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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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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8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의 풍경은 평소와 달랐다. 지하철역 출입구의 유리 벽에 접착식 메모지가 잔뜩 붙고, 그 아래에는 국화가 수북이 쌓였다. 많은 사람이 하나씩 붙이고 놓은 것들이 모여서 만든 광경이었다.

이는 온라인에서 시작된 추모 열기가 현실로 이어진 결과였다. 지난 17일 오전 1시경 서초구에 있는 건물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일면식 없는 남성에 의해 흉기로 살해된 것이 시작이었다. 가해자가 피해 여성을 죽인 이유, 범행 동기로 "여성들에게 무시당했다"고 말했다는 것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인터넷에서 누리꾼들이 사건을 '묻지마 살인'에서 '여성 혐오 범죄'로 바꿔 부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불씨가 이렇게 시작됐다면, <조선일보> 등 일부 매체의 기사 제목은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해당 사건을 다룬 기사의 제목으로 <"여자가 무시" 목사 꿈꾸던 신학생 묻지마 살인>이 붙은 것에 어느 누리꾼은 "왜 언론이 가해자에 이입하느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실제 강남역 10번 출구에도 "그대도 꿈이 있던 사람이었는데"라고 피해 여성을 향한 추모글이 붙었다.

강남역 추모 물결과 '살아남았다' 해시태그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 살인 피해자 추모하는 시민들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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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사건 발생 이후, 트위터에서는 18일 오전부터 '#살아남았다'라는 해시태그를 넣은 글이 작성되기 시작했다. 대부분 "나는 17일 강남 인근 화장실이 아닌 곳에 있었기에 살아남았다"라는 내용이었고, '아직까지는'이라고 덧붙인 글도 있었다. "살女주세요, 당신은 살아男았잖아"라고 성별을 한자로 적은 메모도 눈에 띈다. 해당 사건을 거론하면서 동시에 언론의 'OO녀' 보도 행태를 비꼰 글도 보였다.

심지어 어느 트윗은 "(여성에겐) 일상이 러시안룰렛"이라고 쓰면서 "한 사건을 두고 왜 여자들은 현장에 찾아가 추모 메시지와 꽃다발을 남기고, 남자들은 '아무 연관도 없는데 싸잡혀 욕먹어서 기분 나쁘다' 같은 소리나 하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묻지마 살인'이라고 보도한 언론을 질타하는 글도 많았다. 그중 다수는 해당 사건에서 가해자가 피해자를 무작위로 골랐다는 점은 물론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차별' 살인으로 쉽게 정의할 일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비슷한 차원에서 '당시 화장실에 들어온 사람이 건장한 남자였어도 살인이 벌어졌을지 의문'이라는 식의 의견을 밝힌 글이 포털 기사 댓글란과 소셜 미디어에 넘쳐났다. 결국 '가해자의 자백 내용'과 '피해자의 성별'을 더해보면, 사안의 성격이 '여성 혐오'로 인한 증오범죄에 가깝다는 얘기다.

강력범죄를 바라보는 시선과 언론의 보도방식 등 다양한 층위가 엿보이는 사안이다. 종합해서 간추려 보면 '여성은 강력범죄'의 위협에 더 쉽게 노출된다는 주장이 드러난다. 이번에 벌어진 강남 살인사건이 이를 가시화한 계기가 되었고, 그동안 쌓인 분노와 여성들이 겪은 애환이 분출된 모양새다. 강남역 10번 출구로 모인 애도 물결과 SNS의 '살아남았다' 해시태그로 말이다.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슬로건의 한국판?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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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은 마치 미국의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슬로건을 떠올리게 한다. 이 문구는 지난 2012년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흑인 소년을 총으로 살해한 백인 우월주의자가 무죄로 풀려난 것을 계기로 흑인 사회에서 만든 구호다.

이후 2015년과 2016년, 흑인이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는데도 백인 경찰에 사살된 사건에서도 해당 구호가 다시 등장했다. 올해 미국 가수 비욘세는 "우리를 쏘지 말라"(stop shooting us)라는 그래피티를 뮤직비디오 배경으로 넣기도 했다. 지난 2월 페이스북 CEO 마크 저커버그는 본사 담벼락에 쓰인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문구가 훼손되자 임직원에게 재발 방지를 경고한 바 있다.

어쩌면 한국에서 2016년 5월 18일부터 파도처럼 몰아친 '살아남았다'는 해시태그 행렬은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의 국내판인지도 모른다. 강남역에 이어지는 추모 물결은 '여성의 목숨도 소중하다'(Woman lives matter)는 당연한 사실을 알리려는 움직임처럼 보인다.

과거 페이스북 본사 담벼락 등 미국에서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구호가 훼손된 곳에는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All lives matter)는 반대 구호가 적히기도 했다. 이는 '왜 흑인만 거론하느냐'는 식의 '기계적 중립'이 담긴 맥락의 문장이다. 이번 강남 살인사건 관련 기사에서도 피해자인 여성을 탓하거나 "남성도 피해자인 경우가 있다"는 댓글이 다수 나타났다.

이런 행동을 두고 사회심리학자 박진영씨는 "도덕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저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에 인용된 연구를 보면, 차별을 이야기할 때 '잘못을 고쳐야지' 하는 합리적 반응보다 '우리도 당한 게 많다' 등 엇나간 논점이 튀어나오는 것도 이와 같은 경우에 속한다고 한다.

'내가 속한 집단'이 옳지 못한 일에 개입했다는 정보를 받으면 일종의 집단적 피해의식이 발휘되어 자신의 도덕 정체성까지 손상된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또한 박진영씨는 책에서 1984년 하워드의 연구결과를 인용하며 "똑같은 피해를 당해도 피해자가 남성일 때보다 여성일 때 피해자를 비난하는 현상이 더 강하게 나타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강남 살인사건이 남기고 간 것

지난 17일 새벽 살인이 발생한 강남역 일대의 노래방 화장실의 문.
 지난 17일 새벽 살인이 발생한 강남역 일대의 노래방 화장실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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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았다'는 문구는 한국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가 드문 일이 아니라는 주장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이런 시각은 과연 현실적일까? 지난 2013년 6월 27일 통계청과 여성가족부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실제로 살인·강도·강간 등 강력범죄의 피해자 대부분이 여성인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통계청이 발표한 보고서 '2013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을 보면, 2011년 발생한 강력범죄 피해자는 총 2만8097명이다. 보고서는 "피해자 10명 중 8명이 여성으로 나타났다"고 적었다. 그뿐만 아니라 강력범죄 피해자 중 여성의 수가 2000년 6245명에서 2011년 2만3544명으로 크게 늘었다고 한다. 피해자의 성별을 살펴봐도 같은 기간 여성의 비율이 71.2%에서 83.8%로 증가했다는데, 이는 실로 충격적인 수치다.

통계청은 앞서 2012년 실시한 '사회조사' 결과에서 한국 여성 10명 중 7명이 범죄위험에 관해 '불안하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위에서 언급한 강력범죄 피해 보고서에 따르면, 확실히 근거 없는 불안이 아닌 셈이다.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안타깝지만, '살아남았다' 해시태그가 담은 불안이 기록으로도 현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장 강남 살인사건을 보는 여성들의 반응, '살아남았다'는 표현만 봐도 '다음은 내가 될 수 있다'는 불안함이 강력하게 드러난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위험에 더 쉽게 노출되는 현실은 누구에게든 무섭고 비상식적으로 다가올 법하다. '살아남았다' 해시태그와 강남역 10번 출구에 쌓여가는 메모지·꽃다발은 한국 여성들이 사회에서 겪은 경험과 그로 인한 울분이 만들어 낸 불꽃처럼 보인다. 이를 현실로 끌어낸 도화선은 강남 살인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물음은 남는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답은 무엇일까? 아마 나의 정당함을 유지하기 위해 '당할 만했다'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은 적절한 선택이 아닐 것 같다. '내 일이 아니잖아'라고 넘기며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하는 건 더욱 아닐 것이다. 이 짧은 글에서 지난 수십 년의 시간 동안 길게 이어진 문제의 해결방안을 찾으려는 건 무리일까. 이런 시도가 어쩌면 너무 쉽게 끝을 맺고 무거운 마음을 털어버리려는 태도가 될까 두렵기도 하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서천석씨는 트위터에 "(아이들에게) 여성들이 사는 조건이 남성들이 사는 조건과 어떻게 다른지" 가르쳐야 한다고 썼다. 그의 말처럼 남성 중심의 인식과 안전함의 척도를 바꾸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부디 강남역 10번 출구에 가득한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가 현실적인 방안으로 탈바꿈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살아남았다'라는 자조 섞인 안도에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을 성별과 관계없이 누구든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면.


태그:#강남역 살인남, #여성 혐오, #강남 살인 사건, #살아남았다, #WOMAN LIVES MA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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