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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쉬 리버 캐니언 전경 지구상 두 번째로 큰 대협곡이다 ⓒ 김경수
꼬리 끝 독침을 곧추세운 전갈 먹잇감을 찾아 사방을 더듬거렸다. ⓒ 김경수
정오를 넘어서자 태양이 머금은 열기를 거세게 뿜어댔다. 후끈 달궈진 지표면도 쉴 새 없이 지열을 토해냈다. 볕을 가릴 그늘은 애당초 기대할 수 없었다. 잡목들 사이로 날카로운 가시가 돋친 아프리카 아카시아가 듬성듬성 자라나 있었다. 모래 바닥에는 생존을 위한 미물들의 몸부림이 여기저기 목격됐다. 메뚜기들이 뒤엉켜 싸우다 이긴 녀석이 패자의 몸통을 뜯어 먹었다. 전갈은 꼬리 끝 독침을 곧추세우고 먹잇감을 찾아 사방을 더듬거렸다.

레이스 3일째가 되었지만 아직도 피쉬 리버 캐니언(Fish River Canyon) 대협곡의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허벅지가 대바늘만한 가시에 찔릴 때 지르는 외마디 비명소리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사막레이스에서 선수들이 가장 힘든 것은 배낭의 무게다. 배낭의 하중은 허리와 하체로 이어지고, 발바닥은 물집이 터지면서 만신창이가 된다. 고통을 견뎌내지 못한 선수는 자신의 식량을 모래 속에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캠프에 들어오면 풍성한 만찬을 즐길 수 있다.

2009년 5월, 시각장애인 송경태씨와 나는 지구상 두 번째로 큰 대협곡인 남아프리카 나미비아의 피쉬 리버 캐니언을 출발해서 나미브사막 거쳐 대서양 해안도시 루데리츠(Lüderitz) 까지 5박 7일 동안 260km을 달리기 위해 빈트후크(Windhoek)에 도착했다. 23개국에서 모여든 207명의 선수들은 흡사 스파르타 전사의 모습이었다. 협곡 주변은 오랜 세월 풍화작용이 빚어진 기암괴석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경기가 시작되자 선수들은 괴성을 지르며 날선 돌들이 가득한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따라 미끄러지며 내려갔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지만 선수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출발 장면 260km 나미브사막 레이스 ⓒ 김경수
260km 나미브사막 레이스 여정 부시맨의 흔적으로 따라 ⓒ 김경수
협곡 아래를 향하는 선수들 선수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배낭이다. ⓒ 김경수
일상만큼이나 치열한 사막의 현실은 정글의 늪에 빠져 허덕이듯 모두를 기진맥진하게 했다. 선수들은 오늘도 태연하게 주로 위의 푯대에게 길을 묻고 다음 푯대를 향해 전진을 계속했다. 어제의 완주는 오늘 두 발로 나미브사막을 품을 수 있다는 보상으로 충분했다. 

레이스 4일째, 나미비아 북서쪽 할렌버그(Haalenberg)까지 다다랐다. 드디어 나미브사막을 가로질러 대서양 해골해안(Skeleton Coast)으로 향하는 100km 무박 2일의 롱데이 코스에 섰다. 지구상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사막, 일 년 중 300일 이상 태양이 불타는 곳,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앙골라, 보츠와나에 둘러싸인 나미비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사막. 선수들은 부시맨의 고향인 나미브사막으로 들어선다는 기대감으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나미브 사막 앙골라와 보츠와나에 둘러싸인 곳 ⓒ 김경수
푯대를 향한 전진 나미브 사막 더 깊은 곳으로 ⓒ 김경수
안개가 자욱한 새벽녘, 모래 위에 쪼그리고 앉아 꼼지락거리는 스테노카라 딱정벌레를 물끄러미 내려다 봤다. 녀석은 등 돌기에 머금고 있던 물을 꽁무니로 들어 올려 머리 쪽으로 흘러내리는 이슬로 수분을 보충했다. 나는 지금 시시각각 압도하는 대자연 앞에서 알량한 생존 본능마저 상실해 가고 있다. 적응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 딱정벌레에게 조롱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피부를 녹여 내릴 기세로 이글거리는 태양, 갑자기 찾아든 낯선 이방인들을 경계하듯 나미브사막은 바람마저 숨을 죽인 채 선수들을 예의주시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심한 물집으로 속살이 드러나거나 피부화상으로 고통스러워했다. No pain, No gain. 무엇이든 대가 없이 거저 얻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나는 부시맨의 흔적을 따라 나미브사막으로 더욱 깊숙이 빠져 들었다. 
기진맥진 한 선수들 잠시 머무는 CP에서 ⓒ 김경수
No pain, No gain 나를 지탱시킨 생존 본능 ⓒ 김경수
레이스 5일째, 송경태씨와 나는 28시간을 달리고 굴러 80km 지점까지 왔지만 제한시간에 걸려 탈락할 위기를 맞았다. 앞으로 더 가야할 거리는 20km, 남은 시간은 5시간! 10km 당 평균 3시간 반 정도 걸린 것을 감안하면 제한시간 안에 캠프까지 도착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운영요원들은 저승사자처럼 우리 뒤를 바짝 쫓아왔다.

몸 안의 모든 에너지가 소진된 상태에서 그의 손목을 움켜잡고 말했다. "형님, 저를 따를 수 있지요?" "꼭! 따라야 합니다." "기절만 하지 마세요." 그리고 초지와 암반의 산 능선을 따라 10km를 정신없이 달려 1시간 30분 만에 아홉 번째 구간을 통과했다. 목이 타들어갔다. 심장이 폭발할 듯 거세게 박동 칠수록 내 몸은 더욱 빠르게 광활한 대자연에 동화되어 갔다.
급경사의 내리막길 위험천만한 여정 ⓒ 김경수
얼룩말의 머리뼈 치열한 약육강식의 단면 ⓒ 김경수
이제 캠프까지 남은 거리는 10km. 2시간 20분이 남았다. 5분여의 달콤한 휴식 후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모래언덕과 듄의 능선을 따라 사력을 다해 기어올랐다. 하지만 캠프는 보이지 않고, 모래와 자갈이 뒤섞인 광야만 까마득히 펼쳐졌다. 다시 한참을 돌아 오른쪽 계곡으로 들어서자 광야 건너편으로 스프링복(Springbok) 캠프가 시야에 들어왔다. 간신히 20분의 여유를 남겼다.

그런데 캠프를 200m 남겨 놓은 지점에서 앞서갔던 후미그룹 선수 7명이 망설임 없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손을 맞잡고 캠프에 다가가자 입구에 모여든 각국의 선수들과 운영진이 환호와 열광으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힘겨웠던 33시간여 레이스의 노고를 격려하며 위로해 주었다. 모두의 눈가에서 극한을 견뎌낸 격정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생애 최고의 고난과 환희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사막에 서면, 나는 대자연이 아닌 내 자신의 나약한 일면을 주적삼아 끊임없이 긴장시키고 채찍질하며 달려왔다. 사막에서 얻은 자양분은 바로 일상에서 녹여낸다. 주변 환경이 힘겹고 고비의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낙담보다 정을 든 석공의 심정으로 자신을 다듬고 담금질할 때 그 결과는 나의 삶을 더 강하게 한다. 최선을 다한다고 누구나 최고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광의 순간은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전유물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캠프를 향하여 나를 기다려준 후미그룹 선수들과 함께 ⓒ 김경수
격정의 포옹 내 생애 최고의 순간 ⓒ 김경수
태그:#사막, #오지, #김경수, #오지레이서, #나미브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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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핑계삼아 지구상 곳곳의 사막과 오지를 넘나드는 조금은 독특한 경험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오지레이서라고 부르지만 나는 직장인모험가로 불리는 것이 좋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지난 19년 넘게 사막과 오지에서 인간의 한계와 사선을 넘나들며 겪었던 인생의 희노애락과 삶의 지혜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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