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행

포토뉴스

군지촌정사 안채굴뚝 안채기단에 구멍을 내고 굴뚝을 설치했다. 이런 굴뚝시설은 구례 운조루, 외암마을 참판댁, 하회마을 양진당에서도 볼 수 있다. ⓒ 김정봉
굴뚝 여행 첫머리

우리는 장문화(醬文化)와 함께 구들이라는 고유문화를 갖고 있다. 방에 구들장을 깔고 연기를 그 밑으로 보내 구들장을 구워(데워) 방을 덥히는 난방풍습이다. 구들의 어원도 구운 돌에서 찾고 있다. 이때 연기를 내보내고 연기가 역류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굴뚝이다. 아궁이, 고래와 함께 구들에 없어서는 안 되는 굴뚝은 자연스레 독특한 우리 문화의 한 영역을 이루었다.  

대개 굴뚝은 기능과 지역을 감안하여 만들어지지만 궁궐이나 절집 굴뚝은 장식과 개성이 강조된다. 반가 굴뚝은 권위를 밖으로 드러내기 위해 크고 높게 만들거나 집주인의 성품과 철학에 따라 일부러 숨기기도 하고 작고 낮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성품과 철학은 마을의 전통과 풍습, 공유가치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거꾸로 마을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오래된 마을과 옛집굴뚝을 찾아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담는 일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굴뚝기능이 많이 사라지면서 옛집굴뚝도 인위적으로 꾸며 놓은 민속마을 굴뚝처럼 메말라가고 있다. 마을과 옛집굴뚝에 담긴 이야기를 되도록 많이 주워 담아 메말라가는 굴뚝을 기름지게 할 욕심을 내본다.

지리산 자락, 섬진강 줄기에 들어선 고을들, 곡성과 남원, 구례를 제일 먼저 찾았다. 곡성 군촌마을의 함허정과 군지촌정사 그리고 봉정마을의 영류재와 단산정사의 두 마을 옛집굴뚝은 아주 대조적이어서 흥미롭다. 구례 상사마을 쌍산재와 오미마을 운조루는 다양하고 의미 있는 굴뚝이 있어 굴뚝 여행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남원 홈실마을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집, 몽심재의 굴뚝이 너무나 궁금하여 마지막으로 꿈꾸듯 찾아간 곳이다.   

골짜기 고을, 곡성(谷城)
희망 곡성 장돌뱅이 노랫말에 곡성은 곡소리 나는 곡성으로 풀어내지만 곡성은 곡소리 날 리 없는 살기 좋은 ‘희망 곡성’이다. 곡성은 옥과, 곡성, 죽곡, 석곡 등 서너 마을이 얼굴마담 노릇하는데 석곡(돌실)은 그 중에 하나다. ⓒ 김정봉
이름이 알려주듯 곡성은 골짜기 많은 고을이다. 골짜기 주름 따라 골골이 들어선 서너 마을이 곡성의 '얼굴마담' 노릇을 한다. 조선시대 현(縣)이고 대한제국 때 군(郡)이었던 옥과(玉果), 현재 곡성읍 소재지 곡성, 옛날 옛적 백제의 읍이었던 죽곡(竹谷), 200년 전부터 장이 섰던 석곡(石谷)이 곡성의 얼굴들이다. 4·9장 옥과장, 3·8장 곡성장, 1·6장 죽곡장, 5·10장 석곡장, 모두 조선시대부터 장이 서, 곡성은 물론 주변 고을에까지 이름 꽤나 날린 전통장들이다.
   
'나무나무 임실(任實)이요, 가지가지 옥과(玉果)로다. (중략) 곡성(谷城)에 묻힌 선배 구례(求禮)도 하려니와...'

<호남가>의 한 대목으로, 옥과는 임실과 곡성, 구례와 함께 호남가 50여 고을 중에 어엿이 한가락 차지하였다. 장돌뱅이(장돌림)들 사이에 구전되는 노래에는 석곡의 위상이 드러나 있다. 언어유희를 즐기는 노랫말로 썰렁하기보다 해학과 기지가 넘친다.  

'방구통통 구례장 구린내 나서 못보고 아이고 데고 곡성장 시끄러워서 못보고 뺑뺑 돌아라  돌실장(석곡장) 어지럼병 나서 못 본다.'

돌실은 석곡의 옛 이름이다. 지금에야 구례장에 비할 바 아니지만 예전 돌실장은 장돌림들 사이에서 제법 유명하여 곡성장과 구례장에 전혀 뒤지지 않은 장이었다.

곡성장은 시끄러워 못 본다니, 장돌림들은 곡성(谷城)을 곡소리 나는 곡성(哭聲)으로 해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얼핏 골짜기 고을이라 사람 살기 힘들어 곡성(哭聲)으로 들릴지 몰라도 곡성은 순창, 남원, 구례, 순천, 화순, 담양이 뱅 둘러치고 섬진강과 보성강을 끼고 있는 교통 좋고 물 좋은 고을이다. 곡소리(哭聲) 날 리 없는 살기 좋은 태평한 고을이다.

함허정 숨은 굴뚝과 군지촌정사의 기단굴뚝

남원에서 순자강(鶉子江)을 거슬러 군촌으로 향했다. 곡성사람들은 곧잘 섬진강을 순자강으로 부르곤 한다. 벚꽃은 진 지 오래, 새순이 가시처럼 돋고 있었다. 벚꽃이 만발하였다면 정(情)을 '순자'에 둘지 '벚'에 줄지 갈피를 잡지 못하였을 게다. 어젯밤 비가 크게 오긴 온 모양이다. 청류는 탁류로 변해 있었다. 탁류 곁 논밭이 풍요롭게 보였다. 이제 언덕 하나만 넘으면 군촌(涒村)마을이다. 상수리 숲 언덕에 있는 정자(亭子)가 군촌을 알려줬다.

정자 이름은 함허정(涵虛亭). 중국 이화원의 '함허'처럼 하늘을 물에 담는다는 뜻인지, 무념무상(虛)에 젖는다(涵)는 뜻인지, 알 듯 모를 듯, 마음이 어지럽다. '허(虛)'를 보고 생각한 끝에 '그릇을 비움으로써 그릇으로 쓰임이 생긴다'는 노자의 '비움 철학'에 마음을 두기로 했다. 자연을 지배하고 주인행세하려는 생각에서 벗어나 정자만은 비워 놓은 그릇처럼 최대한 소박하게 꾸며 하늘, 강물, 나무, 바람, 삼라만상을 담으려는 생각이다.
함허정 정경 상수리와 굴참, 소나무가 에워싸고 있는 함허정은 코앞에 순자강을 두고 있어 경관이 뛰어나다. ⓒ 김정봉
함허정 마루에서 본 정경 함허정은 하늘, 강, 나무, 바람, 자연을 담으려 비워 놓은 그릇이다. ⓒ 김정봉
함허정 앞을 흐르는 강은 순자강이다. 순은 메추라기 순(鶉), 메추라기 강이다. 메추라기는 일정한 거처를 정하지 않아 흔적을 남기지 않는(순거 鶉居) 존재로 성인에 비유된다. 장자(莊子)는 성인의 경지는 절대자유의 경지라 했다.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 무엇에도 거리낌 없는 경지다. 순자강을 보며 함허정 집주인은 성인을 꿈꾸었다. 메추라기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비우고 또 비운, 허허(虛虛)한 함허정, 그 이름이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

부뚜막 없는 함실(函室) 아궁이는 정자 앞에 있으나 굴뚝이 보이지 않았다. 정자는 자연과 우주를 담기 위해 비운 커다란 그릇이라 생각하여 굴뚝도 거추장스럽게 생각한 걸까? 비우려고 한 대상이 된 걸까? 애써 찾아보았다. 서쪽 양쪽 마루 밑에 숨었다. 서로 통해 있기는 한데 뒷마루 굴뚝은 새까맣게 그을렸고 앞마루 굴뚝은 고래가 막혔는지 그을리지 않았다. 꼭꼭 숨은 것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 메추라기 둥지처럼 보였다.
순자강 정경 섬진강을 곡성사람들은 순자강으로 부른다. 메추라기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만한 함허정과 메추라기 강, 순자강은 잘 어울리는 메추라기 한 쌍이다. ⓒ 김정봉
함허정 굴뚝 아궁이 없는 함실아궁이는 함허정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데 굴뚝은 보이지 않는다. 함허정 앞뒤 마루 밑에 숨었다. 숨겨 놓은 것이다. ⓒ 김정봉
군지촌정사 심광형(沈光亨)이 처소 및 강학을 위해 지은 정사로 서당으로 쓰인 정사(사랑채)와 안채, 대문채로 이루어졌다. ⓒ 김정봉
함허정 100미터 아래에 군지촌정사(涒池村精舍)가 있다. 해주목사와 병조참판을 지낸 심안지 손자, 심광형(1510~1550)이 지은 정사다. 안채 기단석축에 뚫린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기단굴뚝(가래굴)으로 안방의 굴뚝시설이다. 함허정 굴뚝과 참 잘 어울리는 굴뚝이다. 이 굴뚝 말고 다른 굴뚝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 또 모르지, 함허정 굴뚝처럼 숨겨놓은 굴뚝이 또 있는지. 적어도 함허정 굴뚝과 어울리지 않은 키가 큰 굴뚝은 보이지 않는다. 다른 집처럼 바깥양반이 안주인 생각한다고 안채 굴뚝을 높게 뺐더라면 실망이 클 뻔했는데 다행이다. 

심광형은 광양, 곡성지역에서 훈도를 지냈던 문인이다. 후학을 육성하기 위해 1535년에 군지촌정사를 짓고 8년 뒤 1543년에 함허정을 지어 이 땅에 뿌리내렸다. 자손만대 영세거주지로 생각한 것이다. 청송심씨 집성촌으로 군촌마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때 70여 호가 있었다하나 지금은 20여 호만 남았다. 

군촌마을의 메마른 굴뚝
군촌마을 정경 심광형이 군지촌정사와 함허정을 짓고 영세거주지로 생각해 뿌리를 내렸다. 청송심씨 집성촌으로 70여 가구가 살았다 하나 현재는 20여 집만 남아있다. ⓒ 김정봉
군촌마을은 입면(立面) 제월리(霽月里)에 있다. 제월은 맑게 갠 하늘의 밝은 달이라는 뜻이다. 마을 앞 순자강이 달처럼 둥글게 흐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함허'와 '순자', '군지촌', '제월'의 말들이 생각을 깊게 한다. 군지촌정사의 안채 당호는 제월당(霽月堂), 소쇄원의 사랑채도 제월당, 염상섭의 호도 제월(霽月)이니 생각의 꼬리는 길어진다. 

길은 마을을 잇고 끊기도 한다. 군촌마을은 840번 지방도로로 동서로 나뉜다. 서쪽에 함허정과 군지촌정사, 한옥펜션이 있고 동쪽에 마을회관과 20여 집들이 모여 있다. 여느 마을처럼 빈집이 많다. 다시 돌아올 날을 기약한 건지, 감나무와 가죽나무는 남겨 놓았다. 사람소리 들어야 실하게 자라는 감나무는 말 거는 사람이 없어 싱겁게 키만 컸고 폐가의 굴뚝은 주인 기다리다 지쳐 돌담에 기대 말라가고 있었다.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팽나무가 낯설게 보인다.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고목은 드문 거라 마을이 들어설 때 마을 끝이 여기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팽나무 곁을 지나는 할머니에게 팽나무가 얼마나 되었는지 물어보니 "누군가 잘 모르것소"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며 "내 시집왔을 때, 젊을 때도 있었응게... 한참되았소"라 말을 이었다. 한눈으로 봐도 300년은 족히 돼 보였다. 이 나무와 함께한 할머니의 고된 세월을 넌지시 말하고 있었다.

허리 굽은 할머니는 내 어머니 꼭 빼닮았다. 허리 굽어 턱 높은 정지를 넘을 때마다 허리쉼으로 긴 숨 몰아쉬며, 굴뚝에 서린 김 마를세라 밥 불에 눈을 떼지 못하던 어머니였다. 어느 날 내 곁을 홀연히 떠나 목구멍이 까맣게 마른 폐가의 굴뚝처럼 내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던 그날이 떠올랐다. 
폐가 굴뚝 폐가 굴뚝은 목구멍이 까맣게 타들어간 메마른 굴뚝, 돌담에 기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 김정봉
군촌마을 길 길옆에 서 있는 팽나무가 그럴싸하다. 길 따라 죽 내려가면 마을사람들이 자랑삼는 함허정과 군지촌정사가 나온다. 군촌은 2차선 지방도로로 나뉘었지만 마을사람들 마음만은 나누지 못했다. ⓒ 김정봉

덧붙이는 글 | 4/17-4/19에 다녀와 쓴 글입니다.

태그:#굴뚝, #함허정, #군지촌정사, #기단굴뚝, #숨은 굴뚝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독자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