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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소득 10%가 전체소득의 45%를 가져가는 아시아 최고의 불평등 국가. 하위 50%의 자산이 전체 자산의 2%에 불과한 나라. 고용통계 작성 이후 청년실업률이 최고수치인 12.5%, 65세 이상 노인빈곤율 49.6% OECD 국가 1위. 우리나라다.
 상위소득 10%가 전체소득의 45%를 가져가는 아시아 최고의 불평등 국가. 하위 50%의 자산이 전체 자산의 2%에 불과한 나라. 고용통계 작성 이후 청년실업률이 최고수치인 12.5%, 65세 이상 노인빈곤율 49.6% OECD 국가 1위. 우리나라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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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위대한 역사적 투쟁의 주제 중 하나는, 평등에 대한 욕구다.' 그 벅찬 평등에 대한 욕구인 희망의 언어를 유린하는 세상. 흙수저, 금수저, 헬조선이 시대를 웅변하는 상징어로 자리 잡은 대한민국. 20대 총선 결과는 이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을까.

불평등을 보여주는 지수는 전무후무할 화려한 성적을 과시하고 있다. 상위소득 10%가 전체소득의 45%를 가져가는 아시아 최고의 불평등 국가. 하위 50%의 자산이 전체 자산의 2%에 불과한 나라. 2016년 2월 청년실업률은 고용통계 작성 이후 최고수치인 12.5%, 65세 이상 노인빈곤율 49.6% OECD 국가 1위 등등.

이 모든 숫자는 단순한 수치가 아니고, 고통스런 피눈물의 온도다. 불평등 문제는 단지 불편한 진실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며, 엄청난 불행의 근원이라고 지적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책임져야 할 정점에 있는 대통령은 외국 방문에 항상 바쁘셔서 신경 쓸 틈이 없으시고, 4·13 총선에 참패해도 자성이나 성찰은 기대할 수도 없는 분위기다. 오로지 "너희들(국민, 여당)이 날 배신해"라는 분노의 표정이 읽힐 뿐이다. 지금까지 그러하였듯이 대통령은 경제문제에 대해 앞장서서 노동자 탓, 국회 탓, 국민 탓이나 하는 '탓 놀음'을 흑마술 주문처럼 반복할 것 같다.

대통령과 보수 정치인들이 말하는 평등의 기준은 "네 탓이요. 네 탓이요"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창조적 경제 능력이 부족한 당신 잘못이라고 꾸짖고 있다. 이는 차별을 은폐·기정사실로 하면서 "너는 열등한 놈이니 가만히 있으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과연 그럴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불평등 사회는 이미 100m 달리기 골인 지점에서 시작하는 사람들과 아직 0m 지점에서 출발도 못 한 사람들 사이의 불공정 게임이다. 여기에는 기회의 평등마저도 사라지고 없다. 이런 불공정 게임 룰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는 세상은 우리가 꿈꾸는 미래가 아니다. 우리의 미래에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일 뿐이다.

단순히 '기회의 평등'만을 외치는 것도 면피성 주술일 뿐이고, '결과의 평등'이 보장되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이고, 평등사회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몇 가지 불평등 탈출 해법은 이렇다. ① 비정규직을 없애는 것, ② 노동시간 8시간 법정제로 일자리를 나누는 방법, ③ 최저임금을 생활임금 수준으로 올리는 것, ④ 정부 고용 비중이 OECD 꼴찌인 6.5%인데 OECD 평균 15.5%로 고용을 늘리는 방법. 이런 방법은 의지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해법들이다. 불평등 해소법을 모르고 있어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법을 바꾸고 만들면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정답이다. 비정규직도 1998년, 2007년에 법을 만들어서 생긴 제도일 뿐이고, 원래는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며 만든 법이었다. 일부 법의 긍정적 작용도 부정할 수 없으나 거꾸로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차별을 합리화하는 정의훼손법으로 전락해 버린 법. 이런 법을 바꾸면 비정규직을 없애는 것도 가능하다.

법이 반드시 정의를 담보하는 이상적인 장치는 아니며, 정의를 구현할 수 없는 법은 없애고 바꾸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법은 해체 가능성이고, 정의는 해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도 행정부 수반으로서 법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할 수 있으나, 법률 제정권은 없다. 짐이 곧 국가라고 행세하는 경찰국가 대장 박 대통령에게 평등사회 구현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은 바보짓이라는 점도 익히 알고 있다. 보다 더 궁극적인, 권력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지만, 대한민국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조항은 공허하고 허무한 문장으로 다가오고, 허수아비처럼 느껴지는 현실이다.

국가의 주인에 해당하는 집주인(국민)을 임차인에 불과한 권력자들이 구박하고, 핍박하고 거꾸로 쫓아내는 행위를 수없이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평범한 시민이 느끼는 권력은 더러운 좀비의 칼일 뿐이다.

그동안 대통령은 물론 국회도 불평등 해소를 위한 법의 해체를 적극적으로 고민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총선에서 정당들은 더욱 보수·우경화의 깃발을 꽂았으니 앞으로 기대할 것도 별로 없어 보인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현 정치지형에서 결국 기댈 곳은 입법기관인 국회밖에 없는 것을.

그런데 국회도 움직이지 않으면, 시민이 죽창 들고 불평등 세상을 바꾸어야 하는가. 그것은 가능한 일인가. 세계인권선언은 "인간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써 반란을 일으키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보호가 필수적"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역사의 시간은 흘렀어도 폭군방벌론은 여전히 유효하며,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까지도 "악한 군주에게 저항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은 강도에게 저항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이는 시민이 마지막 수단으로 죽창 들고 불평등 세상을 바꾸는 것이 정당할 수 있다는 역사적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시민이 마지막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할 막중한 책무가 20대 국회에 있다.

다시 헌법을 꺼내 들고 읽어본다.

제11조(국민의 평등) 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자유와 평등은 인간의 존재를 완성하기 위한 필수·필요조건이다. 자유와 평등은 헌법의 두 바퀴여서, 어느 한 바퀴만 제대로 굴러가지 않아도 넘어지고 나아갈 수 없다. 시민이 죽창들 필요 없는 자유와 평등 국가 실현을 20대 국회가 풀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보태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김희수 씨는 인권연대 운영위원으로 현재 변호사 재직 중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태그:#20대 총선, #불평등 세상, #흙수저 세상, #한국 사회, #불평등 탈출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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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연대는 1999년 7월 2일 창립이후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에 따라 국내외 인권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인권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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