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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잘못을 지적하긴 쉽다. 하지만 자신의 오점을 드러내 반성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내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허함과 지나간 잘못을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꺼이 뒤를 돌아보고 잘못을 꺼내어 반성할 줄 아는 이들을 존중해 마땅한 이유다. 여기, 기자 직군과 사회 그리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세 작가의 작품을 소개한다.

재닛 맬컴, <기자와 살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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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와 살인자 책 표지
ⓒ 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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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 한국사회가 가장 주목한 직업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기자라 답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기레기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기자 집단은 지난 한 해 만도 십수 편의 영화와 드라마, 소설의 타깃이 됐다.

그중 일부는 거대한 악의 카르텔과 맞서는 바람직한 기자상을 그려내기도 했으나 대다수는 언론계의 왜곡된 생태계를 비추고 회사원이나 다름없는 기자들의 무사안일한 태도를 비판적으로 비춘 작품들이었다. 드라마 <피노키오>와 <힐러>, 영화 <특종: 량첸살인기>,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가 모두 그런 작품들이다.

기자에 대한 비판적 관심은 미국사회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지난 몇 년 간 큰 인기를 끈 HBO드라마 <뉴스룸>을 비롯해 제이크 질렌할이 주연한 <나이트 크롤러>, 올해 초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을 거머쥔 <스포트라이트>가 모두 언론을 전면적으로 다룬 작품이었으니 말이다.

어디 드라마와 영화 뿐이었겠나. 저널리즘 그 자체를 소재로 한 논픽션 고전으로 최근 몇년 간 프랑스, 한국 등지에 소개되며 꾸준한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는 책 <기자와 살인자>도 그와 같은 작품이다.

기자와 살인자가 벌인 전대미문의 소송을 둘러싼 이야기를 기록한 이 논픽션은 그 스스로도 기자이자 작가인 재닛 맬컴의 저작이다.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한 혐의로 투옥된 남자가 논픽션 작가와 계약하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정작 작가는 4년이 넘는 취재기간이 흐른 뒤 그를 잔혹한 살인마로 묘사했다는 해외토픽감 이야기가 책의 주요 줄기다.

결국 죄수는 작가를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하고 작가는 이에 맞서는데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취재 방법이 윤리적 측면에서 적잖은 문제를 안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기자의 윤리란 무엇인가, 결정적인 정보에 다가서기 위해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취재를 허용해야 하는가, 진실이 아닌 것과 거짓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등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어느새 독자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당신이 내릴 답이 궁금하다.

'기자가 도덕적 교착 상태에서 고군분투하는 방식은 무한히 많다. 현명한 이들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안다(그리고 대다수는 맥도날드와 맥기니스의 관계에서 드러난 어설프고 불필요한 위선을 회피한다). 어리석은 이들은 늘 그래왔듯이 자신이 모든 문제를 말끔히 해결했다고 믿는 편을 택한다. -221p

이시다 이라, <L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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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ST 책 표지
ⓒ 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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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유의 감각적인 문장으로 밝고 경쾌한 소설을 주로 써온 작가 이시다 이라가 일본의 어두운 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작품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태어난 소설집 <LAST>는 모두 일곱 편의 단편 연작으로 삶의 마지막까지 몰린 사람들의 면면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낸다.

밝은 청춘소설을 주로 써온 작가의 눈에도 당대 일본의 현실은 어둡고 무거웠던가 보다. 스릴러와 추리, 범죄, 성장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는 연작 가운데서 불황과 빚, 단절과 절망의 이미지는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소설 속 일본사회가 처한 현실은 끝없는 불황 속에서 중산층이 무너져가고 사회가 제도권 밖으로 튕겨져나가는 구성원들을 붙잡지 못하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비틀리고 죽어가는 이들이 곳곳에서 발생하는데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듯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작가가 주목한 문제는 여럿이지만 그 중에서도 고리사채가 단연 눈에 띈다. 첫 에피소드 '라스트 라이드'에선 가장으로 하여금 가정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게 하더니 '라스트 잡'에선 평범한 주부를 성매매로 내몰고 '라스트 드로'에선 범죄에 손을 대게 하고, '라스트 배틀'에선 인간성마저 상실케 한다.

채무자들은 이자만 감당하기에도 버거운 지경으로 내몰리고 빚은 갈수록 몸집을 불려 결국엔 빌린 이를 잡아먹고 만다. 자본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으로부터 이들을 지켜줄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경찰이나 파산제도 등 제도권의 수단이 몇 차례 언급되긴 하지만 그 뿐, 무력하기만 하다.

2004년 일본에서 나온 소설이지만 과연 한국의 오늘과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일본계 사채업체들이 한국에 들어오던 시기가 꼭 이쯤이었던 듯싶다. TV광고에 버젓이 이들의 광고가 나오기 시작했던 시기도 이맘때 쯤이었다. 그리고 10년이 흘러, 오늘 한국은 <LAST>가 그린 세상으로부터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소설 가운데 작가가 슬쩍 내보인 희망으로부터 답을 찾아야 할까. 무릎부상으로부터 해고, 노숙생활까지 내몰린 한 사내의 이야기를 다룬 '라스트 홈'의 결말을 기억한다. 노숙인 사회에서조차 견제없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음을 배워나가는 주인공, 빚을 피로 갚던 동료 노숙인에게 그가 건넨 말이야말로 답 안 나오는 시대에 이시다 이라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가 책 가운데 숨긴 답이 무언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LAST>를 펼치는 것도 괜찮은 선택일 것이다.

'나는 이 단편들 가운데에 구제를 마련해두지 않았다. 현대사회의 병리를 날카롭게 잘라내어 정밀도 높은 표본으로 제시하려 했다. 그 날카롭고 선명한 환부 속에 일본 사회의 모습을 투영하려 했다. 이 작품이 그렇게만 읽힐 수 있다면, 작가로서는 성공이다.' - 7p, 한국어판 저자서문

파트릭 모디아노,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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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책 표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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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이다. 너무도 희미해서 '훅' 불기라도 하면 산산이 흩어질 것만 같은 과거의 기억을 (작가 자신을 연상시키는) 주인공이 찾아나선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확실한 건 무엇도 없는 상황. 차근히 기억을 더듬어가며 결정적인 삶의 한 순간과 대면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선 출처 모를 감동까지 느껴진다.

소설의 주인공은 어느덧 노년에 접어든 작가 장 다라간. 어느날 오후 끊어지지 않고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깬 그는 잃어버린 수첩을 돌려주겠다는 수화기 너머의 남자와 약속을 잡는다. 남자는 다라간에게 수첩을 돌려주며 수첩에 적힌 기 토르스텔이란 이름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소설은 다라간의 기억 저편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기 토르스텔, 나아가 다라간 그 자신의 과거로 향한다.

일견 전반부는 추리소설을 연상시킨다. 갑작스레 주인공의 일상 가운데 끼어든 의문의 남녀, 그들이 던진 '기 토르스텔'이란 이름, 그 이름을 열쇠삼아 잊힌 과거로 향하는 전개까지 모두가 그렇다. 하지만 이야기가 과거로 향하면 향할수록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낀 풍경이 펼쳐지는 듯하다.

혼란스러웠던 2차대전 이후의 유럽, 불성실한 부모 밑에서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파트릭 모디아노 자신의 삶을 이 소설과 떼어 놓고 생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고독과 불안, 망각과 불명확한 기억이 혼재한 과거로의 여정 속에서 파트릭 모디아노가 찾아낸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몽환적인 분위기 가운데 단정하고 매끄러운 문장이 매력적이다. 

"장...... 오늘밤 나랑 같이 있어줄래?"
그녀가 그를 거실로 이끌었다. 불은 켜지 않았다. 소파에 자리를 잡았을 때, 그녀가 몸을 숙이고 그의 귀에 속삭였다.
"내가 여기서 나가야 할 때가 되면, 블랑슈 광장에 있는 네 방에 나를 받아줄래?"
그녀가 그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또 나직이 말했다.
"우리가 전에 몰랐던 사이인 것처럼 해. 그럼 쉬워......" -120p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기자와 살인자 - 2013 아시스 상 수상작

재닛 맬컴 지음, 권예리 옮김, 이숲(2015)


태그:#기자와 살인자, #LAST,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김성호의 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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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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