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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2016 총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엄청난 수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이제 낡은 시대는 끝났다며 새 시대의 가치를 요구했던 것이 무려 8년 전이다. 그 사이 견고한 듯 보였던 신자유주의는 끊임없이 동요했고, 무상급식 등 과거에는 한낱 말장난 같던 일들이 현실화되었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무엇이라도 될 것 같았던 희망은 최근 몇 년 동안 진행된 급격하고도 거대한 퇴행 앞에 하나 둘씩 자취를 감췄다. 20대 총선이 코앞에 와 있지만, 누구도 과거 뜨겁게 나누었던 새로운 체제, 새로운 비전의 청사진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 어느 한 세력만의 노골적인 퇴행 때문은 아니다. 새로운 시대의 비전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뿜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정치는 어떤가? 많은 이들의 희망을 등에 업고 출발한 19대 국회는 기실 그 어느 때보다 국민과 괴리된 채, 국가기관의 선거개입과 정당해산, 세월호 참사와 공안기관의 비대화 앞에 시종일관 무력했다.

그나마 이 괴리를 좁힘으로써 다시 한 번 정치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필리버스터 정국은 총선이 코앞에 있다는 서투른 변명 앞에 사그라졌다.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끝을 모르는 '계파 갈등', '공천 잡음', '비례대표' 논란이다. 총선에서 우리가 들어야할 이야기가 정말 이것뿐인가? 이런 논의가, 우리 정치의 미래를 조금이나마 밝게 해 줄 것인가?

대안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정책과 방법 또한 없는 것은 아니다. 언론은 거대 정당의 내부 투쟁만 주목한 채, 온 나라가 무슨 무슨 계파들의 쟁투장인 냥 만들고 있지만 지난 시절의 고민이 응축된 대안은 항상 존재했다. 문제는 그런 대안이, 새로운 비전이 어떤 주목도 받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정치상황이다.

우리는 시스템의 노예? 하승수의 정치혁명

하승수의 신간 <삶을 위한 정치혁명>은 잊고 있었던 우리의 대안, 우리의 청사진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작은 빛줄기다. 언론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는 소수 정당, 공천 계파 갈등의 이슈에서조차 낄 수 없는 원외정당인 녹색당 운영위원장인 하승수는 한 때 우리가 외쳤으나 지금은 침묵하거나 외면하고 있는 여러 의제를 매우 간략한 문체로 되살려 내고 있다.

하승수 녹색당 운영위원장은 한국 정치의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서는 아무런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삶을 위한 정치혁명 하승수 녹색당 운영위원장은 한국 정치의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서는 아무런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한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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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주목하는 것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시스템이다. 그는 '감히' 우리가 특정한 시스템의 노예라고 진단한다. 기성 정당은 공천 갈등의 명분으로 '사람 교체'를 내세우고, '정권 교체'를 이야기 한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사람교체이며, '어디'를 향한 정권교체인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한, 이런 교체론은 낡았다. 현재의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재의 시스템이 심각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노출하고 있다면 낡은 교체론은 실상 현상유지다.  

하승수가 제안하는 '삶을 위한 정치혁명'은 시스템의 교체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근본적이다. 살펴보자. 그는 한국 정치의 재난과 같은 지금 상황이 끊임없이 양당제를 만들어 내는 정치 시스템 때문으로 진단한다. 두 개의 지배 정당이 정치를 좌우하는 양당제는 보다 기득권 친화적인 쪽이 우위를 가지기 쉬울 뿐만 아니라 야당조차 우경화의 유혹에 빠지기 쉽게 만들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약자를 대표하는 강력한 정당이 등장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 양당제적 경향은 상대다수 소선거구제라는 선거제도가 만들어 낸 결과다. 즉, 정당이 국민들에게 얼마나 지지를 받았느냐와 상관없이 한 지역구에서 최다득표한 사람만 당선시킴으로써 새로운 정치의 열망은 이내 사라져 버린다. 우리는 이런 제도에 매우 익숙해져 있지만 힘 있는 기성정당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제도라는 점에서 사실 그리 민주적인 것은 아니다. 51%의 집단이 49%의 집단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민주적일까?

한국 정치상황은 여기에 더 심각한 문제도 덧붙여 있다. 이런 승부조차도 '아무나' 끼어 들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장 흔한 예로, 국회의원이 되려면 1500만 원의 기탁금이 필요하다. 이 기탁금 제도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사라졌다가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꾀하면서 부활시켰다.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려면 기탁금만 있으면 되는가? 그보다 10배 이상 되는 선거운동 비용도 필요하다. 우리 선거법은 돈 안 쓰고 할 수 있는 선거운동은 막고, 돈이 드는 선거운동은 풀어 놓았다. 게다가 안정적인 지지율이 보장되는 거대 정당은 15%이상 득표해 대부분의 선거운동비용을 (국민 세금으로!) 보전 받지만, 이제 막 도전장을 내미는 후보들과 소수정당은 고스란히 선거비용을 날릴 수밖에 없다.

기성정당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불합리함이 만들어 내는 양당제로의 압력이 각 정당 내부의 민주주의조차 말살되고 있는 형국과 만나면 도무지 선택의 여지를 발견하기 어렵다.

두 거대 정당을 보라. 국민은커녕, 당원들의 의사조차 반영되고 있는가? '보이는 손'과 '보이지 않는 손'이 선거에 나갈 정당의 대표를 좌지우지 하면서도 합리적 기준이나 온전한 설명이 제시되지 않는다.

대안이 없나, 있어도 안 하나?

그렇다면 대안은 뭘까? 하승수는 한국 정치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대안으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제안한다. 각 정당이 선거에서 득표한 비율대로 의석수를 나눠 갖는 방식이다. 40%의 지지를 얻은 정당은 전체 의석 중 40%의 의석만 가져간다. 이들이 개헌저지선을 넘어 의석을 얻어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7%얻은 정당은 21석을 얻어 원내교섭단체가 된다. 만년 소수정당으로 주변화되지 않아도 된다.

어떤가? 낯설거나 현실가능성이 없지 않느냐고? 설마! 이 방식은 2015년 2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우리 선거제도의 개혁방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이 방식은 이미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스웨덴, 뉴질랜드, 덴마크, 스위스, 필란드,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독일, 오스트리아, 스페인, 우르과이에서 시행되고 있고, 이와 유사한 비례대표제를 선택하고 있는 나라들도 많다. 그러나 2014년 현재 국고보조금으로 363억 원(새누리당), 338억 원(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받은 정당들은 현재의 방식을 고수 했다.

이런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 의회 내에 여러 정치적 견해를 가진 이들이 참여하는 다당제다. 국민들이 자신이 원하는 정당을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고, 더 쉽게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민주주의에 대한 만족도가 높게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자신의 봉급을 자신이 정하는 몇 안 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현상 유지'를 선택했다.

하승수가 '정치혁명'이라며 제안하고 있는 내용들은 대부분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도 인정했듯이 선거 관련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모범답안으로 합의된 것들이다. 그러나 '좋은 대안'은 항상 '현실정치 논리'에 무너졌다. 이를테면 "지역구를 줄여야 하는데 지역구 의원들이 거부한다"는 식이다. 국민들이 억대 연봉을 받는 의원들의 고용안정까지 걱정해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몇 사람의 '정무적' 판단에 따라 공천자리가 왔다 갔다 하는 현실이 변화를 거부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한국에서 '호세 무히카'가 나올 수 있을까?

하승수가 '정치혁명'이라 부르며 주장하고 있는 거대 양당의 기득권이나 새로운 정치세력 등장의 필요성, 변화를 원하는 국민들의 직접행동에 대한 요청은 꾸준히 나왔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주장을 넘어 그것을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실제로 구현하고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그런 점에서 녹색당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자기 당 내에서 먼저 시도하고 있는 드문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일례로, 녹색당은 대의원을 선거로 뽑지 않는다. 여론조사에서 표본을 추출하듯 전체 당원들을 대상으로 무작위 표집을 이용해 '선발'한다(10%의 소수자 할당 제외). 그러나 녹색당처럼 소규모의 정당이 소선거구제 하에서 1위를 차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하승수는 이런 정치환경에서는 우르과이의 '호세 무히카' 같은 대통령이 나올 수 없다고 진단한다. 2015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호세 무히카는 월급의 90퍼센트를 기부하고 퇴임 후 낡은 농가와 1987년식 자동차 한 대가 재산의 전부였던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는 수식어로 유명하지만, 재임 기간 동안 불평등 감소와 소수자 인권보호를 위해 애써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농부 출신에 도시게릴라 활동, 장기간의 옥살이 경험을 가진 무히카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대통령 결선투표, 선거연합이 보장되는 정치시스템이 존재하는 우르과이였기 때문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떨까? 친노, 진박, 비박, 탈박에 '공천 패권'이라는 말까지 등장하고 있는, 아니 이런 정치행위가 자연스럽게 정당화되는 현 시스템이 과연 최선일까? 두 거대 정당에 실망하고 있는 유권자들에게 제3의 선택지는 보장되고 있을까? 그들이 국민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내부 권력다툼에 치중하고 있는 이유가, 다름 아니라 지금의 시스템으로는 제3의 선택지가 위력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무히카 같은 정치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정치인이 있어도 현 시스템 하에서는 유의미한 성적을 올릴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기 위해, 기성정치에 대한 불만을 냉소주의로 대체하기 전에, 잠시 언론이 주목하지 않고 있는 소수정당에 눈을 돌려봐도 좋을 것이다. 하승수의 '삶을 위한 정치혁명'은 그런 점에서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간결하고, 얇다.

덧붙이는 글 | 하승수 지음. "시스템의 노예에서 시스템의 주인으로: 삶을 위한 정치혁명". 한티재. 154쪽.



삶을 위한 정치혁명 - 시스템의 노예에서 시스템의 주인으로

하승수 지음, 한티재(2016)


태그:#하승수, #녹색당, #정치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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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생활속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입니다.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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