전의 마음으로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두 달 동안 준비한 평화비행기와 평화콘서트를 하루 앞둔 새벽, 우리는 군사작전을 하듯 쳐들어온 경찰들에게 순식간에 포위되었다. 모든 통로는 통제되었지만 주민들만 아는 샛길까지 육지에서 온 경찰들이 다 막지는 못했다. 우리는 꾸역꾸역 중덕삼거리로 모였고 동이트기 전부터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우리는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시고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방패와 군화로 무장한 공권력에 우리는 그냥 맨몸으로 맞설 수밖에는 없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이 포크레인 위로 올라갔고 평화활동가들은 공사 트럭 바퀴 앞으로 몸을 날려 막아섰다.

경찰은 점점 강력한 물리력으로 우리를 몰아붙였고 우리는 대부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결국 어이없게도 50여 명이 연행되고 순식간에 울타리가 쳐졌다. 그 날 이후 걸어서 구럼비로 가는 길은 모두 봉쇄되었다. 다음날 평화콘서트를 위해 육지와 제주 각지에서 강정으로 모여든 4천여 명의 참가자들은 결국 아무도 구럼비 너럭바위와 강정 앞바다를 보지 못했다. 결국 9월 2일 경찰과 몸싸움을 한 사람들이 구럼비 앞바다의 마지막 목격자들이 되고 말았다.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생물권 보존지역이 그냥 동네 앞바다인 평화로운 마을, 1Km 넘게 해변가를 따라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던 너럭바위 '구럼비'와 수백 년 동안 마을 주민들의 희노애락과 함께 했던 바위틈 용천수 '할망물'은 강정의 자랑이고 상징이었다. 천연기념물 442호 '연산호군락'이 바닷속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붉은발 말똥게'가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작은 마을, 은어가 살고 있는 서귀포시민들의 식수원 1급수 강정천이 흐르고, 제주 올레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7코스가 해변을 따라 지평선 너머로 이어지는 곳. 그런데 이렇게 아름답고 고요하며 제주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유명했던 '일강정'이, 이제는 해군기지의 마을이 되어 버렸다.

생명과 평화가 철저하게 무시된 곳, 민주주의와 인권이 처참하게 짓밟힌 곳, 국가공권력과 건설자본이 공모하여 거짓 안보를 내세우며 국민의 정당한 권리와 간절한 바람을 결국 꺾어 무너뜨린 곳, 강정은 이제 파괴의 상징처럼 피투성이가 되었다.  
    
강정마을 제주해군기지가 민주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주민들의 동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되어 왔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겨우 87명의 주민들이 조용히 모여 박수를 치며 해군기지 유치를 찬성했다는 주민투표의 결과가 유일한 근거인 이 초대형 국책사업은 정부와 해군 그리고 안보장사로 명맥을 유지해 온 수구 언론들의 합작품이었다. 강정마을 주민들은 제주 해군기지 건설의 시작부터 철저하게 무시되었고, 그 상처로 자존감마저 무너져 버렸다.

34억 4천여만 원의 구상권 청구, 말이 됩니까?

강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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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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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 동안 강정주민들과 평화활동가들은 참으로 집요하고 끈질긴 사법당국의 탄압을 집중적으로 받아왔다. 연행되고 소환되어 기소된 사람이 600명에 이르고 누적 벌금은 4억 원이 넘는다. 여기에 변호인 선임료, 교통비와 소송준비 등 각종 경비를 합치면 법률비용만 5억 원이 넘는 경제적 탄압을 받았다. 그동안 우리는 함께 싸웠으니 함께 책임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강정법률지원모금위원회를 출범시켜 그 무거운 책임을 나누어 짊어지려고 노력했다.

간간히 부당한 벌금을 납부할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진 분들은 벌금형을 노역형으로 환형하여 스스로 감옥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다행히 많은 분들의 정성으로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필요한 기금을 다 모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취지에서 오늘(6/4 토) 서울에서 열리는 강정후원주점도 기획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금을 조성하는 속도보다 몇 배쯤 빠르게 해군은 해군기지 완공을 재촉하였고 지난 2월 해군기지는 완공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군함이 입출항을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강정주민들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아내면서 해군기지 완공 이후 펼쳐갈 더 넓은 평화운동에 대한 고민, 10년간의 투쟁을 정리하고 정부의 잘못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는 작업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3월, 해군은 강정주민들과 평화활동가 116명과 강정마을회를 비롯한 5개 단체 등에 34억4829만3880원의 구상권을 청구했다. 공사 지연에 대한 대가로 국가가 삼성건설에 지불한 273억 원 중 일부인 34억 4천여만원은 121명의 잘못 때문이니 그 비용을 받아내겠다는 준비를 해왔던 것이다.
  
해군의 구상권 청구 소식을 들은 강정주민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당장 은행계좌에 들어있는 몇백만 원의 현금이라도 출금하여 따로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들이 오가기도 했다. 벌금 몇 백만원 때문에 수배자가 되어 제주공항을 나가다가 경찰에 잡힌 적은 있지만 국가가 나서서 국민에게 소송을 걸어 천문학적인 액수를 받아내겠다는 하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강정주민들은 굴복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싸우는 길을 선택했다. 10년의 싸움을 이렇게 마무리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예전에는 국가가 국민을 대상으로 이런 억지스러운 소송을 하는 일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서는 몇 번 이런 경우들이 있었다. 2009년 쌍용자동차 공장 옥쇄파업 강제진압 과정에서 생긴 경찰 헬기 등의 기물 파손과 경찰들의 치료비 등에 대해 경찰이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고. 지난해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포직사 공격을 받아 쓰러지신 민중총궐기날에 발생한 경찰의 피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경찰은 손해배상 청구를 강행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그 이후 7년을 거리에서 투쟁하며 살았고 28명의 동료와 그 가족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지만 국가나 자본은 그들에게 사과 한 번 하지 않았다. 백남기 농민이 쓰러져 사경을 헤맨 지 200일이 넘었지만 명백한 잘못을 한 경찰 누구도 책임을 지거나 처벌을 받지 않았다. 쫓겨나고 쓰러진 사람들에게는 사과조차 하지 않으면서 국민을 대상으로 돈으로 겁박하는 일을 망설이지 않았다.  

서울에서 다시 여는 강정후원주점

강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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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강정에 청구한 구상권과 제도나 형식은 다를지 모르겠지만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 국가가 추진하려는 일에 반대하며 지장을 초래한 사람들에게는 어떻게든 그 책임을 물어 앞으로 더 이상은 저항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가장 치졸하고 악랄한 방식의 엄포가 아닐 수 없다.

강정주민들과 평화활동가들에게 그 용어조차 생소한 '구상권'을 청구한 것은 단순히 34억 4천여만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해군의 구상권 청구는 해군기지 완공으로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한 공간에서 공존할 수밖에 없는 주민들과 해군들을 철전지 원수로 만들어 반목하고 싸우며 살게 만드는 일이다. 가뜩이나 주민들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해군기지 건설로 무너진 공동체의 자존감을 또 한번 짓밟는 잔혹한 처사다.

원희룡 도지사도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 철회를 공식적으로 요청했고, 제주에서 당선된 3명의 지역구 의원들은 물론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등 원내의 야 3당의 대표들도 정부의 구상권 청구를 강력하게 비판하며 강정마을의 편에 서줄 것을 약속한 것 등이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게 하는 장면이다.

구상권 청구를 확인하고 우리는 새로운 싸움을 다시 시작했다. 민변 회장을 지낸 김선수 변호사를 단장으로 한 20여 명의 변호인단도 벌써 꾸렸다. 국민들의 양심이 살아 있는 한, 사법부의 정의가 조금이라고 숨을 쉬고 있다면 국가공권력과 자본이 이미 부수어 버린 강정마을 주민들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짓밟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법정에서도 치열한 싸움을 펼쳐 나갈 것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미세먼지도 날아가고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전 마지막 황금연휴의 첫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슬픔이나 분노의 감정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가슴 아픈 일들이 줄기차게 이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직도 진행 중인 재판과 벌금탄압 그리고 구상권 청구에 맞서는 싸움을 위해 오늘 강정후원주점을 다시 연다. 특히 이번에는 강정주민들과 제주시민사회의 활동가들이 대서 상경한다.

세종호텔 노조위원장 고진수가 본인의 주특기를 살려 칼과 도마를 들고 달려와 주방을 책임진다. 쌍용자동차 노조 고동민 사무국장을 비롯한 쌍차 노동자들이 고된 몸을 이끌고 달려와 쟁반을 들고 밀양송전탑 반대대책위 이계삼 선생도 밀양의 특산물들을 짊어지고 기차를 탄다.

매번 마음을 모아 주시는 분들에게 놀라고, 여전히 우리가 함께 비를 맞을 수도, 함께 우산을 쓸 수도, 우산을 살 돈을 모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우리는 오늘 다시 확인할 것이라 믿는다. 저들이 모르는 '구상권 청구'라는 잔혹한 무기에 생명과 평화의 마음으로 맞서는 날이 될 것이다. 아직 후원주점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이미 모두에게 감사한다.

강정후원주점2016 포스터
 강정후원주점2016 포스터
ⓒ 강정법률지원모금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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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덕진은 강정법률지원모금위원회 후원주점 부총지배인,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입니다.
참세상,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등에 함께 보냈습니다.



태그:#강정, #후원주점, #구상권청구, #제주해군기지, #6월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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