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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금이 문제였다. 2015년, 첫째가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갔다. 대학 등록금은 500만 원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했다. 대개 합격자 발표가 나면 쏜살같이 내야 했다. 마감을 넘기면 합격이 취소된다. 대부분 학교에선 카드 결제가 불가했다. 아이 대학 등록금 걱정을 하다 보니 내 대학 첫 등록금에 얽힌 일화가 생각났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둔 겨울밤, 난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가 내 등록금 준비하느라 여기저기서 돈 빌리러 다니셨다고 하시더라. 엄마한테 들었어. 등록금 마감이 엄청나게 짧잖아? 그 이야기 들으니까 진짜 너무 죄송하더라."

내 이야기가 끝나자 친구가 내 말을 이어받았다.

"나도 아버지한테 죄송했어. 아버지가 내 대학 등록금을 미리 다 준비해 두고 합격자 발표만 기다리셨는데…. 내가 후기대까지 다 떨어졌잖아. 아버지가 내색을 안 하셨는데 실망하셨다고 엄마가 말씀하셨어. 내가 진짜 불효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친구는 자신의 불효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철없는 나는 친구의 불효엔 관심이 없었다. 오직 부모님의 기대를 한몸에 받아온 친구가 부러웠다. 물론 조금만 생각해봐도 나와 친구의 처지는 너무 달랐다. 친구는 첫째였고 나는 사남매의 막내. 내 위로 언니 오빠가 대학교를 졸업했고 한명은 결혼을 했다. 부모님께는 나 말고도 신경 써야 할 자식들이 많았다. 그러니 내 등록금을 미리 준비하는 건 쉽지 않은 일. 그걸 다 알지만 난 친구가 부러웠다. 그래서 그때 난 결심이라는 걸 했다. '내 아이가 대학에 입학할 땐 첫 등록금을 미리 준비해 두리라.' 이렇게 마음을 먹었다.

그 결심을 한 지 벌써 25년이 지났다. 그런 결심을 했던 걸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대입 1년 남은 시점에 그 다짐을 기억해냈으니 말이다. 남은 1년간 적금을 들어 나 혼자 힘으로 등록금을 조금이라도 준비해야지. 2015년 2월부터 1년간 생활비를 절약하고 부수입까지 모으면 될 것 같았다. '등록금 전액을 마련하는 건 무리고, 200만 원 정도 만들려면 다달이 얼마씩 모아야 하지?' 생각했다. 17만 원이면 될 것 같았다. 월 17만 원 정도면 내가 만들 수 있는 수준이었다.

'등록금 모으기 비밀 프로젝트'... 걸렸다

비밀 적금을 만들었지만... 걸렸네요.
 비밀 적금을 만들었지만... 걸렸네요.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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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은행에 갔다. 첫째 이름으로 정기예금 통장을 만들었다. 만기일은 2016년 2월 9일. 등록금을 낼 때 남편에게 200만 원이 든 통장을 꺼내주면 아이도, 남편도 좋아할 것 같았다. 딸랑 17만 원 입금한 통장이었지만 보면 볼수록 기분이 좋았다. 통장을 내려놓고 나는 세탁기에 빨래를 꺼내 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지도 않게, 첫째가 들어왔다.

"오늘 단축 수업했어요."

나는 통장을 책장 위에 올려둔 걸 잊었다. 베란다 있는데 아이가 물었다.

"엄마, 이거 뭐에요? 내 이름을 된 통장인데, 처음 보는 건데요?"

아, 망했다. 1년 뒤, 만기되면 '짠' 하고 꺼내려고 했는데 만들자마자 첫째에게 들켰다. 실없이 웃으며 말했다.

"엄마가~, 내년에 네 등록금 낼 때 '짠' 하고 내놓으려고 오늘 만든 통장인데…. 만든 날 너한테 들켜버렸네."

아이가 웃는다. 감동을 위해 '비밀 통장'으로 두려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오픈 통장이 돼버렸다. 하필 오늘이 단축수업일 게 뭐람.

1년간 꼬박 적금을 부었다. 생활비도 절약하고 <오마이뉴스> 원고료도 모아서 다달이 17만 원을 만들어 넣었다. 1년이 지나고 아이는 수시로 대학에 합격했다.

심호흡 한번,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아이 등록금을 내야 하는데, 돈 좀 융통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아이 등록금을 내야 하는데, 돈 좀 융통해주세요"라고 말했다.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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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등록금 고지서가 2016년 1월 말에 나왔다. 등록금 납부 마감일이 2월 2일. 적금 만기는 2월 9일. 일주일 차이가 났다. 게다가 등록금 마감일에 1학기 기숙사비도 함께 마감이다. 등록금에 입학금을 합쳐 420만 원, 기숙사비는 한 학기에 120만 원. 곧 1학기 식권도 끊어야 하고 과학생회비도 20만 원이나 내야 한단다. 책값이며 기숙사에서 쓸 생활용품 구매하려면 소소하게 들어갈 돈도 꽤 있을 것이다.

남편 회사에서도 학비 지원이 일부 나오지만 그건 3월 말에나 받을 수 있는 돈이다. 게다가 등록금 마감을 안 지키면 불합격이 처리된다. 까딱 잘못하면 현금 흐름에 문제가 생길 지도 모르겠다.

현금을 미리 200만 원 정도 더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 누구한테 빌려달라고 할까. 경제적 형편과 친밀도, 그리고 거절했을 때의 어색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최적의 인물들을 꼽아봤다. 1차 답은 부모님. 2차 답은 언니.

1월 말, 심호흡을 한번 하고 친정에 전화했다.

"아버지, 저 정민인데요. 첫째 등록금 보태려고 제가 적금을 들었는데요. 그게 만기가 등록금 마감 일주일 뒤에요. 기숙사 비용도 내야 하고 또 연말 정산한 것도 세금을 더 내야 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100~200만 원만 융통해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괜찮을 거 같긴 한데 혹시라도 부족할까봐…. 남편 회사에서 등록금 지원이 3월에 나오니까 늦어도 그땐 갚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얼마? 100(만원)이면 돼?"

아버지는 통화 중에 엄마랑 말씀을 나누신다.

"정민이. 등록금 내야 하는데 돈이 부족한가 봐."
"200(만원)이면 좋을 거 같은데. 100(만원) 해주셔도 되고요. 나머지는 언니한테 말할게요."
"언니한테? 언니한테 뭐하러 말해. 엄마가 200(만원)은 해줄 수 있을 거야."
"당신, 200(만원)은 해줄 수 있지?"

아버지가 옆에 있는 엄마한테 묻고 있다.

적금통장 들고 뿌듯했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첫째 아들의 합격증과 등록금 적금 통장.
 첫째 아들의 합격증과 등록금 적금 통장.
ⓒ 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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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언니한테까지 말할 필요 없다는 아버지 말에 내가 왜 이리 울컥해지는지 모르겠다. 아버지가 해준 그 말이 무척 고맙다. 사실 아무리 가까운 자매 사이라도 돈 빌려달라고 말하는 건 쉽지 않다. 아버지는 그런 내 마음을 배려해 주신 거다.

내 첫 등록금 마련하느라 여기저기 돈 빌리러 다녔던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부모님께 돈 빌려 달라고 할 때도 심호흡 한번은 해야 하는데, 도대체 아버지는 얼마나 많은 심호흡을 하고 내 등록금을 만드셨을까?

난 친구의 부모님이 부러웠고, 우리 아버지와 달리 등록금 미리 마련하는 부모가 되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등록금 적금까지 들었는데 결국 부모님께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을 하고 말았다. 언니한테 말할 필요 없다며 날 배려해 주시는 부모님의 큰 사랑 앞에 서 있는 조그만한 내 모습이 보인다. 적금통장 들고 뿌듯해했던 내가 너무 부끄럽다. 그리고 부모님께 너무 죄송스럽다.

'아버지, 공부도 열심히 안 했던 막내딸 학비 마련해 주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어요. 고맙고 또 너무 죄송해요.'


태그:#등록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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