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쟁쟁한 경쟁작을 물리치고 작품상을 받은 작품은 톰 매카시 감독의 <스포트라이트>였다.

이 영화의 장르는 고발영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고발영화와는 결이 많이 달랐다. 아니, 격이 달랐다.

노골적인 악행, 안 봐도 관객은 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 윌터 로빈슨(마이클 키튼 분)은 고발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 윌터 로빈슨(마이클 키튼 분)은 고발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 팝엔터테인먼트


악마 같은 가해자와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자극적인 가해 장면. 그의 악행에 치를 떨며 영화를 보던 관객들을 만족하게 해줄 통쾌한 결말. 한국인들이 익숙한 고발영화는 이런 형식을 가진다. 이런 종류의 영화를 보고 난 후, 관객들은 영화 속 사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가해자가 얼마나 악랄했는지를 기억한다.

그러나 <스포트라이트>에는 괴물이 없다. 메인 악역과 그의 악행이 노골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도 등장하지 않는다. 잔혹한 가해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관객의 분노를 불같이 불러일으킬 장면도 존재하지 않는다. <스포트라이트>는 돌을 던질 대상을 명확히 제시하는 대신, 질문을 던진다. 누가 가해자인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 영화는 단순히 '신부의 아동 성폭행 사건이니까 신부가 가해자지, 신부 나쁜 놈!' 같은 간단한 결론을 허락하지 않는다. 감독은 순수하게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과 밝혀지는 사실들만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다른 영화에 비해 단조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영화의 전개 속에서 관객은 사건의 본질을 생각하게 된다.

자극적인 장면이 없어도 관객은 사건의 심각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섣불리 분노하지 않는다. 영화 속 기자들의 취재과정을 자연스레 따라가면서 단순해 보이는 하나의 사건 뒤에 얼마나 많은 가해자가 존재하는지를 알게 된다.

영화는 피해자를 직접 성폭행한 사람만 가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권력을 이용해 사건을 덮으려는 이들,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는 책임자, 책임을 묻기는커녕 사건 축소에 가담하는 가족들, 파장이 두려워 쉬쉬하는 불특정 다수와 무관심으로 사건을 내버려둔 이들까지. 어느 하나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인정하기 힘든 사실을 전한다. <스포트라이트>는 끔찍한 사건을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가능하게 한 시스템을 고발한다.

오락영화로서의 고발영화에 익숙해져 있던 관객들에게 <스포트라이트>는 고발영화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에서 수년간 고발영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음에도 사회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한국 고발영화는 관객의 분노를 일으키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분노는 강한 원동력이지만, 항상 그 분노는 하나의 사건, 가해자 개인에게만 책임을 돌린다. 개별 사건에 관한 관심을 환기하거나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제2·3의 사건을 방지하는 데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쁜 건 백윤식·유아인만이 아니다

 영화 <내부자들> 이강희(백윤식 분)와 영화 <베테랑> 조태오(유아인 분).

영화 <내부자들> 이강희(백윤식 분)와 영화 <베테랑> 조태오(유아인 분). ⓒ 쇼박스/CJ엔터테인먼트


지난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화 <내부자들>. 이 영화를 본 관객이 보인 일반적인 반응은 특정 언론세력을 비난하는 것이다. 백윤식이 능글맞은 연기로 악역의 악행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정 언론세력에 대한 분노만으로 정경유착이나 언론의 부패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영화 <베테랑>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본 이들은 유아인이 얼마나 악역을 잘 소화했는지, 영화의 모티브가 된 폭력사건이 있었던 기업이 어디인지 찾아 욕하기 바빴다. 정웅인이 왜 그런 수모를 당해야 했는지, 구조적인 문제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반응은 그저 관객의 탓이 아니다. 영화가 관객이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극적인 것을 더 잘 기억한다. 감독들도 그것을 안다. 그래서 최대한 말초신경을 자극할 만한 영상을 만들어낸다. 이병헌의 팔에 톱질하고, 여성들의 나체를 보여주며, 심지어는 성기로 폭탄주를 만든다. 악역을 최대한 악랄하게 그려내고 무너뜨린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흥행공식이었다. 공식을 따른 <내부자들> <베테랑> 모두 흥행에 성공했고, 관객은 시원한 고발영화의 등장에 환호했다. 그리고 그 공식을 벗어난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한국에서 누적 관객 수 27만1853명(영화진흥위원회 제공, 2016. 3. 14 기준)이라는 터무니없는 성적표를 받았다.

상업영화로서 <스포트라이트>는 <베테랑> <내부자들>의 성적에 크게 못 미친다. 묵직하고 깊이 있게 사건을 고발하는 <스포트라이트>가 노골적으로 사건을 전달하는 여타 영화들 보다 재미없게 느껴졌을 것이다. 많은 영화가 한국 관객들을 그렇게 길들였다. 하지만 재밌는 영화가 좋은 고발영화는 아니다. <스포트라이트>가 한국 관객들에게 전달한 메시지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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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것도, 할 것도 많지만 현실은 공사다망

오마이뉴스 스타팀에서 방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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