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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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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의 일이다. 선선한 여름밤이었고, 오후 10시쯤으로 기억한다. 아파트 단지 내의 작은 공원 옆을 지나고 있는데 내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와 비슷한 보폭의 걸음걸이, 인적이 드물어진 거리에서 나는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를 내 뒤에 두고 한참을 걸었다. 불안했지만 친구랑 근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시간이었고, 그저 약간의 과민반응 정도로 여겼던(여기고 싶었던) 터라 나는 하염없이 걷기만 했다.

공포를 느낀 건 그다음이었다. 분명 뒤의 누군가를 의식해 내 걸음걸이가 계속 느려지고 있음에도 내 뒤의 그는 나를 앞질러 가거나 나와 부딪히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갑자기 뒤에서 친구가 나를 불렀다. 나는 친구의 목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내 뒤를 따라오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어깨가 닿을 듯했다. 족히 네 사람은 넉넉하게 지나갈 수 있는 그 인도였다. 그곳에서 그는 나를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멀리서 상황을 보고 나를 부른 친구는 떨리는 걸음으로 내 곁에 왔고, 나를 바짝 쫓아왔던 그는 그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서서 나를 노려봤다. 그 이후로 몇 번이나 그 쪽을 지나갔지만, 그 거리를 걸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사실 그렇게까지 호들갑 떨면서 할 이야기는 아니다. 대체로 내 친구들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길에서 갑자기 낯선 누군가에 의해 밀쳐지거나, 만져지거나, 때로는 이처럼 잠재적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남는다. 나는 조금만 돌아가면 잠시 무서운 일을 겪었던 이 거리를 걷지 않아도 되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은 위험에 뻔히 노출된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특정한 거리를 계속 걸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 있다.

늦게 집으로 귀가하는 길은 전쟁이다. 전통적인 1세대 아파트촌이라 그런지 몰라도 오후 10시만 돼도 집 주변 인적이 드물다. 내 나이만큼 자란 나무들 사이로 나는 문득 등 뒤에 인기척이 느껴지는 날이면 파랗고 동그란 호신용 경보기와 112 경찰신고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에 의지해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집 문을 닫고 도어락 소리가 들리고 나면 그제야 크게 한숨을 내쉰다. 그렇게 또 매일을 '살아남는다.'

강남역 여성 살해에 하루 종일 마음 아팠던 이유는 그가 곧 나였기 때문이다. 때론 두려움에 떨면서 집으로 귀가하고,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마다 수상한 나사못이 몰래카메라로 보여 두렵고, 문을 열면 벽 옆면에 누군가 숨어있을지 모른다는 '망상'을 반복하던 나였기 때문이다.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모인 여성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너'는 죽고 '나'는 우연에 의해 살아남았다는 어떤 불안과 다음 차례는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살해된 이가 그런 두려움을 가졌을지는 몰라도 이것이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알려주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살아남은 여성들의 안전을 빈다.


태그:#강남역 10번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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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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