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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선수의 일장기를 지워 보도한 1936년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 4면 기사(좌)와 동아일보의 지방판 조간 2면 기사
 손기정선수의 일장기를 지워 보도한 1936년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 4면 기사(좌)와 동아일보의 지방판 조간 2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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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29일 오전 10시 33분]

청전 이상범이 1936년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에 관여한 것을 떠올리며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고자 한다(관련 기사 : 손기정 일장기 지운 미술기자, 친일인명사전에 등록).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금메달을 획득한 사실을 보도하면서 그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운 채 보도한 언론사는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였다. 한때 일부 지식인들은 <조선중앙일보>가 <동아일보>보다 12일 앞서 일장기 말소 사진을 보도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 일장기가 지워진 1936년 8월 13일 치 <동아일보> 지방판 기사가 발굴되면서 <조선중앙일보> 원조설은 깨졌다. 최근의 <동아일보>가 보수화했다고 해 굳이 지난날의 잘한 일조차 왜곡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동자로 알려진 이길용 기자가 쓴 수기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세상이 알기는 백림(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살 사건이 이길용의 짓으로 꾸며진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내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싣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총독부에서 일본 본토를 가리킬 때 쓰도록 강요한) 내지(內地)라는 글을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1948, 모던출판사)

일장기 말소 사건의 전말

결국 일장기 말소 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1936년 8월 13일 치 <조선중앙일보> 4면 기사와 <동아일보> 지방판 조간 2면 기사에 일장기가 말소된 사진이 실렸다. 하지만 총독부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이로부터 12일 뒤인 8월 25일 치 <동아일보> 2면의 일장기 말소사진이 다시 기사화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동아일보>는 8월 29일부터 무기정간 처분을 당했고, <조선중앙일보> 역시 고의에 의한 일장기 말소로 판명되자 9월 4일에 자진해 '근신의 뜻을 표하고 당국의 처분이 있을 때까지 휴간한다'는 사고(社告)를 게재함과 동시에 휴간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이 사임했으며, 사회부 현진건 부장과 이길용, 조사부의 이상범 화백, 사진부의 신낙균 등 8명이 구속돼 40여 일간의 고초를 겪고 언론기관에 참여하지 않을 것, 시말서(경위서)를 쓸 것, 다른 사건이 있을 때 가중처벌을 각오할 것 등 서약서를 쓰고 석방됐다.

한편, 우리는 일장기가 지워진 손기정 선수의 수상식 사진은 수없이 봤어도 그 후 그가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다. 다음 사진은 바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손기정 선수의 귀국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마치 경찰에 의해 피의자가 체포돼 끌려가는 듯한 모습이다.

손기정의 귀국은 이랬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입국 모습.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입국 모습.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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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당시 귀국의 모습은 어땠을까? 그는 1936년 초가을 비행기로 인도, 싱가포르, 일본을 거쳐 서울 여의도에 도착했다. 만일 당시 통상의 입국 경로인 부산을 통해 기차로 상경했다면 열차가 멈추는 곳마다 환영 인파가 몰렸을 것이고, 그야말로 전국이 그에 대한 환영 열기로 들끓었을 것이다.

하지만 총독부는 따로 비행기편을 마련해 울산을 거쳐 여의도 비행장에 내리게 했다. 당시 여의도는 경성과는 동떨어진 곳으로 시내로 들어오는 다리가 전혀 없었다. 여의도가 시내로 연결된 것은 1970년 마포대교 완공 이후다. 그전까지는 오직 신길동으로만 다리가 놓여 있던 섬에 불과했다. 총독부의 이런 철저한 통제 속에 우리의 금메달 리스트를 환영하러 온 사람은 그의 형 손기만씨와 그의 모교 양정고보의 안종원 교장뿐이었다.

모교에서는 전교생이 대대적인 환영준비를 하고 기다렸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의도에서 바로 그의 하숙집이었던 당시 체육교사 김수기의 집으로 향했다. 입국날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그는 항상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다고 한다.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나라 잃은 백성,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나치 독일로부터 받은 나무

손기정이 나치 독일로부터 받은 월계수 묘목(좌)은 그의 모교 양정고보에 식재됐고, 학교가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하면서 현재 손기정 기념공원으로 바뀌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손기정이 나치 독일로부터 받은 월계수 묘목(좌)은 그의 모교 양정고보에 식재됐고, 학교가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하면서 현재 손기정 기념공원으로 바뀌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 자료사진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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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손기정 선수는 모교인 양정고보에 아돌프 히틀러가 총통이었던 나치 독일로부터 받은 월계관 기념수를 심었다. 손기정기념재단 이준승 사무총장은 "시상식 당시 히틀러가 손기정 선수에게 직접 메달과 월계수 묘목을 수여하지는 않았지만, 히틀러가 손기정 선수를 불러 악수를 했다"라고 전한다.

원래 그리스에서는 지중해 부근에서 자라는 월계수의 잎이 달린 가지로 월계관을 만들었으나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북미 원산인 참나무의 잎이 달린 가지를 대신 사용했다. 독일인은 참나무를 신성시하며 독일서 발행하는 유로화 동전 1, 2, 5센트 뒷면에 독일산 참나무(robur) 잎을 새겨 넣을 정도로 게르만 민족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히틀러가 올림픽을 통해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고 독일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계기로 삼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니 독일산 참나무 잎으로 월계관을 만든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손기정에게 수여한 참나무는 역설적이게도 훗날 독일의 적국인 미국의 참나무(pin oak)다. 이준승 사무총장에 따르면 "당시 독일이 여러 국가로부터 참나무 수입을 하던 터라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고 한다. 이 묘목이 크고 보니 미국산 참나무였다는 것이 확인됐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에피소드다.

어쨌든 손기정이 받아 온 월계수는 그리스의 월계수가 아니며, 그것을 수여한 주체가 나치 독일이었을지라도 손기정이 올림픽에서 받아안은 영광의 금메달과 월계관은 식민지 백성인 조선인들에게는 더 없는 희망이었으리라 상상해본다. 현재 양정중·고등학교는 1991년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했고, 월계수가 심어진 옛 교정은 현재 손기정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서울 중구 소재).


태그:#손기정, #일장기말소사건, #월계수, #청전 이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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