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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춘천시민언론협동조합이 발행하는 주간지 <춘천사람들>에 게재하는 기사로,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실립니다. [편집자말]
단원고 2학년 8반 교실.
 단원고 2학년 8반 교실.
ⓒ 오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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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4월 16일이 다가온다. 전 국민을 충격과 경악에 빠트렸던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 2주기가 돌아온다. 전체 희생자 304명,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 중 250명이 희생된 전대미문의 참사, 325명의 단원고 학생들 중 살아남은 학생은 단지 75명뿐이다.

말도 되지 않는 엄청난 사고가 터졌고 전 국민은 한동안 비탄에 빠졌다. 에어포켓이 어쩌고, 골든타임이 어쩌고 하며 희망고문에 열을 올리던 방송은 사고 몆 시간이 지나면서부터는 희생자 인양 중계방송에 바빴고 국민은 그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어떤 이는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다행스러운 것은 망각'이라고 한다. 그래서 흔히 '시간이 약'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망각해야 하는 일도 있고 망각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다.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세월호 사건이다.

세월호를 이대로 잊으면 안 되는 것은 우리 세대가 저지른 엄청난 사건을 치유와 재발방지 약속 없이 기억 속에 묻히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금요일에 돌아온다던 아이들,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

2014년 4월 15일 오후 9시, 승객 459명(청해진해운 발표)이 탑승한 세월호가 인천항을 출발했다. 사고 이후 알려진 사실이지만 실제로 세월호에는 474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이 승객들 중 325명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는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었다. 단원고 학생 325명은 3박4일간 제주도 수학여행을 떠났고, 금요일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금요일에 돌아온 학생은 단 75명뿐이었다.

2014년 4월 15일 밤 인천을 출발한 세월호가 4월 16일 오전 8시 45분께 진도 병풍도 동쪽 해상을 지나며 어떤 이유에선지 진행하던 반대 방향(북동쪽)으로 급선회하며 표류했다.

이 사실은 ▲ 오전 8시 52분 단원고 최덕화 학생, 전남소방본부에 첫 신고 ▲ 오전 8시 55분 세월호, 제주 해상교통관제(VTS)센터로 신고 접수 ▲ 오전 9시 04분 정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가동 ▲ 오전 9시 9분 해양경찰, 구조본부 가동 ▲ 오전 9시 31분 중대본, 청와대에 문자로 최초 보고 ▲ 오전 10시 00분  박근혜 대통령, "단 1명의 인명피해도 없도록 최선 다하라" 지시 ▲ 오후 3시 05분 정부·청와대·새누리당·국회, 실무회의 '사고 상황 점검 및 초동대책' 논의 ▲ 오후 5시 30분 박근혜 대통령 중대본 방문 "구조에 최선 다해 달라" 순으로 전개된다.

이런 엄청난 사고에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은 탑승자 숫자도 정확히 몰랐고 선장과 선원들은 자기들만 살겠다고 배를 버렸다. 더욱 충격적인 건 해경은 아이들과 일반 승객 보다 선장과 선원을 먼저 구조했다. '선내에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믿은, 금요일에 돌아온다던 18살의 아이들 250명은 그렇게 바다에 묻혔다.

세월호, 진도 해역 침몰과 구조 실패.
 세월호, 진도 해역 침몰과 구조 실패.
ⓒ 세월호국민대책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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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25톤의 배 304명이 수장되는 순간에 대통령은 없었다?

선체 길이만 146m 폭 22m, 무게 6825톤의 엄청난 규모인 세월호에 사고가 생기고 그 사고를 신고한 건 선장이나 선원들도 아닌 배에 타고 있던 단원고 2학년 최덕화 학생이었다. 최덕화 학생은 결국 희생자로 발견되었다. 배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고등학교 2학년이 배가 침몰하고 있다고 신고를 했는데 정작 선장과 선원들은 3분이나 지나서야 신고를 한 셈이다.

세월호 사고 일지를 보면 더 큰 문제인 건 정부와 대통령의 태도이다. 세월호 사고가 나고 1시간 10분이 지나서 대통령은 전화를 통해 '1명의 희생자도 없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부와 청와대, 국회가 실무논의를 시작한 건 '5시간이 지난 오후 3시 5분'이었고 대통령이 중대본을 방문한 건 '오후 5시 30분'이었다.

엄청난 사고가 터졌고 18살의 아이들 250명을 포함한 국민 304명이 말도 안 되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는데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대통령은 사고 7시간이 지나서야 모습을 나타낸 셈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대통령의 행적 7시간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정부 당국자나 언론은 우리나라는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했다. 그만큼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말을 믿는 국민이 얼마나 되는지는 의문이라는 지적이 거세다.

4월 16일에는 꼭 기억해야 하는 수많은 사연들이 있다

세월호 사고로 희생된 단원고 2학년 1반 유미지 학생은 3월 16일에 태어났다. 미지가 사고를 당한 날은 4월 16일이고 미지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은 5월 16일이었다. 이때 미지의 나이는 만 16살이었다.

세월호 사고로 희생된 사람들 중 현재까지 마지막 인양자로 되어 있는 황지현 학생의 사연은 너무도 아련하다. 7월 18일 세월호 식당칸에서, 294번째 희생자인 여성 조리사의 시신이 발견된 뒤 102일 만인 10월 29일 295번째 희생자 황지현양이 돌아왔다. 이날은 황지현양의 18번째 생일이었다.

공교롭게도 황지현양이 자기의 생일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날은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이 있던 날이다. 이날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진상규명 특별법 통과를 요구하며 대통령 앞에 무릎을 꿇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는 차 앞에 무릎을 꿇고 특별법 제정을 도와달라는 창현아빠 이남석씨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자리를 떴다. 20대 총선거를 앞두고 김무성 대표는 안산을 찾아 "2년 전 세월호 사고를 생각하면서 저미는 가슴을 안고 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바로 만우절 날에.

박근혜 대통령의 시정연설이 열린 지난 2014년 10월 29일 오전 국회 본청 앞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차를 타고 떠나려 하자 세월호 유가족 이남석씨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호소하며 무릎을 꿇었다.
▲ 김무성 앞에 무릎 꿇은 세월호 유가족 박근혜 대통령의 시정연설이 열린 지난 2014년 10월 29일 오전 국회 본청 앞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차를 타고 떠나려 하자 세월호 유가족 이남석씨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호소하며 무릎을 꿇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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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시정연설이 열린 지난 2014년 10월 29일 오전, 국회 본청 앞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타고 떠나는 차량 옆에서 세월호 유가족 이남석씨가 특별법 제정을 호소하며 무릎을 꿇었지만, 김 대표는 말없이 떠났다.
▲ 떠나는 김무성, 무릎 꿇고 떠나지 못하는 유가족 박근혜 대통령 시정연설이 열린 지난 2014년 10월 29일 오전, 국회 본청 앞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타고 떠나는 차량 옆에서 세월호 유가족 이남석씨가 특별법 제정을 호소하며 무릎을 꿇었지만, 김 대표는 말없이 떠났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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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된 아이들이 찍은 사고 현장 영상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에서 2014년 7월 17일 유튜브에 공개한 영상은 가슴을 울린다. 희생자 박수현 학생의 휴대폰 카메라에서 발견된 동영상에는 '세월호 선내 방송에서 봉을 잡고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방송음이 또렷하게 들린다. 이 말을 그대로 따른 아이들은 모두 희생되었고 이 방송을 하던 선원들은 해경에 의해 구조되었다.

침몰한 배 안에서 '엄마 사랑해'라는 마지막 동영상을 남긴 아이도 있다. 단원고 2학년 3반 박예슬양은 배가 기울어 설 수도 없는 순간에 동영상으로 '엄마 아빠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라는 마지막 인사를 영상으로 남겼다. 박예슬양도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세월호 사건의 올바른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을 촉구하는 416연대는 지난 3월 29일 논평을 통해 아래와 같은 의혹을 제기했다.

"4.16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특별조사위원회의 제2차 청문회 둘째 날인 29일 신문 과정에서 몇 가지 중요한 새로운 사실 관계와 의혹이 드러났다. 아울러 국정원과 청해진해운이 세월호 인수 과정부터 특수한 관계였다는 사실이 보다 분명히 드러났다. 해수부가 2014년 5월 세월호 인양에 대한 전문기관의 자문을 확보한 후에도 인양을 미뤄왔고, 특히 2014년 11월 수색을 중단한 후 유실방지대책을 9개월 이상 미루고 방치해왔음이 확인 되었다."

"둘째 날 신문과정에서 박종운 상임위원은 '청해진해운에서 운행하는 선박들의 운항관리규정을 보면 유일하게 세월호만 안전사고가 발생할 경우 국정원에 보고를 하도록 했다'며, 국정원과 세월호 사이의 관계를 추궁했다. 국정원은 '나미노우에호(세월호 도입 전 일본 이름) 도입 과정에서부터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김재범 청해진해운 전 기획관리팀장이 그 창구였다. 김 전 팀장은 국정원과 수시로 만나왔다. 사고 당시에도 김 전 팀장은 국정원 직원과 2번의 문자 외에도 2분 이상 통화했다."

국정원과 세월호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의문이 들게 한다.

4월 16일 10시 21분 세월호가 완전히 기운 후 구명조끼를 입은 한 학생이 배에서 조금 떨어진 물 위로 떠올랐다. 단원고 박준혁 학생이었다. 결과적으로 박준혁 학생은 구조된 게 아니라 스스로 헤엄쳐 물위로 떠오른 것이었다.

박준혁 학생 이후로 대한민국은 단 한 명의 국민도 구조하지 못했다. 6천 톤이 넘는 엄청난 크기의 배가 사고를 당하고 불과 1시간 30분만에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하고 304명이 희생된 말도 안 되는 참사가 세월호 사고이다.

그러나 아직 대한민국은 세월호 사고의 근본 원인에 대해 의혹만 쌓여가고 있다. 다시 돌아오는 4월 16일을 우리가 잊지 못하고, 잊어서도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태그:#세월호, #단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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