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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에서 도쿄까지 걸어서?

16.04.22 00:49l

검토 완료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1358'이 남의 옷을 잔뜩 꾸며 입고 나타난다. 먹을 것이나 공구와 같은 요긴한 것이라도 건지려 애쓰는 요시다를 비롯한 다른 두 명은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때, 괜찮아? 이 정도면 검문소도 통과할 것 같지 않아?"

"아니, 지금 방사능 오염지역에서 수감자들이 탈출해서 찾아내려고 군인과 경찰들이 눈을 벌겋게 뜨고 있습니다. 그렇게 입고 다니면 더 눈에 띌 것이라는 것 진짜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요시다가 마뜩잖아 핀잔을 준다.

"뭐가 어때서 그래? 어쨌든 죄수 같지 않은 것은 확실하지 않냐고?"

'1358'은 되레 어깃장을 놓는다.

"얼른 다른 것으로 갈아입으세요. 지금 그런 거 가지고 다툴 때가 아닙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면 될 거 아냐?"

'1358'은 골을 내면서도 팀장 격인 요시다의 말을 따른다.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꽝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1358'이 트레이닝복과 운동화를 갖춰 입고 나타날 무렵 가네다팀이 도착했다. 용케도 제대로 찾아왔다.

"나머지 한 팀은 아직 안 왔어요?"

물 한 모금 마시고 숨을 돌린 가네다가 요시다에게 묻는다.

"아니. 아직 안 왔는데."

"이상하네. 분명 지도상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가까운 길로 갔으니 당연히 우리보다 먼저 도착했어야 하는데…."

"오는 길에 군인들을 좀 봤나?"

"아니요. 우리는 대로나 간선도로에서 떨어진 산길로 돌아와서 검문소 같은 것은 보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주요 도로는 막혔다고 보는 게 맞을 거 같아. 외국에서 죄수들이 탈주극을 벌이는 경우에는 우선 길부터 차단하는 게 순서잖아. 영화에서도 그렇고. 일단 날이 저물고 있으니 오늘은 여기서 묵는 것으로 하지. 나머지 한 팀을 기다리는 겸."

"먹을 것은 좀 있나요?"

"응. 빈 집들 뒤져서 찾아보니까 오래됐지만 쌀이 아직 남아 있더라고. 유통기한이 지나기는 했지만 통조림 같은 것들도 몇 개 있고."

"그럼, 좀 일찍 밥을 먹든지 죽을 먹든지 합시다. 해 떨어지고 나면 불빛이 새 나가면 안 되니까요. 밤에는 교대로 경계를 세우고요."

"어이, 젊은 양반. 제법인데. 어떻게 병정놀이에 대해 그리 잘 알아?"

장난기가 발동한 '1358'의 하릴없는 말이다.

"그냥, 직감적으로 떠오르네요. 우리가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려면 그 수 밖에 없잖습니까?"

가네다가 뜻밖에 정색을 하고 말하자 '1358'은 머쓱할 따름이다.

밥 짓는 당번은 '1358'이 맡았다. 과거 어릴 적 조직에서 합숙을 할 때 막내로 들어가서 끼니마다 밥을 한 경험을 살렸다. 방사능에 오염됐을지도 모를 동네 우물물을 받아서 군내 나는 쌀을 박박 씻는다. 몇 번 정성스레 거듭한다. 돌 몇 개를 쌓아 올려서 만든 부뚜막에 커다란 냄비를 걸어 놓고 쌀을 안친다. 그리고 흔티 흔한 마른 잡목과 무너진 건물의 목재를 주워다가 눈물을 흘려가며 불을 피운다. 제법 불도 괄하다.

금세 밥 냄새가 입안에 군침을 돌게 만든다. 뜸도 제대로 들인다. 밥이 다 됐다. 여덟 명 사내들이 충분히 먹을 만큼 양도 넉넉하다. 다른 집을 뒤져서 구해온 장아찌에 소시지 통조림 몇 개와 치즈를 넣어 끓인 국적 불명의 국, 나름대로 구색은 맞춘 저녁이다.

허겁지겁 먹어대는 모습이 2006년 장진 감독 영화 <거룩한 계보>에서 감옥을 탈출한 조폭 두목 오른팔 동치성(정재영)과 정순탄(류승룡) 일행이 시골 동네에 있는 '평화사진관'이라는 곳에 들어가 주인에게서 밥을 지으라고 한 다음 우습도록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장진 감독 영화 <거룩한 계보>에서 탈옥한 조직폭력배 부두목 동치성(정재영)일행이 한 시골 사진관 장면. 그들은 세탁소에서 옷을 훔친 다음 사진관 주인을 묶어 놓고 옷을 갈아 입는다. ⓒ 영화 <거룩한 계보>

하지만 영화와는 달리 현실에서 친구와 같이 수용소에 있단 재소자들이 죽거나 다치는 현실을 겪은 사내들에게는 웃음은 없었다. 어쩌면 그들 최후의 만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밥 먹는 장면은 자못 숙연하다. 아무도 떠드는 사람이 없다. 하다못해 수다쟁이 '1358'도 조용하다.

곤하기는 곤했나보다. 생과 사를 넘나들면서 탈출했다. 더욱이 네댓 시간 산길을 걸어서 후쿠야마 원전 근처까지 오다보니 그럴 것이 당연하다. 밥을 먹자마자 경계를 서는 사람만 제외하고는 2층집 곳곳에 자리를 잡고, 금방 곯아떨어진다. 하지만 가네다와 요시다는 마음 편히 잠들 형편이 못된다.

"가네다, 이제 어떻게 하지?"

요시다가 총책이지만 탈주에 대한 계획은 가네다가 얼개를 그렸다. 그래서 요시다는 가네다 다음 수가 무엇인지 궁금해 한다.

"이제 별수 없습니다. 내일 상황을 봐서 무조건 도쿄 쪽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혼다 죽는 거 보셨죠? 우리도 자칫하면 개죽음 당할 상황입니다. 가능한 한 도쿄에서 가까운 쪽, 도시로 가서 우리가 왜 수용소에 갇혔는지, 왜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했는지, 지금 수용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리는 방법 이외에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자네도 알다시피 도로 곳곳은 차단됐을 텐데 어떻게 도쿄 쪽으로 갈 수가 있나?"

"어차피 우리는 한 번 피를 봤습니다. 우리를 발견하면 사살해도 좋다고 명령이 떨어졌을 게 당연합니다. 도로가 막혔다면 뚫어야죠. 우리에게 소총 3자루가 있으니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적으로도 열센데다 우리가 정규군을 상대로 어떻게 이길 수 있다는 거야?"

"일단 우리는 도쿄 쪽으로 다가가지 못하면 최소한 다시 수용소에 갇혀 바깥세상은 구경도 못하게 될 겁니다. 그럴 바에야 아예 죽는다고 생각하고 돌파해야죠. 정면 돌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네다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불길한 기운이 가네다를 덮쳐오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뒤척이다가 풋잠이 든다.

낮이 점점 짧아지는 초가을 새벽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온다. 그러나 그때까지 한 팀은 합류하지 못했다. 길을 잃었든지 아니면 모두 잡혔든지 둘 중 하나다. 만일 잡혔다면 이곳도 안전하지 못하다. 가네다는 서둘러서 아직 잠자고 있는 일행들을 깨운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지역을 벗어나야 한다. 떠나기 전에 갖고 있는 쌀과 부식을 나눈다. 여건이 아주 좋지 않아 뿔뿔이 흩어질 경우에라도 한 사람이라도 수용소 소식을 알려야하기 때문이다. 모두 죄수복을 일반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어디서 찾았는지 제법 어울린다. 늘 같은 옷만 입었던 사람들이 새롭게 보인다. 유니폼이라는 게 사람을 관리하기 쉽게 한꺼번에 가둬놓기 위한 복장이라는 사실이 새삼 느껴진다.

가네다는 마지막으로 지도를 확인한다. 후쿠시마에서 해안선을 따라 이바라키, 지바를 지나 도쿄로 진입하는 게 가장 수월하다. 하지만 쉬운 만큼 경계와 검문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두 팀으로 나눠야 합니다. 동전던지기로 정하죠."

가네다 팀이 해안선을, 요시다 팀이 도치키를 지나 사이타마를 거쳐 도쿄로 가는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걸어가기는 어려울 거 같습니다. 거리가 꽤 되니까요. 지금부터 두 팀은 혹시 쓸 만한 자동차가 없는지 찾아보세요. 차가 없으면 자전거라도 타고 가야 하니까 염두에 두고요."

가네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1358'이 대꾸한다.

"아니, 어디 가서 자동차를 구하나? 자동차가 무슨 조약돌이라도 되나? 사람 사는 곳에 가서 훔치든지 빼앗든지 해야 오토바이라도 구할 거 아냐."

사실 그 말이 맞다. 지금 자동차를 구하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남의 것을 빼앗든 훔치든 하는 수밖에 없다. 일단 사람이 사는 마을까지는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여덟 명 남자들은 일렬로 눈에 띄지 않게 큰 길을 버리고 산길을 걷는다. 마치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에서 독일군이 점령한 지역을 한 분대가 전위병과 후위병을 두고 몰래 이동하는 것처럼 조심스럽다.

미국 시리즈 영화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에서 윈터스 대위(데미안 루이스)가 분대원들을 이끌고 독일 점령지를 뚫고 매복을 나간다. ⓒ 영화 <밴드 오브 브라더스>

그러나 그렇게 경계하며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한두 시간 걸어간 다음 모두가 알아챘다. 당국에서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산길까지 감시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탈주자들은 중간에 한 차례 쉬면서 생쌀을 먹은 것을  빼놓고 예닐곱 시간을 내리 걷자 볼멘소리를 쏟아낸다.

"이렇게 무작정 산길을 걷기만 하면 어떡해? 일단 근처 마을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면서 가야할 것 아니야?"

'1358'이 가네다에게 퉁명스럽지만 일리 있는 얘기를 한다. 가네다는 잠시 쉬자고 청한다.

"위험하다고는 해도 일단 산 아래로 내려가야 마을을 찾을 수 있잖아. 내려가자. 그래야 밥도, 자동차도 있지. 이 산골짜기에 뭐가 있겠어."

'1358'이 자꾸 재촉한다. 가네다는 요시다와 상의한 다음 하산하기로 한다.

"이제부터 사람이 사는 곳으로 내려갑니다. 될 수 있으면 자연스럽게 행동하세요. 괜히 사람들 눈치를 본다든지, 어색하게 굴지 마세요. 경계심을 갖게 만들면 안 됩니다. 웃는 얼굴로 친근감을 주는 것이 우리들이 안전하게 도쿄로 가는 길을 위해 가장 중요합니다."

가네다는 전체와 눈을 맞춰가며 진심으로 부탁한다.

그들은 운이 좋았다. 산비탈을 내려오자마자 멀리 2차선 지방도로가 눈이 들어온다. 산 아래 익어가는 벼가 가득한 논이 제법 넓게 펼쳐져 있다. 논 사이로 비교적 길게 길이 곧게 뻗어 있어 차량 검문을 하는지 빤히 보인다. 탈주자들은 조금 안도한다. 논이 있다는 얘기는 근처에 농가나 마을이 있다는 것이다. 세심한 가네다는 그래도 큰길은 피해서 논두렁길을 택한다. 한꺼번에 8명이 몰려다니는 것도 삼간다. 두 패로 나눠서 조금 거리를 두고 마을이 있음직한 곳으로 향한다. 이삼십여 분을 걸어가자 야트막한 언덕 아래 스무 개 남짓 농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탈주자들 발걸음이 빨라진다. 하지만 가네다는 막아선다.

"지금 이렇게 다짜고짜 마을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금방 발견될 뿐만 아니라 무슨 일로 이곳까지 왔는지 물으면 답이 궁색합니다."

가네다는 저녁때까지 기다리다 마을로 들어가 한적한 농가에서 하루 밤 묵기로 했다. 일행들과 함께 여행 중인데 버스가 고장 나서 한참을 걸어왔다는 핑계거리도 만들었다. 요즘 시골 농가에는 대부분 노인들이나 피붙이 한둘 밖에 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그 집을 '접수'하기도 수월하다는 판단에서다.

늦은 오후 들판 한구석 풀밭에는 사내 여덟이 올망졸망하다. 앉아 있는 사람, 서 있는 사람, 누워 있는 사람, 그야말로 시간 죽이기에 전념하고 있다. 모두들 심드렁하니 무료함에 지칠 때쯤 갑자기 '1358' 주위로 몰려든다. 잽싸게도 그는 마을에 몰래 나가 담배꽁초 한 움큼을 주워온 것이다. 꽁초가 권력이 됐다. 모두가 한 모금 빨게 해 달라고 모여든다.

"가만히 있어 봐. 나부터 한번 피워보게. 기다리라니까."

라이터도 곁들여 장만해 온 '1358'은 그 권력을 마음껏 누린다. 그리고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품을 내리듯 선심 쓰며 담배꽁초를 나눠준다. 어느새 들판은 흡연구역으로 변했다.

"대장, 자네도 하나 줄까?"

슬그머니 가네다에게 다가온 '1358'은 꽁초 중에서 긴 '장초'를 건넨다. 수용소에 들어오기 전 하루에 한 갑은 피우던 가네다였다. 거절할 수 없었다. 담배를 한숨에 훅 빨아들인다. 몽롱하고 다리가 풀린다. 어떻게 수용소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나 싶다. 시끌벅적 담배꽁초 해프닝이 끝나고 나니 조용히 석양이 비낀다.

너른 들판이 어두워지고 언덕 아래 농가들에 하나 둘 불이 켜진다. 어둠이 깊어지면서 동네에서 외따로 떨어진 집 불도 들어온다. 그네들이 목표로 삼은 집이다. 모두들 살금살금 도둑고양이 모양 그 집으로 접근한다. 다른 이들은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주위를 살피며 기다린다. 인상이 깨끗하고 곱상한 교토대 학생 가네다가 문을 두드린다.

"계십니까? 아무도 안 계세요?"

"누구세요?"

순진한 눈망울을 가진 30대 여성이 문을 열고, 상냥하게 맞이한다.

"아, 저희들은 도쿄에서 센다이 쪽으로 여행을 가다가 버스가 고장났습니다. 핸드폰 배터리도 바닥났고, 자동차 정비소에 연락도 할 수 없어서 여기까지 걸어서 왔습니다. 잠시 전화 좀 빌려 쓰고, 실례해도 될까요?"

"그러세요. 외지에 와서 힘든 일 당하셨네요. 일단 들어오세요. 할머니! 손님이 왔어요."

'전혀 의심이나 질문도 없이 모르는 사람을 집으로 들인다? 이게 시골 인심인가?'

가네다는 의아해 하면서도 한편으로 안심하고 사람들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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