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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전북 전주에서 전투경찰로 군복무하던 김상회(59)씨는, 당시 접한 광주 소식을 고향에 편지로 알리려다 징역형을 받았다. 그의 편지는 국가에 의해 검열당했고, 국가는 그에게 '포고령, 반공법 위반'이란 죄명을 덧씌웠다. 이후 36년을 움츠린 채 살았던 그는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으려 한다. 13일 서울 서초구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김씨를 만났다. 아래는 김씨와 나눈 대화와 자료를 토대로, 그의 시점에서 쓴 글이다. [편집자말]
* <5.18, 어느 전경의 편지 (상)>, <5.18, 어느 전경의 편지 (중)>에서 이어집니다.
 5.18 당시 전경으로 광주 소식을 편지로 알리려다가 포고령·반공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산 김상회씨.
 5.18 당시 전경으로 광주 소식을 편지로 알리려다가 포고령·반공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산 김상회씨.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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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전북 전주에서 전투경찰로 근무하던 나는 광주 소식을 편지에 담아 가족들에게 알리려다가 포고령·반공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살았다. 출소 이후에도 정보과 형사의 감시를 벗어날 수 없었던 나는 결국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1987년 2월, 나는 강원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곧바로 취직을 생각했으나, 학부 시절 취직 실패 경험에 따른 트라우마 탓에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특히 과거 전력을 이유로 취업에 또 탈락하면 내 사건이 처가에 알려질까봐 두려운 마음이 컸다(1988년 2월 결혼). 아내와 큰처남 외엔, 처가 식구 아무에게도 내 과거를 알리지 못했다. 1989년 3월, 나는 결국 태어난 지 2주일 된 딸과 아내를 남겨놓고 일본 유학을 떠났다.

1990년 4월 그나마 아내와 딸을 일본으로 불러 일본 생활을 지속하려고 했으나, 1995년 갑자기 안면이 마비되는 증상이 오기 시작했다. 5.18 때문에 쌓인 각종 스트레스가 축적된 데 따른 증상이었다. 신경외과를 몇 차례 찾았으나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고, 1998년 또 한 차례 중증 안면마비 증상을 겪었다. 더 이상 공부에 신경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마침 첫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져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2000년 6월 귀국을 결심했다.

어느 날, 잊었던 동지가 찾아왔다
 5.18 당시 전경으로 광주 소식을 편지로 알리려다가 포고령·반공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산 김상회씨.
 얼마 전까지, 여전히 나는 사회적 은둔자였다. 내 이야기를 밖으로 내놓지 못한 것은 물론 사람 만나는 것조차 꺼렸다. 결혼 전 내 과거를 고백하자 "우리를 위해 포장마차에서 장사라도 하겠다"고 말했던 지금의 아내 덕분에 삶을 이어왔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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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했으나 여전히 취직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언제 중증 안면마비가 다시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지금도 가끔 경미하게 나타나는 안면 떨림 증세 때문에 운전도 할 수 없다. 지금 22살인 막내까지 아이 셋을 키우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자식들을 태우고 운전을 해본 적이 없다.

나의 유일한 지방 여행은 2001년 5월 광주를 찾은 것이다. 그때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했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광주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라고 생각했던 내 개인사를 더듬으며 희생자들의 숭고한 넋을 기렸다.

아무튼 얼마 전까지, 여전히 나는 사회적 은둔자였다. 내 이야기를 밖으로 내놓지 못한 것은 물론 사람 만나는 것조차 꺼렸다. 결혼 전 내 과거를 고백하자 "우리를 위해 포장마차에서 장사라도 하겠다"고 말했던 지금의 아내 덕분에 삶을 이어왔다.

 5.18 당시 교사였던 5.18민주화운동유공자 이상호씨.
 5.18 당시 교사였던 5.18민주화운동유공자 이상호씨.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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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이후, 그렇게 살아왔던 36년 삶에 한줄기 빛이 스며들었다. 지난 2월 18일 오후 5시 쯤, 초인종이 울려 문을 열었더니 웬 남성이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전에 잡상인들이 종종 초인종을 눌렀던 터라 별 생각 없이 남성을 내보내려는데,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육군 35사단 헌병대 영창에서부터 서울 성동구치소까지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이상호 선생이었다. 이 선생은 당시 전주 신흥고등학교 교사였는데, 1980년 5월 27일 신흥고등학교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1년 4개월 동안 복역했다. 이 선생은 "8개월 넘게 수소문한 끝에 김상회 너를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15년 '5.18피해자 (추가)보상신청법안'이 만들어지고 그해 6월 30일까지 신청 작업이 진행되자, 이 선생은 나를 찾아나섰다. 그간 보상신청 명단에 내가 없었던 것을 안 이 선생은 내게 보상신청을 권유하기 위해 수소문을 시작한 것이다.

이 선생이 나를 찾기까지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강원도청, 강원대학교 등 공기관은 물론, 강원도의 지인을 동원해 나를 수소문했지만 돌아오는 건 "강원도에서 2015년 5월 18일은 그냥 월요일에 불과하다"는 싸늘한 대답 뿐이었다. 그러다가 이 선생은 광주에 있는 안종철 박사(전 5.18 기록물유네스코 등재 추진단장)를 알게 됐고, 안 박사에게 광주광역시청 인권평화협력관실을 소개받았다. 결국 5.18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인권평화협력관실의 정보를 통해 나를 찾아올 수 있었다.

눈물이 나왔다. 나를 찾기 위해 그토록 노력해준 이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36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다시 36년 전 일을 꺼낸다는 게 쉽지 않겠지만, 실제로 나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은 분들이 많기 때문에 그 동안 움츠리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마침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제 7차 보상 작업에 들어간다고 해, 올해 2월 말까지 진행되는 '연행, 구금, 수형' 분야 신청을 마쳤다.

내 기억이 5.18 기록의 한 조각이 되길 바라며

 5.18 당시 전경으로 광주 소식을 편지로 알리려다가 포고령·반공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산 김상회씨.
 "이 사건의 당사자인 누나와 동생, 그리고 이런 나와 결혼해 지금까지 고생한 아내를 위해 더 마음을 다잡을 예정이다. 특히 36년 전 아빠가 겪은 일을 지금껏 한 마디도 해주지 못한 두 딸과 아들에게 이 기사를 빌어 처음 고백한다. 엄마를 통해 얼핏 들었겠지만, 이젠 아빠의 입으로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용기낸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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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마음을 먹으니 가족들이 떠올랐다. 36년 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수도 없이 사퇴 압력을 받아왔다. 형이 확정된 1981년 4월 14일엔 이미 연좌제가 폐지(1981년 3월 25일)된 상황이었음에도, 아버지는 자신의 상사로부터 사표를 쓰라는 말을 수차례 들어야 했다. 그 아버지가 지금 84세 할아버지가 돼 있다.

아들 얼굴 한 번 보려고 강원도 양양에서 광주 상무대까지 그 먼 길을 달려왔던 어머니는 지금 83세 할머니가 돼 있다. 나중에 들은건데, 어머니는 교도소에 있는 아들 걱정에 한겨울에도 난방을 안 하고 살았단다. 그 추운 강원도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이 사건의 당사자인 누나와 동생, 그리고 이런 나와 결혼해 지금까지 고생한 아내를 위해 더 마음을 다잡을 예정이다. 특히 36년 전 아빠가 겪은 일을 지금껏 한 마디도 해주지 못한 두 딸과 아들에게 이 기사를 빌어 처음 고백한다. 엄마를 통해 얼핏 들었겠지만, 이젠 아빠의 입으로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용기낸다"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5.18 영령들의 원혼과 그들의 숭고한 의미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여전히 치유가 안 된 살아남은 분들도 어서 마음의 위안을 찾길 바란다. 나로 인해 5.18의 조그마한 기록 한 조각을 정리한다는 의미를 되새기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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