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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꾸 손이 스치는 이 '지나친 우연'에 두려워해야 했다.
 나는 자꾸 손이 스치는 이 '지나친 우연'에 두려워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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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복권을 샀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막간을 이용해 바로 앞 복권방에서 시간이나 때울 요량이었다. 다른 손님은 없어 한적했다. 가장 싼 500원짜리 즉석복권을 넉 장 구매했다. 긁을 동전이 없어서 주인에게 동전을 하나 받는데 그와 손가락이 스쳤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신나게 복권을 긁으니 500원 두 장 당첨. 다시 다른 복권 두 장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다시 주인과 손가락이 스친다. 바꾼 복권을 긁으니 또 500원 하나 당첨. 마지막으로 바꾼 복권은 꽝이어서 긁은 동전을 돌려드리는데 또다시 스치는 손가락.

복권방을 나오면서 나는 '아마 이 복권방은 다시 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손가락을 스쳐 간 '지나친 우연'의 기운은 버려진 2000원보다 더 크게 기분을 버렸다.

위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성별이 무엇일까 의심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모두 예상한 대로 나는 여성이고 복권방 주인은 남성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 행위가 특정 성별에 더 많이 발생하며 그 성별에게 더 큰 공포와 불안을 야기하는지 굳이 말하거나 배우지 않고도 알고 있다. 3살 난 내 아들은 아직 문장 구사도 하지 못하는데 텔레비전에 나오는 번개맨을 따라 발차기를 하고 번개파워를 쏘며 상상 속의 적을 물리친다. 이것은 물리적 힘이나 생물학적 유전자의 차이이기보다 생물학적 남성이 젠더를 학습해나가는 과정일 테다.

그러나 35살인 나는 복권방에서의 잠깐의 시간동안 잠재적 폭력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감지한다(복권방 주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말이다). 역시 유전자의 작용이 아닌 학습의 결과로, 이 불안과 공포는 혼자 걷는 골목길, 여행지의 숲 속, 남성과의 술자리, 출퇴근길의 흔들리는 지하철과 심지어 집 안에서까지도 여성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의 절반에게 존재하는 이 불안과 공포는 성별 위계(여성집단보다 남성집단이 항상 우위에 있고 공적 영역을 담당하고 있다)로 인해 공식화돼 있지 않으며, 존재하나 인정받지 못한다. 나의 공포는 스릴러 영화를 지나치게 많이 봤거나, 모든 남자들이 나를 좋아할 것이라 착각하는 도끼병이거나, 뭐든지 확대 해석하는 피해망상 환자이거나(…). 

살인 사건을 둘러싼 젠더논쟁... 불안·공포를 정치화하기 시작한 여성들

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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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강남역 인근 건물 공용화장실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두고 '여성혐오 범죄로 인식해야 한다'는 여론이 뜨겁다. "살려(女)달라" "살아남(男)았다"와 같은 구호를 사용하며 정확하게 사건을 성별(젠더)문제로 꼬집고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는 논제지만 나는 무척 놀라운 변화라고 느낀다. 오히려 일반 파렴치 범죄로 보려는 시각 쪽이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여성 20여 명을 살해한 유영철과 같이 여성 타깃 범죄가 수없이 발생해도 우리는 언제나 도덕성이 결여된 싸이코패스가 벌인 일로 마무리되는 걸 봐왔다. 성폭력은 일부 성욕과잉자에게 재수 없게 걸린 일부 여성들의 불운으로 치부돼왔다. 심지어는 여성의 잘못으로 인식되기까지 해 여성이 희생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나면 밤거리는 걷지 말아야 하고, 술에 취하지 말아야 하고, 혼자 여행가지 말아야 하고, 짧은 치마를 입지 말아야 한다는 끝없는 훈계.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강남역 인근에는 가지 말아야 하고, 사람 많은 곳엔 가지 말아야 하고, 특히 화장실은 절대 가지 말아야 하는가.

여성혐오라는 개념 또한 논쟁적이다. "나 여자 좋아해. 혐오(미워)하지 않아"라고 가볍게 받아치지만, 여성혐오는 여성을 미워한다는 말이 아니다.

"여성은 이 모든 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원래 크기보다 두 배로 확대 반사시켜주는, 마술적이고도 입맛에 맞는 능력을 소유한 거울로서 이바지해왔지요(<자기만의 방> 중에서)"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은 성별위계의 본질을 꿰뚫는다. 여성 일반을 하등하게 여기거나, 어떤 특성을 덧씌워서 일반화하거나, 성적 대상으로 삼거나, 희화화하고 조롱하거나, 열등감 및 사회 부적응 혹은 계급계층적 불행의 원인을 여성(집단)에게 돌리는 것 모두 여성혐오의 영역이다. 여성혐오는 남성 우월과 동의어이지 여성 선호의 반댓말이 아니다.

그녀는 잘못이 없으며, 우리도 잘못이 없다는 선언

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강남역 살해 피해자 추모하는 시민 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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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여성들이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혹은 젠더 이슈로 명명하고 행동하기 시작한 데에는 가해자의 "여성이 미워서 그랬다"라고 한 발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희생당한 그녀는 잘못이 없으며 우리도 잘못이 없다는 선언이자, 진짜 잘못된 지점을 찾아 도마 위에 세우고자 하는 의지가 아닐까. 그러자면 여성혐오는 '칼'이 아니라 '뇌'에서 나오는 메커니즘이므로 그 '뇌'를 재판대에 세워야 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생각하면 희생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누구라도 겪을 수 있었던 일을 대신 겪은 것만 같아 가슴이 미어진다.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 이후 많은 여성들이 똑같이 가슴 아파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미안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우리는 잘못이 없다. 잘못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을 먼저 인식하고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이슈를 만들어낸, 행동하는 여성들이 존경스럽다.

그리고 희생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당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한 손엔 꽃, 한 손에 촛불 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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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강남역살인사건, #여성혐오, #젠더, #여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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