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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끝이 영친왕. 2012년 덕수궁 공사 현장에서 찍은 사진.
 왼쪽 끝이 영친왕. 2012년 덕수궁 공사 현장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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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8일이 충무공 탄신일로 지정되지도 않았고 지정될 리도 없었던 일제강점기 하의 1920년 4월 28일. 이날 식민지 조선에는 대단한 뉴스가 있었다. 고종의 아들인 영친왕 이은이 일본 왕족 이방자와 결혼한 일이었다.

친왕이란 표현은, 황제의 아들 중에서 황태자가 아닌 사람을 가리켰다. 이은은 1900년 네 살 나이로 친왕이 되면서 영친왕이란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1907년 고종이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순종이 황제가 되면서, 이은은 황태자가 되었다. 순종한테 아들이 없어서 이복동생이 황태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은은 1910년 대한제국 황실이 이(李)왕실로 전락함에 따라 이(李)왕세자가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1920년 4월 28일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즉 이방자와 결혼했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 황족의 몸에 일본인의 피를 섞고자 했다. 그래서 이은과 이방자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이 결혼은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치욕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일본 세상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결혼은 공식적으로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달리 쓸쓸하고 괴로운 한 사람이 있었다. 이 결혼 때문에 파혼을 당한 민갑완이라는 처녀였다. 정확히 말하면, 영친왕으로부터 파혼을 당한 게 아니라, 일본 때문에 파혼을 당한 사람이었다. 

 회고록 표지에 실린 민갑완의 사진.
 회고록 표지에 실린 민갑완의 사진.
ⓒ 지식공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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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이 성립된 지 8일 뒤인 1897년 10월 20일, 민갑완은 명문가인 여흥(여주) 민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균관 대사성(총장) 등을 역임한 민영돈이었다. 민갑완은 2년 전에 시해를 당한 명성황후와 14촌 관계였다. 명성황후는 여흥 민씨 27대손이고 민갑완은 29대손이다.

민갑완이 출생한 날에 태어난 남자아이가 있었다. 물론 수많은 남자아이들이 이 날 태어났다. 그런 남자아이 중 하나가 바로 영친왕이다. 그러니까 민갑완과 영친왕은 같은 해, 같은 날 태어났던 것이다. 이런 두 사람이 10년 뒤인 1907년에 약혼을 했으니, 이 정도면 상당한 인연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1907년 초부터 한국 황실은 분주했다. 영친왕의 배우자를 뽑는 간택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민갑완도 이 간택에 지원했다. 그는 초간택(1차 심사)을 통과해서 재간택(2차 심사)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미 이 단계에서 그는 사실상의 내정을 받았다. 앞으로 남은 재간택과 삼간택(3차 심사)은 그냥 형식에 불과했다. 시간은 민갑완 편이었다.

그런데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세상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른바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고종은 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고자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단을 파견했다. 이 일로 그는 일본의 미움을 사서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민갑완이 초간택을 통과한 뒤에 세상은 이렇게 혼란스러웠다.

정치적 혼란 때문에 재간택은 무기한 연기됐다.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가자, 황실에서는 연내에 마무리할 목적으로 간택 절차를 약식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재간택·삼간택을 치르지 않고, 민갑완을 최종 합격자로 결정한 것이다. 

초간택이 열릴 당시만 해도, 이은의 작위는 영친왕이었다. 그랬던 영친왕이 간택이 끝날 시점에는 황태자가 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고종이 쫓겨나고 순종이 황제가 되면서 영친왕이 황태자가 됐던 것이다. 

이 때문에 민갑완은 황태자비 내정자라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친왕의 부인을 뽑는 간택에 지원했다가 황태자의 부인으로 뽑힌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책봉식이었다. 책봉식만 치르면 정식으로 황태자비가 되는 것이었다. 그 전까지는 약혼 상태였다.

약혼 당시, 민갑완은 열한 살이었다. 열한 살짜리 소녀는 조만간 황태자비가 되고 나아가 황후가 될 사람이었다.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소녀였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유학을 명분으로 황태자 이은을 일본에 데려간 것이다. 이토는 얼마 후에 데려오겠다고 하면서 이은을 데려갔다. 좀 불안하기는 하지만, 희망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이은의 생모인 엄귀비 못지않게 민갑완도 희망을 걸었다. 예비신랑이 돌아올 날만 기다린 것이다. 민갑완은 황실에서 보내준 약혼반지를 보면서 그날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황태자는 끝내 민갑완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온 것은, 황태자가 일본인과 약혼한다는 소식이었다. 이때는 국권 상실 6년 뒤인 1916년이었다. 민갑완이 스무 살이었을 때다. 이때 이은의 공식 신분은 황태자가 아니라 이왕세자였다. 하지만 민갑완에게는 여전히 황태자님이었다. 그런 황태자님이 일본 여자와 약혼을 한다는 소식이 들린 것이다. 

이방자.
 이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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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이 약혼한다는 소식이 들림과 동시에 민갑완은 파혼 통보를 받았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뒤이어 불쾌한 요구까지 받았다. 약혼반지를 반환하라는 것이었다.

열한 살부터 스무 살까지 10년간이나 간직했던 약혼반지였다. 이 반지와 함께 10대 시절을 보냈다. 이것을 보면서 삶의 위안을 삼았다. 그런 반지까지 내놓으라 하니, 슬프다 못해 불쾌하기까지 했다. 이 같은 심정은 민갑완의 회고록인 <백년 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회고록은 현재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정혼녀>라는 책에 담겨 있다.

집안 어른들은 10년이나 지난 이제 와서 약혼반지까지 내놓으라는 것이냐며 반발했다. 불쾌해서라도 안 돌려줄 분위기였다. 하지만, 파혼을 주도하고 반지 반환을 요구하는 실체는 영친왕 측이 아니라 일본 정부였다. 민씨 집안은 일본 정부를 상대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반지를 내놓고 말았다.

이 일은 민씨 가문에 충격이 됐다. 명성황후 시해를 겪은 집안이었다. 황후 시해 때만큼은 못해도, 이번 일 역시 분명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 충격으로 인해 여러 사람이 쓰러졌다. 민갑완의 할머니가 쓰러지고, 6개월 뒤 아버지 민영돈도 쓰러졌다. 집안에 줄초상이 난 것이다.

이렇게 민씨 가문이 상처를 입은 뒤인 1920년, 영친왕과 이방자는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당시 민갑완은 병석에 누워 있었다. 계속되는 불행으로 심신이 지쳐 있었던 것이다. 그가 병석에 누워 있는데도, 영친왕의 결혼 소식은 빠짐없이 들려왔다. 신문을 통해서도 들리고,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도 들렸다. 회고록에서 민갑완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안 보고 안 들으면 약이 되나, 듣고 보면 해가 된다더니, 오가는 사람마다 한두 마디씩 지껄이는 말들이 나에겐 가시와 같이 아팠다. …… 누운 채로 혼령이 되어 쥐도 새도 모르는 어딘가로 한없이 가고만 싶었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민갑완에게 일본은 더한 것을 요구했다. 민갑완이 하루빨리 시집을 가도록 주변 사람들을 움직인 것이다. 일본 사람 이방자한테 약혼자를 빼앗긴 민갑완이 처녀로 남아 있으면 일본의 이미지가 나빠질 수 있다는 게 총독부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통해 민갑완에게 결혼을 부추긴 것이다.

민갑완은 그런 강요를 거절했다. 명문가들은 파혼 당한 딸을 다른 데로 시집보내지 않았다. 가문의 수치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민갑완 본인이 결혼을 원치 않았다. 파혼을 당한 뒤로 민갑완은 독신을 결심했다. 그런데도 일본은 계속해서 결혼을 강요했다.

압박에 시달리던 민갑완은 "3개월만 중국에 갔다 오겠다"며 총독부에 출국 허가를 신청했다. 미심쩍었던 총독부는 "재산을 담보로 내놓고 갔다 오라"고 말했다. 경기도 시흥에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대규모 토지가 있었다. 민갑완은 이 땅을 내놓기로 했다.

총독부의 요구 조건은 더 있었다. 남들 몰래 은밀히 갔다 오라는 것이었다. 공개 여행을 하게 되면 민갑완이 국제적으로 부각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그래서 민갑완은 어머니 및 남동생과 함께 새벽에 일찍 은밀하게 집을 나와 기차로 인천까지 간 다음, 거기서 중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회고록을 보면, 이 과정은 거의 007작전 수준이었다.

남동생만 중국행 배에 함께 타고, 어머니는 인천항에서 되돌아갔다. 인천항 부두에서 두 모녀는 이별을 했고, 이것은 영원한 작별이 되고 말았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민갑완이 중국에 있는 동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민갑완은 저 멀리 중국 땅에서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했다. 자신의 파혼 때문에 할머니와 아버지가 충격을 받고 세상을 떠난 데 이어 어머니의 임종마저 보지 못했으니, 민갑완으로서는 슬픔과 죄스러움으로 더욱 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1923년 당시의 영친왕과 이방자.
 1923년 당시의 영친왕과 이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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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으로 떠난 민갑완은 서해 북쪽 요동반도를 거쳐 서해 서쪽 산동반도를 지나 중국 남부 상하이에 정착했다. 이때가 1923년이다. 민갑완의 나이는 27세였다. 영친왕도 27세였다.

총독부는 민갑완이 약속을 어기자 스파이를 파견했다. 민갑완을 감시할 목적이었다. 이로 인해 민갑완은 상하이에서마저 일본의 감시를 의식하며 살아야 했다. 그런데 일본 측은 감시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민갑완의 생활을 훼방하기까지 했다.

상하이에 정착한 민갑완은 마음을 붙일 목적으로 미국인 교장이 운영하는 암마시스쿨에 입학했다. 하지만 일본이 학교에 압력을 가하는 바람에, 민갑완은 더 이상 다닐 수 없었다. 학교 측이 민갑완에게 그만 나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민갑완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는 게 싫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중국에 체류한 민갑완은 동생이 낳은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키우는 일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그렇게 살다가 중국 생활 22년 만인 1945년 49세 나이로 해방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6년 그리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귀국한 민갑완은 장학사업에 욕심을 냈다. 불우한 아이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그것마저 여의치 않게 되었다. 그렇게 살다가 1968년에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항상 무언가를 하려 했지만 매번 막히기만 했던 삶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1910년 국권 상실은 우리 모두에게 비극이었다. 이 비극이 민갑완에게는 직접적으로 파혼을 의미했다. 나라의 비극이 개인의 비극으로 직결됐던 것이다. 민갑완은 20세기에 우리 민족이 겪었던 비극을 개인적 차원에서 짊어지고 살았던 사람이다.


태그:#민갑완, #영친왕, #이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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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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