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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 선생 유적지를 시각적으로 설명해주는 종합 안내도. 지금까지 다녀본 역사유적지의 그 어느 안내도보다도 일목요연하게 답사자를 편리하게 해준다. 주차장 끝, 영모재(재실)로 들어서는 입구에 있다(사진의 P자 왼쪽에 있다). '묘소 종합 안내'로 되어 있지만 실은 '조헌 선생 유적지 종합 안내'가 좀 더 적절할 것이다.
 조헌 선생 유적지를 시각적으로 설명해주는 종합 안내도. 지금까지 다녀본 역사유적지의 그 어느 안내도보다도 일목요연하게 답사자를 편리하게 해준다. 주차장 끝, 영모재(재실)로 들어서는 입구에 있다(사진의 P자 왼쪽에 있다). '묘소 종합 안내'로 되어 있지만 실은 '조헌 선생 유적지 종합 안내'가 좀 더 적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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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926번지에 있는 '조헌 신도비'를 찾아간다. '조헌 신도비'라고 하면 누군가는 선생의 존함을 함부로 부른다며 탐탁하지 않게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유적이나 문화유산에 기록된 분의 성명은 본래가 존칭 없이 부르는 법이니 꾸지람까지 들을 일은 아니다.('극존칭 대우받는 식민지 일본인... 문제 없을까?' 기사 참조)

신도비 앞 안내판에도 '조헌 신도비', 한자로는 '沃川 趙憲 神道碑(옥천 조헌 신도비)'라고 존칭 없이 적혀 있다. '조헌 선생 신도비'가 아니다. 물론 선생의 신도비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83호로 지정된 문화재인 만큼 비바람에 시달리고 마구 훼손되도록 방치되어서는 안 될 터, 비각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다.

역사유적 답사 때는 현지 안내판 꼼꼼하게!

비각이 씌워진 때는 1980년이다. 이는 '1980년에는 신도비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세웠다'라는 안내판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처음 알게 된 지식이다. 과연 답사지에서는 현장 안내판의 해설문을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일깨워진다.

조헌 신도비
 조헌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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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는 묘소 앞 큰길 가에 세운 것으로 주인공의 행적과 업적 등을 알 수 있다. 조헌 신도비는 표충사(조헌 선생 사당)와 묘소 입구에 있는데, 1649년(인조 27)에 세운 것이다. 신도비의 글은 (좌의정) 김상헌(1570-1652)이 짓고, (이조판서) 송준길(1606-1672)이 쓰고, (우의정) 김상용(1561-1637)이 전액(篆額)을 썼다.'

안내판의 첫 문단이다(괄호 안의 내용은 필자의 보충). 원문은 세 문장을 모두 나누어 각각 독립된 문단으로 설정해 두었지만 이 글에서는 한 문단으로 묶었다. 낱낱의 문장을 제각각 별도의 문단으로 배치하면 오히려 의미 전달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문은 일반적으로 3-4개의 문장을 모아 하나의 문단으로 구성한다.

첫 문단의 내용은 이해하기에 별 어려움이 없다. 다만 '전액'은 일상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 단어인 탓에 쉽게 와닿지 않는다. 역사 여행 안내자는 이런 낯선 용어들을 만날 때마다 그 자리에서 즉각 쉽게 풀어 해설해야 한다. 하지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전액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사전을 찾아보면 대체로 '전액은 전자체(篆字體)로 쓴 현판(懸板)이나 비갈(碑碣)의 제액(題額)을 가리킨다' 식으로 설명되어 있다. '전액' 두 글자를 이해하려면 전자체, 현판, 비갈, 제액에 대한 배경지식부터 미리 갖추라는 주문이다. 설상가상이다. 우리나라 사전들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풀이라고 비판할 수밖에 없다.

전자체는 한자의 전서(篆書)·예서(隸書)·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 다섯 가지 글꼴 중 한 가지이다. 전서는 좌우 대칭으로 네모 반듯하면서도 아래로 약간 길쭉한 글자체이다. 예서는 예술적인 글자체이고, 해서는 또박또박 쓴 정자체이다. 행서는 반흘림체, 초서는 휘갈겨 쓴 흘림체이다. 물론 초서가 읽기에 가장 어렵다.

현판은 성문, 궁궐의 문, 기타 건축물의 문이나 대청 위 또는 처마 밑에 걸어놓은 당호(堂號)를 말한다. 조헌 선생을 제사 지내는 표충사 외삼문에는 충의문이라는 간판이, 사당에는 표충사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재실에는 영모재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집의 이름을 나무판자에 새겨서 만든 '걸려 있는 간판', 그것이 현판이다.

현판은 쉽게 말해 '걸려 있는 간판'이다. 조헌 선생 유적지에는 세 건물이 있는데 외삼문인 충의문, 사당인 표충사, 그리고 재실인 영모재이다. 사진은 위로부터 그 세 건물의 현판을 찍은 것이다. 외삼문 현판 충의문의 글씨는 옥천군수 류봉열이 썼고, 사당 현판 표충사의 글씨는 충청북도지사 주병덕이 썼다고 현판 내에 밝혀져 있다. 재실 현판의 영모재는 누구의 필체인지 밝혀져 있지 않다.
 현판은 쉽게 말해 '걸려 있는 간판'이다. 조헌 선생 유적지에는 세 건물이 있는데 외삼문인 충의문, 사당인 표충사, 그리고 재실인 영모재이다. 사진은 위로부터 그 세 건물의 현판을 찍은 것이다. 외삼문 현판 충의문의 글씨는 옥천군수 류봉열이 썼고, 사당 현판 표충사의 글씨는 충청북도지사 주병덕이 썼다고 현판 내에 밝혀져 있다. 재실 현판의 영모재는 누구의 필체인지 밝혀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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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은 죽은 이의 성명, 생전의 경력과 활동 사항, 가족 관계, 출생과 사망 시기 등을 새겨 묘 앞에 세워둔 비석이다. 묘갈에는 두 종류가 있다. 네모난 몸돌 위에 지붕 형태의 덮개돌을 얹은 것은 보통 "비"라 부르고, 몸돌 윗머리가 둥글고 덮개돌이 없는 것은 특별히 "갈"이라 부른다. <후한서(後漢書)>에는 "네모진 것은 비, 둥근 것은 갈"로 규정되어 있다.

제액은 비의 이름을 말한다. 비석 몸돌(碑身)의 맨 윗 부분에 새겨지기 때문에 두전(頭篆)이라고도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낱말 풀이를 종합해 보면, 전액은 아래로 약간 길쭉한 네모 틀에 맞춰서 쓴 듯한 글자체의 비석 이름이다.  

조헌 신도비. 비각을 등지고 서면 (나무에 가려 있지만 않으면) 선생을 기려 세워진 표충사 경내가 바로 눈에 들어올 정도의 지점에 세워져 있다.
 조헌 신도비. 비각을 등지고 서면 (나무에 가려 있지만 않으면) 선생을 기려 세워진 표충사 경내가 바로 눈에 들어올 정도의 지점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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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첫 문단을 누구나 알기 쉬운 문장으로 바꿔본다. 대략 '신도비는 묘소로 가는 큰길 입구에 세운다, 조헌 신도비도 1649년(인조 27) 표충사와 묘소 입구에 세워졌다, 조헌 선생의 생애를 담은 비의 글은 좌의정 김상헌(1570~1652)이 지었고, 글씨는 이조판서 송준길(1606~1672)이 썼다, 비문의 제목 글씨는 우의정 김상용(1561~1637)이 네모 틀에 맞춰 쓴 듯 보이는 전서체로 적었다' 정도가 될 듯하다.

'신도비의 내용은 조헌 선생의 가계와 성장 과정과 학업, 문과 급제와 관직 생활, 특히 불교를 배척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올곧은 심성, 왜의 침입을 예견한 일 등을 기록하였다. 이어 관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청주성을 탈환하고 마침내 금산 전투에서 순절하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그리고 순절 이후 벼슬을 추증(追贈, 죽은 후 높은 벼슬을 명예로 내림)과 치제(致祭, 제사 지냄), 배향(配享, 사당 등에 모심) 등의 사실 등을 기술하였다.'

안내판의 두 번째 문단이다. 역시 세 문장을 각각 별개로 나누어 세 문단으로 나열한 원문을 한 문단으로 합쳤다. 요약하면, 신도비에는 조헌 선생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는 뜻이다. '왜의 침입을 예견'하였다는 대목과, '관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청주성을 탈환하였다는 대목이 특별히 눈길을 끈다.

일본 침입 예견한 조헌, 그러나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고...

한국문화사학회의 <문화사학> 15집(2001)에는 조헌의 임진왜란 발발 예견에 관한 간명한 설명이 실려 있다. <문화사학>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해인 선조 24년(1591)에 일본에 갔던 통신사가 일본 사신들과 함께 돌아오자 그(조헌)는 옥천에서 상경하여 대궐 앞에서 일본 사신의 처단을 요구하고 일본 침략에 대비한 국방력 강화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선조가)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분개한 나머지 대궐문 앞 주춧돌에 머리를 찧어 피가 낭자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그 광경을 본 정부 고관들이 조헌을 말리면서 지나친 행동을 하지 말라고 꾸짖었다. 그러자 조헌은 오히려 "내년이면 산속으로 숨어야 할 터인데 그때는 내 말이 생각날 것"이라면서 그들에게 호통을 쳤다. 하지만 조헌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사당 표충사 내에서 만나게 되는 조헌 선생의 초상(일부). 가산사 영정각의 영정은 이곳의 것을 복사한 것으로 보인다.
 사당 표충사 내에서 만나게 되는 조헌 선생의 초상(일부). 가산사 영정각의 영정은 이곳의 것을 복사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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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은 충청도와 전라도 경계인 대둔산에 올라 함께 모인 승려들에게 "내년에는 틀림없이 왜란이 일어날 것이오, 전란이 일어나면 나는 의병을 일으켜 임금을 보위할 테요, 오늘 이 자리에서 나와 더불어 한 끼 밥을 먹은 사람들은 내가 창의했다는 소식을 듣거든 즉시 달려와 힘을 함쳐주시오" 하고 호소했다. 실제로 그 이듬해에 전쟁이 일어났고, 대둔산에 함께 모였던 승려들 중에는 금산 전투에서 조헌과 같은 날 순절한 이도 많았다.

<문화사학>에는 '(조헌이) 관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청주성을 탈환'했다는 신도비의 기술에 대한 풀이도 실려 있다. 조헌 선생이 의병을 모집하자 많은 장정들이 몰려 왔는데, 이를 본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이 방해하고 나섰다.

첫째는 관군 모집에 어려움이 있을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고, 둘째는 조헌이 큰 공을 세우면 일본과의 싸움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자신에게 문책이 돌아올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헌은 임진왜란 최초의 승병장 영규 대사와 힘을 합쳐 청주성 탈환에 성공했다. 그러자 또 다시 윤국형이 방해 공작을 벌였다. 청주성을 탈환한 조헌이 북쪽으로 올라가 임금을 호위하겠다고 하자 윤국형은 그가 선조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발할까 두려워 "먼저 금산의 왜적부터 토발하는 게 바람직하다"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조헌의 휘하 장수들도 동의를 했다. 이에 조헌은 금산의 일본군부터 먼저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조헌이 북상을 그만두자 윤국형은 이내 관군을 풀어 조헌 부대 의병들의 가족을 잡아가두는 등 또 다시 방해에 들어갔다. 결국 조헌 의병장과 영규 대사는 1600명 중 900명이 흩어져버리고 700명만 남은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출전했고, 마침내 그곳에서 모두 전사했다.

관료들은 왜 의병들을 방해했을까

국사편찬위원희의 <신편 한국사>에는 '당시에 경상도는 일본군의 침략을 받자 거의 저항도 하지 않은 채 성을 버리고 도주하는 수령이 속출했고 백성들은 모두 깊은 산에 피란하여 숨어 지내고 있었다, 조정에서 근왕병의 소모령(召募令)이나 지방관의 징발령이 있었으나 이미 관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백성들은 이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난이 일어나기 이전 지방수령의 학정을 경험하였기에 오히려 이 기회에 지방관에 보복을 가하려는 분위기까지 나타나기도 하였다'라는 대목이 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관료들이 평상시 자신들의 잘못된 행정권력 남용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의병들을 억누름으로써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모면하려 들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런가 하면 '문치를 이념으로 하고 관료에 의한 통치를 시행하고 있었던 조선왕조에서 개인이 사병을 모집한다는 행위는 이유가 어디에 있든지 반역에 해당되며 위정자가 가장 위험한 행동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처음 곽재우가 의병을 규합하고 있을 때 합천군수 전경룡(田見龍)이 곽재우를 역적으로 조정에 보고하고 의병에 참가한 자를 흩어지게 한 것은 관군과 의병 간의 불화 등에도 원인이 있었으나 아무리 전시라 할지라도 사병을 모집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통념에서 비롯되었다, 호남에서도 김천일과 고경명이 의병을 규합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문제가 고려되어 유명무실하기는 하지만 관군이 있었으므로 의병의 봉기를 주저하였던 것이다, 특히 호남지방에서는 이른바 정여립 모반사건(鄭汝立謀叛事件)이 해결되지 않은 시점에서 의병의 봉기는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라는 대목도 있다.

이 대목 역시 관료들이 의병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가늠하게 해준다. 자칫하면 임금이 의병을 반군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의병장들을 우호적으로 대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까지 반역 도당으로 함께 내몰릴 수 있다는 보신적 무사안일주의를 고급관료들이 벗어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선조는 호남의 대표적 의병장인 김덕령을 의심하여 친히 고문한 끝에 죽였고, 의병으로 나서달라고 자신이 직접 요청했던 서산대사와 그 제자 사명대사까지 심문을 당하게 만들었으며, 곽재우 등 무수한 의병장들을 체포하여 고문하였다.


'신도비는 자연석을 다듬어 비좌를 놓고, 그 위에 세운 비신은 높이 175cm, 너비 100cm, 두께 32cm의 크기로 4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다. 1980년에는 신도비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세웠다.'

마지막 문단은 신도비의 크기와 비각 건립 연도에 대한 설명이다. 비좌(碑座)는 비신(碑身)을 얹은 받침돌, 비신은 비석의 몸돌을 가리킨다. 이는 비석이 받침돌, 몸돌, 덮개돌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비각(碑閣)은 사람들과 비바람으로 말미암아 빗돌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운 집이다.  

읽어볼 수 없는 신도비에 대한 아쉬움

문화재청 누리집의 조헌신도비 해설

신도비는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 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중봉 조헌(1544∼1592) 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조헌은 명종 20년(1565) 성균관에 입학하여 2년 후인 1567년 병과에 급제하였다. 그후 호조좌랑·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전라도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옥천군 안읍 밤티로 들어가 제자 양성과 학문에 전념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청주성을 수복하였으나 충청도순찰사의 방해로 해산당하여, 불과 700여 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하였고 고바야가와의 왜군과 전투를 벌여 끝까지 분전하다가 칠백 의병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 비에는 선생의 이 같은 생애와 최후 격전지였던 금산 싸움에 대하여 자세히 적고 있다. 인조 27년(1649)에 세운 비로, 좌의정 김상헌이 글을 짓고, 이조판서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그런데 신도비 앞 안내판의 글을 다 읽고, 또  신도비를 요모조모 살펴 보았지만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중봉 조헌(1544∼1592) 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면서 '선생의 생애와 최후 격전지였던 금산 싸움에 대하여 자세히 적고 있다'라는 문화재청 누리집의 해설 때문이다.

비에 금산 싸움에 대해 자세히 적혀 있다고 한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은 신도비의 비문을 읽을 수가 없다. 비각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서 빗돌에 눈을 바짝 갖다댄다 한들 글자 판독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 게다가 원문이 한문이다. 신도비를 통해 금산 싸움을 알아보려는 노력은 원천적으로 100% 불가능한 일에 대한 무모한 도전인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이런 비는 원문과 번역문을 대형 안내판에 담아 비각 주변 어딘가 세워두면 좋을 법하다. 그렇게 해두면 누구든지 원문과 번역문을 통해 조헌의 생애를 잘 알게 되고, 금산 싸움의 경과도 모자람없이 헤아리게 된다. 국민들의 역사의식을 올바르게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는 추정이다.

신도비 인근에 선생의 사당인 표충사와 묘소가 있다. 재실 영모재도 있다. 그곳에 가면 금산 싸움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고 왼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내 홍살문이 보인다.

조헌 선생 묘소에서 내려다 본 사당 표충사, 외삼문 충의문, 홍살문이 한 줄로 보이는 풍경. 흰 동그라미 부분이 솔숲에 가려 있는 신도비 자리이다.
 조헌 선생 묘소에서 내려다 본 사당 표충사, 외삼문 충의문, 홍살문이 한 줄로 보이는 풍경. 흰 동그라미 부분이 솔숲에 가려 있는 신도비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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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조헌, #임진왜란, #조헌 신도비, #금산 전투, #청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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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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