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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민과 이재오의 '정의'

때아닌 '정의' 타령이다. 지난 23일 밤 새누리당의 20대 국회의원 선거 공천을 받지 못한 유승민 의원과 이재오 의원 등이 탈당을 선언하면서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그때 '국민', '보수' 등과 함께 많이 언급한 단어가 바로 '정의'였다.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이 23일 오후 대구광역시 동구 용계동 자신의 선거사무소에서 새누리당 탈당 및 20대 총선 대구동구을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기 위해 도착하며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기자회견장으로 사용된 회의실앞에는 박근혜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다.
▲ 유승민 '새누리당을 떠납니다'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이 23일 오후 대구광역시 동구 용계동 자신의 선거사무소에서 새누리당 탈당 및 20대 총선 대구동구을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기 위해 도착하며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기자회견장으로 사용된 회의실앞에는 박근혜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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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정의가 아닙니다.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상식과 원칙이 아닙니다. 부끄럽고 시대착오적인 정치 보복일 뿐입니다. 정의가 짓밟힌 데 대해 저는 분노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원칙이 지켜지고 정의가 살아있고 상식이 통하는 세상입니다... 정의를 위해 출마하겠습니다. 권력이 저를 버려도 저는 국민만 보고 나아가겠습니다. 제가 두려운 것은 오로지 국민뿐이고, 제가 믿는 것도 국민의 정의로운 마음뿐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이 길을 용감하게 가겠습니다." (유승민 의원)

"정의롭지 못한 권력이 또아리를 틀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공천으로 이 피나는 노력은 무참히 사라지고 당의 모습은 허수아비가 되었습니다. 뜻있는 국민들과 당원들에게 권력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정의를 제대로 가르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은 비판을 두려워하고 비판을 봉쇄하고 부정한 권력의 줄 세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은 물러나지만 정의로운 국민은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긴 세월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체화된 제 삶의 철학입니다." (이재오 의원)

위에서 추론하는 바,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다음과 같다. 힘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상식과 원칙을 민주주의적으로 따르며, 비판도 겸허히 받아들일 줄 아는 것. 두 의원은 이를 정의로 규정했고, 현재 그 정의를 지키기 위해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다고 밝혔다. 졸지에 두 의원이 '정의의 사도'를 자청한 것이다.

무소속 출마 선언한 이재오 "잠시 당 떠나 돌아오겠다"
 무소속 출마 선언한 이재오 "잠시 당 떠나 돌아오겠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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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현재 여론은 우호적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유승민 의원의 '정의가 아니란 말이 비수로 꽂혔기 때문'에 소위 '옥새투쟁'을 하게 됐다고 밝혔으며,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탈당한 의원에 대한 동정론이 우세한 편이다. 현재 그들이 살아있는 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바, 그들이 말한 정의에 많은 이들이 일정 부분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들의 '정의'가 영 못마땅하다. 이는 단순히 그들의 정의가 틀려서가 아니다. 사실 정의란 단어는 쉽게 정의될 수 없다. 사전을 찾아보면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라고 정의되어 있지만, 무엇이 진리인지,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지에 따라 정의는 끊임없이 변화될 수밖에 없다.

그보다 내가 그들의 '정의'를 불편해 하는 것은 그 뜻이 아니라 그들의 자격 때문이다. 그들은 과연 정의를 운운할 수 있는 이들인가?

누가 정의를 말하는가

정의는 어디까지나 약자의 언어다. 강자는 약자를 처벌할 때 굳이 정의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힘이 있기 때문에 법을 세워 집행할 뿐이다.

그러나 약자는 다르다. 약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이요 정의다. 약자가 강자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뭇사람들의 동의와 응원이 필요한데, 그때 필요한 것이 명분이며, 그 명분의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정의이기 때문이다.

tvN <시그널>. 드라마를 관통하는 큰 주제는 정의였다
 tvN <시그널>. 드라마를 관통하는 큰 주제는 정의였다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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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방송되었던 드라마 <시그널>이 왜 그리도 인기를 얻었던가. 그것은 그 드라마가 정의를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아니 잊고 싶어 하는 정의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제기한 것이다.   

"거기도 그럽니까? 돈 있고, 빽 있으면 무슨 개망나니 짓을 해도 잘 먹고 잘 살아요? 그래도 20년이 지났는데, 뭐라도 달라졌겠죠?"

정의란 가난하고 힘이 없어도 노력한 만큼 보상받고, 죄를 지었으면 모두 똑같이 죗값을 치르는 것이다. 그것은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우리가 본능적으로 습득하고 있는 암묵지이며,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간에 변치 않아야 하는 진리이기도 하다. 정의가 없는 세상에는 희망이 발붙이기 힘들다.

그런데 하필 새누리당 유승민, 이재오 의원 등이 이 정의를 이야기하고 나섰다. 현재 최고 권력이 자의적으로 자신들이 정당하게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앗아갔기에, 약자의 언어인 정의를 들먹이며 명분을 쌓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약자 코스프레'이며 상황논리일 뿐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사회의 기득권층으로서 약자의 정의에 부합되는 일을 하지 않았다. 현재 그들이 속해 있는 새누리당이 추구하고 있는 가치와 정책들을 떠올려 보라. 말로야 서민경제 우선이지만 실제로는 강자들을 위한 것들뿐이다.

물론 유승민 의원의 경우 원내대표 시절 '증세 없는 복지'의 허구성을 이야기하며 주목받은 바 있지만, 아직까지도 그 진정성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재오 의원의 경우는 MB정부의 주축으로서 서민들을 위해 써야할 돈을 강바닥에 쏟아 부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찌 그들이 이제 와서 감히 정의를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안상구가 묻는다. 아직 정의가 남아있냐고
▲ 영화<내부자들> 안상구가 묻는다. 아직 정의가 남아있냐고
ⓒ (유)내부자들 문화전문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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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부자들>에서 이병헌(안상구 역)은 다음과 같이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정의? 대한민국에 그런 달달한 것이 아직 남아있는가?"

부디 정의를 욕보이지 말기를. 혹여 그렇게 당선이 된다면 약자의 유일한 명분인 정의를 위해서 제대로 활동해 주기를 바란다.

정의야, 네가 이 땅에서 고생이 많다.


태그:#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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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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