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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이 2일 이종걸 원내대표의 발언을 마지막으로 필리버스터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김종인 더민주 비대위원장과 박영선 비대위원이 필리버스터 중단을 강하게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박영선 비대위원과 함께 MBC에 몸 담았던 MBC 해직기자 출신 이용마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본인의 허락을 받아 싣습니다. [편집자말]
국회의장에 의해 직권상정된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한 야당의원들의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이 지난 1일로 8일째를 맞았다. 지난 1일 오후 국회본회의장에서 필리버스트를 하던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여당과 거대정보기관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필리버스터를 중단할 수 밖에 없다", "과반 의석을 주시면 국민여러분이 원하는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눈물 흘리는 박영선 의원 국회의장에 의해 직권상정된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한 야당의원들의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이 지난 1일로 8일째를 맞았다. 지난 1일 오후 국회본회의장에서 필리버스트를 하던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여당과 거대정보기관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필리버스터를 중단할 수 밖에 없다", "과반 의석을 주시면 국민여러분이 원하는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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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선배

선배를 맨 처음 만난 건 2001년 5월쯤이었을 겁니다. 당시 경제부에서 금융권을 담당하던 제가 선배를 만난 건 어쩌면 대단한 행운이었습니다. 선배가 진행하던 <경제매거진>의 마지막 방송에 제가 갑자기 파견되어 방송을 했지요.

제 아이템은 구조조정과 관련된 노동자 문제였던 걸로 압니다. 선배는 제 아이템에 대해 좋은 평을 해주셨고, 저 역시 <경제매거진> 폐지에 저항하던 박 선배의 심정을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인연이었는지 다른 팀원들과 함께 선배의 집에 초대되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뒤 박 선배는 경제부장으로 영전했습니다. 저는 대단히 짧았지만 인상 깊었던 만남으로 인해 선배에게 인간적인 호의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선배가 경제부장으로서 보여줬던 모습은 너무 큰 실망이었습니다. 재벌의 이익을 옹호하는 논리에서 한 치의 벗어남이 없는 경제부 기사에 깜짝 놀랐습니다. 박 선배의 경제부 논조는 '조중동'의 반복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제가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지요. 박 선배와 제가 경제문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함께 경제부에서 일을 한 적도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기대와 너무 다른 박 선배의 경제관에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경제부를 운영하던 박 선배가 어느 날 열린우리당에 입당했습니다. 이것은 사실 놀랄 일이었죠. 야당과 비슷한 경제관을 가진 분이 갑자기 여당으로 갔기 때문이지요.

연이어 나를 당혹하게 만든 박 선배

그런데 박 선배는 저를 또 한 번 당혹하게 만들었습니다. 박 선배가 국회 재경위를 맡아 재벌을 비판하며 심상정·김현미 의원과 함께 주목받는 여성 의원 3인으로 거론되었기 때문이지요.

경제부장 시절 누구보다 재벌 비호에 앞장섰던 분의 갑작스러운 변신이 너무 혼란스러웠습니다. 막후에서 시민단체 출신 비서관이 박 선배에게 재벌 비판 논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그럴듯한 소문도 들렸지만 그러려니 했습니다. 국회에서 좋은 일을 하면 그만이니까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강경 투쟁을 선언한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국민공감혁신위원장이 지난 2014년 8월 26일 오전 청와대 옆 청운·효자 주민센터 유가족 농성장을 찾아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 위로하는 박영선, 유가족은 냉랭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강경 투쟁을 선언한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국민공감혁신위원장이 지난 2014년 8월 26일 오전 청와대 옆 청운·효자 주민센터 유가족 농성장을 찾아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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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정치권에서 승승장구하던 박 선배가 저를 다시 놀라게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원내대표가 되어서 세월호특별법 협상을 할 때입니다. 세월호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박 선배가 보여준 나이브함과 과단성에 무척 당혹했습니다.

'주변에서 함께 논의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나' 하는 의혹이 들 정도로 소통이 되지 않는 독단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연속 말이지요. 세월호 사안은 여야가 적당히 주고받을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박 선배가 세월호 때 보여주었던 문제가 이후 정치과정에서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내에서 소위 비주류가 합법적으로 선출된 주류 당 대표를 흔들 때, 적당히 중립지대를 차지하면서도 비주류에 편향된 많은 행보를 보았습니다. 안철수 의원이 탈당할 때 함께 나가지 않으며 좌고우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급기야 이번에는 여야의 중간지대에 서서 필리버스터를 그만두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셨더군요.

필리버스터 중단, 투표할 생각이 뚝 떨어집니다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비대위원과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지난 2월 12일 오전 국회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실에서 열린 선대위-비대위 연석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비대위원과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지난 2월 12일 오전 국회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실에서 열린 선대위-비대위 연석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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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선배는 항상 저를 놀라게 하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분입니다. 그건 아무래도 적절한 타이밍의 결단력과 과감한 추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박 선배는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두고 보좌를 잘 받으면 추진력이 있어서 큰일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독단으로 인해 대형 사고를 칠 수 있습니다.

세월호 특별법 문제나, 이번 필리버스터 중단 문제가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하기 전에 많은 소통이 필요합니다. 특히 박 선배의 개인적인 정무적 판단이 많이 작용한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박 선배에게는 조중동의 사고방식이 이미 내면화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열린우리당에서 재벌을 비판하던 때를 제외하면 박 선배의 모습은 사실 일관됩니다. 조중동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죠. 재벌 비판으로 잠시 가려졌을 뿐이지요.

이런 얘기가 이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박 선배 주장대로 야당이 필리버스터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입니다. 다음 달 투표할 생각이 뚝 떨어졌습니다.

제가 돌아가야 할 MBC를 생각하면 야당이 과반을 차지해야 하고, 그럴 수 있다고 지금까지 자신을 스스로 독려해왔지만, 필리버스터 중단으로 그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생각입니다. 누가 바보에게 지휘봉을 맡기려고 하겠습니까? 야당이 여야 지지자 양측에서 모두 비난을 받으니 '야당 심판론'이 '정권 심판론'보다 높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오늘 밤은 잠이 쉽게 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태그:#필리버스터, #무제한 토론, #박영선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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