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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10번 출구에서 피켓을 든 남성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피켓을 든 남성
ⓒ 트위터 앙씨오빠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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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성차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항상 남성들이 주장하는 것이 있다. 바로 남성들도 성차별을 겪는다는 것. 피해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말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 남성들이 겪는 일은 적어도 '불평등한 젠더 관계'에서 발생하는 일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가령 이들이 대표적으로 주장하는 '남성만 군대를 가는 것은 차별이다'라는 주장이 그렇다. 이것은 국방 정책의 문제지, 여성이 남성을 차별해서 발생하는 문제는 아니지 않는가. 때문에 나는 여성에게 '나도 피해자'라고 말할 때마다 의아하곤 했다. 여성들에게 그것을 이야기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는데, 왜 이들은 자꾸 여성을 향해 이런 주장을 던지는가.

여성의 불안은 막연한 편견이 아니다

얼마 전 강남역 10번 출구에 피켓을 든 '일베' 회원들이 다시 등장했다. 이들은 "육식 동물이 나쁜 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동물이 나쁜 겁니다, 살기 좋은 대한민국 남녀가 함께 만들어요"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고 한다.

이 문구는 영화 <주토피아>를 차용한 것이다. 영화에선 평화롭게 살던 육식 동물들이 갑자기 포식자로 돌변해 다른 동물들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같은 사건의 원인이 '육식 동물의 DNA에 내재된 포식자 성향이 원인'이라는 주장이 등장한다. 한 누리꾼은 이런 주장에 상처를 받은 여우 '닉'이 주인공에게 분노하는 장면을 사용해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로 보이냐'는 사진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이 같은 주장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육식 동물이 포식자로 돌변한 것이 큰 뉴스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동물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평화로운 유토피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이 그런 곳인가. 특히나 여성에게 이 사회가 그런 곳이 아니라는 점은, 이번 사건과 지금까지 이어져온 여성에 대한 범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걸 알기에 일베 회원도 '대한민국이 살기 좋다'고 쓴 것이 아니라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자'고 쓴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지금 여성들이 호소하는 불안은 <주토피아>에 등장한 것처럼 막연한 편견에 기댄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여성들이 표하는 불안과 분노는 낯선 남성에 의해 여성이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상황'에 있지, 남성 자체를 향한 것도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영화 속 어린 닉에게 그랬던 것처럼, 남자들에게 재갈을 물려달라고 하겠지 왜 '여성들이 범죄를 당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요청하겠는가. 때문에 자신이 <주토피아> 속 육식 동물과 같다는 남성들의 주장은 전혀 적합하지 않다.

남성이 무고한 피해자를 자처하는 이유

SNS에서 논란이 된 사진. 영화 <주토피아>에서 육식동물이 '가해자'로 몰리자 주인공 닉(여우)이 "나도 무섭나"라고 말한 것을 '잠재적 가해자인 남성'에 비유했다.
 SNS에서 논란이 된 사진. 영화 <주토피아>에서 육식동물이 '가해자'로 몰리자 주인공 닉(여우)이 "나도 무섭나"라고 말한 것을 '잠재적 가해자인 남성'에 비유했다.
ⓒ 트위터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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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이들은 자신을 무고한 편견의 희생자라고 주장했을까. 왜 영화 속 닉과 자신을 동일시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왜 피켓에 "범죄를 저지르는 동물이 나쁜 겁니다"라고 썼는지 질문하며 풀고 싶다.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이 동물들이 의도적으로 폭력을 휘두른 것이 아니며 약물에 의해 포식자로 돌변한 점이 드러난다. 즉, 영화의 내용에 비춰 보았을 때, 범죄를 저지르는 동물이 나쁘다는 문구는 정확하지 않다.

그런데 왜 이들은 '나쁜 동물'이 되어야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 동물이 나쁜 동물이 되어버리면, 다시 말해 그 동물들이 특별히 나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한 것이 되어 버리면, 나머지 '선한 동물'들은 여기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이번 사건과 연관 지어 이야기해보자. 이번 사건의 원인이 그 남성이 단지 나쁜 사람이었기 때문이면, 그의 개인적인 일탈 때문이라면, 혹은 그가 가진 병 때문이라면, 나머지의 '선한' 남성들은 이 사건과 관련해서 아무런 일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자신을 무고한 편견의 희생자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지금 여성들의 행동이 자신을 억울하게 잠재적 가해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여성들이 그러는 이유가 남성들에게 가진 편견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면, 이 남성들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여성들이 보이는 불안과 분노가 막연하고 합리적이지 않다면, 그것이 편견에 기반해 무고한 사람을 가해자로 몰아간다면, 그 순간 변해야 할 것은 그 여성들이 된다. 혹은 그 여성들은 목소리를 더 이상 높이지 않고 침묵해야만 하게 된다. 어느 쪽이든 남성들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잘못은 모두 여성에게 있는 것이 되기에.

여성혐오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사건은 반복된다

경찰이 강남역 살인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규정한 것에 대해 분노한 20대 여성들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서초경찰서 앞에서 '여성혐오가 죽였다!'라는 내용으로 항의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경찰이 강남역 살인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규정한 것에 대해 분노한 20대 여성들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서초경찰서 앞에서 '여성혐오가 죽였다!'라는 내용으로 항의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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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 사건은 이들의 주장처럼, 단지 한 개인이 나빴거나 그 사람이 특정한 질환을 가졌기에 벌어진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의 범인이 특별히 여성만을 목표로 노렸고, 그 이유가 여성이 자신을 무시해서라고 말했다. 나를 무시하는 여성은 죽여도 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여성 혐오'에서 탄생한다. 여성이라면 당연히 남성을 대할 때 어떠해야 하며, 그렇지 않은 여성은 '김치녀'로 만들어 마땅히 혐오해도 된다는 생각이다. 때문에 이런 사건은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 정서를 해소하지 않는 이상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하다. 남성이 여성을 멋대로 대상화하고 규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불평등한 젠더 관계를 해체해야만 한다.

그러나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조정된다는 것은 단지 여성의 권리 신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동시에 남성이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하게 누려왔던 권력,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질 수 있는 기득권이 사라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측면에서, 지금 남성들의 반발은 결국 스스로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닌지 묻고 싶다. 이 남성들이 스스로를 무고한 편견의 희생자로 포장해 변화를 거부하는 것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주토피아> 속 캐릭터는 육식 동물인 사자이자 시장인 '라이언 하트'다. 그는 육식 동물들이 포악해지는 현상이 발생하자, 이 동물들을 격리시키고 동물들이 실종되었다고 거짓말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공개해야 한다는 동물에게, 육식 동물들만 포악해지는 상황이 공개된다면 시장으로서 자신의 지위는 끝장이 날 것이라고 강변한다.

한 마디로 자신이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 사태를 은폐하고 사람들의 입을 막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만연한 여성혐오와 불균등한 성별 권력관계의 공론화를 막는 남성들의 모습과 일치한다.

때문에 나는 그 일베 회원이 들었던 피켓에 일부 동의한다. 모든 육식 동물들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다음 문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범죄를 저지르는 동물(만)이 나쁜 것이 아니다. 기득권을 지키고자 사태의 본질을 은폐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동물도 나쁜 동물이다.

만약 라이언 하트 시장이 진작 사태를 공개했다면, 비록 그의 권력이 타격을 받을지언정 무고한 동물들이 공격 받는 상황은 벌써 종식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남성들이 저지른 여성 혐오와 폭력을 제대로 공론화 했다면, 이번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피켓을 든 당신들은 편견에 무고한 피해를 입은 여우 닉이 아니다. 당신들은 자기 권력을 지키려고 거짓말을 한 시장 라이언 하트다.

<주토피아>의 마지막에서 주인공 주디(토끼)는 이런 대사를 전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고. 그리고 이 같은 일은 당신이 변하는 것에서부터, 혹은 내가 변화하는 것에서부터, 그리고 우리 모두가 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라고. 그것이 이 영화가 진정으로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가 아닐까.

자신의 작품이 메시지와 정반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주토피아'의 감독
 자신의 작품이 메시지와 정반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주토피아'의 감독
ⓒ 트위터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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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 사태 이후 줄곧, '모든 남성이 책임의 일부'라는 말을 해왔다. 이는 모든 남성들이 죄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남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의미다. 주디의 대사처럼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변화해야 한다.

단언컨대 피켓을 든 사람은, 그리고 <주토피아>를 인용해 자신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지 말라고 한 사람은,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제대로 이해했다면 분명 그 문구와 메시지들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태그:#주토피아, #잠재적 가해자, #여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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