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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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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7일 새벽, 또 한 명의 여성이 살해되었다. 그것을 여성혐오 범죄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가해자가 '여자들이 나를 무시했다'라고 범행동기를 진술하고 여성을 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만이 아니다. 사건의 본질이 성차별적인 사회구조 안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용인하고 정당화시키는 편견과 낙인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이 성별에 기반한 폭력이라는 점에서 가정폭력, 성폭력·성희롱, 성매매, 데이트폭력, 스토킹과 맥락을 같이 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젠더 불평등에 기인한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본질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사적이고 사소한 다툼으로 취급하고, 피해자에게 원죄를 씌운다. '홧김', '성충동' 등으로 인한 우발적 범죄, 이도 안 되면 가해자를 '괴물'로 만든다.

이번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보는 것은 기존에 여성폭력 사건을 구성하고 이해하는 방식으로는 살해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찰은 가해자의 정신병력을 찾아내자 익숙한 방식대로 폭력의 원인을 가해자의 정신질환으로 돌려 이 사건을 '정신질환자가 피해망상으로 저지른 묻지마 범죄'로 결론지었다. 나아가 경찰은 정신질환자의 범죄 위험도 진단 및 행정입원을 요청하기 위한 체크리스트를 마련하겠다며, 우리 사회에서 또 다른 사회적 소수자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고 있다. 

'여성안심귀갓길'? '조심'과 '안심'의 몫은 왜 여성인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가 귀갓길에서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이 골목을 굳이 '여성안심귀갓길'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늦게 귀가하는 여성은 범죄의 대상이 된다'는 통념과, CCTV와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의 범죄예방 효과에 대한 과대평가가 깔려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가 귀갓길에서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이 골목을 굳이 '여성안심귀갓길'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늦게 귀가하는 여성은 범죄의 대상이 된다'는 통념과, CCTV와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의 범죄예방 효과에 대한 과대평가가 깔려있다.
ⓒ 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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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의 유사범죄 재발을 막겠다며 정부와 지자체가 공용화장실 전수조사와 개선책 마련에 나섰다. 행정자치부는 민간 화장실을 공공기관의 관리를 받는 개방화장실로 변경하는 등 개방화장실을 확대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며, 서울시는 성별에 따라 층별 분리 설치하도록 권고할 계획이라고 한다.

공용화장실 관리 및 남녀 화장실을 분리·설치가 강화된다면 그동안 여성들이 공용화장실 이용할 때 느꼈던 불편과 불안감이 일정 부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대책이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과 관련해 정부와 지자체가 내놓은 '주요' 재발방지 대책이라는 점이다.

서울시 곳곳에는 '여성안심귀갓길'이라고 적힌 길을 볼 수 있다. 보행자가 많으면서 상대적으로 어둡고 외진 곳을 선정하여, CCTV와 LED보안등, 위치가 적힌 112신고 야광 안내판을 설치하고 경찰이 순찰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를 한 골목길 도면에 '여성안심귀갓길'이라고 커다랗게 써놓는다.

CCTV 등 범죄 예방보다는 신고와 범인 검거 등 사후적 대응에 효과적인 몇 개의 조치로 여성이 안심할 수 있을까.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가 귀갓길에서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이 골목을 굳이 '여성안심귀갓길'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늦게 귀가하는 여성은 범죄의 대상이 된다'는 통념과, CCTV와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의 범죄 예방 효과에 대한 과대평가가 깔려있다. '여성안심귀갓길'을 걸으면서 여성들이 안심하기보다는 늦게 귀가할 때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더 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2013년부터 실시한 서울시 '여성안심특별시' 정책의 범죄예방 주요 사업인 '여성안심귀가스카우트', '여성안심택배', '여성안심지킴이집', '택시 안심귀가서비스' 그리고 올해 3월 발표한 귀갓길 SOS를 요청할 수 있는 '안심이 앱'까지. 모두 '여성안심귀갓길'의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한 접근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 관련해 정부와 지자체가 공용화장실 개선에 열을 올리는 상황을 볼 때 조만간 공용화장실에 CCTV와 비상벨이 설치되고, '여성안심화장실'이란 간판이 걸릴 듯하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여성화장실스카우트'가 생겨날지도 모를 일이다. 여성 대상 범죄예방에 있어 CCTV 설치 등 치안인프라 구축은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국가의 여성에 대한 범죄 예방정책이 물리적 환경 개선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는 밤낮 상관없이, 어느 곳에서나 발생한다. 어둡고 인적이 드문 곳, 택시나 지하철, 화장실 등 특정 장소에서만 발생하지도 않으며, 가해자는 낯선 사람, 전과가 있거나 정신질환이 있는 특정 사람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여성들이 경험하는 폭력은 대부분 매우 친밀한 관계에서, 또 일상적인 공간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여성 대상 범죄의 발생 장소와 상황을 특정하고, 특정한 사람을 잠재적 가해자로 선별하는 것은 여성폭력의 현실과 맞지 않으며, 여성이 스스로 안전을 위해 지켜야 할 또 다른 성차별적이고 여성 억압적인 행동규범을 강화하기 쉽다.

여성이라면 질리도록 경험했을 귀가시간과 옷차림 단속, 최근 데이트폭력 예방을 위한 '안전이별'까지. 거기에다 이번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을 계기로 '화장실 혼자 가지 않기', '남녀 공용화장실 이용하지 않기' 등 화장실 이용수칙도 추가되고 있다.

여성 폭력 관련 법도, 공식 통계도 없어... 미봉책만 남발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을 계기로 여성폭력의 심각성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과 혐오에 대한 대책 마련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여성폭력 관련 통계도, 기본법도, 주무 기관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이다.

대검찰청 범죄분석에 따르면, 지난 10년간(2004~2013) 4640명의 여성이 살해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공식통계는 그들이 누구에 의해, 어떠한 상황과 연유로 살해되었고, 사건 수사 및 처리결과는 어떠한지 말해주지 않는다.

살인 및 강력범죄 피해자의 90% 이상이 여성(2013)이지만, 피해자 성별에 따른 범죄유형, 범죄자와 피해자의 관계, 가해자의 성별 및 특성, 범죄발생 상황, 범죄수사 및 처리결과를 알 수 없다. 범죄예방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자료인 국가의 제대로 된 공식통계조차 없는 상황이니 여성폭력에 대한 정부 대책은 허술하고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관한 기본법이 없다. 현행법과 정책은 가정폭력, 성폭력·성희롱, 성매매 등 폭력 유형 및 이주여성, 장애여성 등 대상에 따라 각기 다른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제도는 폭력과 대상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데는 유효하나, '성별권력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폭력'이라는 통합적인 시각으로 여성폭력을 바라보고 개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여성폭력방지기본법(가칭)' 제정을 통해 여성폭력 방지를 위한 국가의 기본 이념과 책임을 바로 세우고, 여성폭력에 대한 통합적인 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방지하고 성평등 정책 실현을 위한 중요한 책무를 가지고 있는 국회와 정부는 어떠한가. 국회는 20대 국회 원구성을 두고 여성가족위원회를 다른 위원회에 통합하려고 하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예산을 일반회계가 아닌 불안정한 기금으로 대부분 운영하고 있으며, 성인지 정책 총괄·조정기능을 상실하고 가족·보육·청소년 정책 추진체로 변질된 지 오래다.

여성폭력 추방 및 성평등 정책 실현을 위한 강력한 추진체계를 마련해도 모자랄 판에 이러한 정치권과 정부의 행보는 과연 여성폭력의 심각성을 느끼기는 하는 것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여성폭력 사건이 이슈가 될 때마다 폭력의 본질에 다가가지 않고 보여주기에 급급해 나온 대책은 오히려 여성폭력과 인권의 현실을 악화시킬 수 있다. 기존에 여성폭력을 보고 이해하던 방식과 한 치의 차이도 없는 내용의 정책을 더는 반복해서는 안 된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답이 있다... 여성 폭력은 '사회적 범죄'

지난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21일 오후 강남역과 사건 현장을 오가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이 수백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 지난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21일 오후 강남역과 사건 현장을 오가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이 수백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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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10번 출구 추모행렬은 "국화꽃 한 송이와 쪽지 한 장. 이젠 여성폭력, 살해에 사회가 답해야 할 차례입니다"라는 트윗으로 시작됐다.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이 알려지면서 피해여성에 대한 애도와 함께 여성에 대한 폭력과 혐오에 대해 분노하며,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피해여성의 죽음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우연히, 살아남았다'라고 했다.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 '여성혐오범죄'로 명명하며 여성에 대한 폭력의 본질을 똑바로 보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혐오와 폭력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은 추모집회와 언론중재위원회의 성평등 관련 시정권고 심의 기준 제정을 요구하는 서명운동, 밤길걷기 시위로 이어졌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인권을 침해하는 사회적 범죄이다. 이 당연한 명제가 일상에 내려앉기까지 우리 사회는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을 방관할 것인가.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추모행렬에 동참한 수많은 시민이 외친 것은 우리 사회의 여성에 대한 폭력의 본질과, 성평등과 인권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CCTV', '공용화장실', '조현병'에서 답을 찾는 건 한참 잘못된 번지수이다. 강남역 10번 출구. 여성 폭력과 살해에 대해 우리 사회가 해야 할 답은 거기에 있다.


태그:#여성폭력, #강남역, #여성혐오, #화장실, #묻지마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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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의전화는 폭력 없는 세상, 성평등한 사회를 위해 1983년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이주여성문제 등 여성에 대한 모든 폭력으로부터 여성인권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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