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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는 국회법 제 106조 2에 의거한 합법행위입니다. 저는 헌법 37조를 위반하는 테러방지법에 반대하며 이를 막기 위한 필리버스터를 응원합니다."

SNS 상에서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지지 운동 내용이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3주년을 맞은 25일, 대한민국은 지금 필리버스터로 나뉜다. 테러방지법에 반대하는 필리버스터에 나선 야당의원들에 '응답'하는 국민과 상황 자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이들, 직접 참여하는 야당 의원과 먼 산만 바라보는 여당과 국민의당 의원들, 그리고 테러방지법에 대한 찬반 여론까지.

그 사이, 더불어민주당(아래 더민주)과 정의당의 필리버스터는 2박 3일째 이어지는 중이다. 25일 오전 10시 현재 김제남 정의당 의원이 7번째로 국회 본회의장 연단에 오른 상태. 그에 앞서 '10시간 18분'의 은수미 더민주 의원을 비롯해 같은 당 김광진, 최민희, 유승희 의원, 국민의 당 문병호, 정의당 박원석 의원 등이 발언에 나섰다.

누구는 헌법을, 누구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누구는 또 언론 보도를 인용하며 테러방지법 반대와 박근혜 정권의 실정에 대한 '사이다' 발언을 쏟아내는 중이다. 그렇게 생중계를 접하는 국민들은 실시간 '마이국회텔레비전'을 목도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 이후 43년 만에 그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 집권 시기에 부활한 필리버스터란 정치행위를 만끽할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

반면, 열기를 더 하는 필리버스터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오만상을 찌푸리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다. 필리버스터가 그렇게 누군가의 민낯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선두엔 책상을 쾅쾅 치며 분노했다는 박근혜 대통령이 자리하고 있다.  

대통령님, 책상은 무슨 죄인가요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4일 오전 청와대 충무실에서 열린 제8차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4일 오전 청와대 충무실에서 열린 제8차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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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한테도 맞아본 적 없는데! 잘도 나를 때렸겠다! 나를 때렸겠다!!"

일명 '박근혜가 때린 책상'(‏@Hammered_desk)이 트위터에 나타났다. 그렇다. 책상이 무슨 죄인가. 24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주재한 올해 첫 국민경제자문회의 자리에서 야당이 필리버스터를 강행 중인 것과 관련해 책상을 여러 번 내리치며 분통을 터트렸다는 보도가 나간 직후 만들어진 패러디 계정인 셈이다. 실제로, 이날 회의 자리에서 나왔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역시나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것들이었다.

"이것은 정말 그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들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불안하고 어디서 테러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그런 상황 하에서 경제가 또 발전할 수 있겠나."
"19대 국회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이 국회가 끝나기 전에 적어도 국민에게 할 수 있는 도리는 다 하고 끝을 맺어야 하지 않겠느냐."

대통령의 발언을 갈무리하자면 이쯤 될까. '기억에도 없는 필리버스터가 뭔지도 잘 모르겠다. 테러를 포함한 '비상시국'이라고 내가 규정한다(짐이 곧 국가다). '경제발전'은 언제나 만병통치약이다. 임기 끝나가는 19대, 필리버스터고 뭐고 어서 끝나라. '콘크리트 지지층' 국민들은 언제나 내 편이다.' 

미국의 버니 샌더스도, 한국의 고 김대중 대통령도 필리버스터에 나섰다는 사실을 박근혜 대통령은 알까, 모를까. 번역기가 필요한 화법으로 '경제'와 '국민'을 들먹이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제발 공부 좀 하시라"는 요구가 쏟아지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오죽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필리버스터 30분도 못할 것"이란 한탄이 쏟아질까.

안철수의 양비론, 순진해서 안타깝다?

안철수 공동대표가 지난 24일 오전 서울 마포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안 공동대표는 "적절한 국민 프라이버시를 보장한 테러방지법은 필요"하다며 "국회 의장과 각당 대표들이 합의를 도출할 때까지 국민의당도 중재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안철수 공동대표가 지난 24일 오전 서울 마포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안 공동대표는 "적절한 국민 프라이버시를 보장한 테러방지법은 필요"하다며 "국회 의장과 각당 대표들이 합의를 도출할 때까지 국민의당도 중재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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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 타자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였다. "테러방지법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여당이나 막아서는 야당이나 무능함 그 자체"라며 정치평론가와 같은 논평을 내놨다. 2번째 주자로 필리버스터에 나선 같은 당 문병호 의원마저 깔아뭉개는 '셀프디스'에 가까웠다. 이날 오후, 안철수 대표는 트위터를 통해 다시금 필리버스터에 대한 의견을 내놨다.

"국민의당 입장은 분명합니다. 안보에 대해선 초당적 협조가 필요합니다. 테러방지법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우리 국민의 인권과 프라이버시 침해 우려도 적절한 법적 통제권을 통해 충분히 법안에 반영돼야 합니다.

국회의장과 각 당 대표가 합의를 도출할 때까지 끝장토론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필리버스터를 끝내고 대테러방지법을 합리적으로 수정해 통과시키는 방안입니다. 국민의당도 적극 참여해 중재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필리버스터가 끝나는 순간 바로 테러방지법을 날치기할 명분을 주게 됩니다. 목표는 잘못된 조항을 고치는 것입니다. 이대로 통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국민은 이미 인권과 프라이버시 침해로 인해 역사적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을 해왔습니다."

'요약해 보자. 직권 상정은 나쁘다. 더민주와 정의당의 필리버스터 역시 상정 요건이 충족되지 않은 법안의 직권상정을 정당화하는 행위라 만족스럽지 못하다. 필리버스터가 끝나면 날치기다. 테러방지법 자체는 필요하다. 그러나 독소조항이 문제다. 그러니까, "끝장토론"을 하자.'

끝장토론이라니.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자체가 국회 내 토론은 끝났다는 선포라는 것을 안철수 대표는 진정 모르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대표로서 문병호 의원의 필리버스터를 막아야하지 않았겠는가. 유독 짧았던 문 의원의 발언은 야당 지지자들을 위한 면피이자 요식행위였던 건가. 반대로,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라는 국민의당의 구호에 부합하는 자세인걸까.

그런 점에서 페이스북을 통해 즉각 "이 기계적 양비론 발언 두고두고 기억하겠다"며 "순진한 것인지 우매한 것인지 모르겠다"던 조국 서울대 교수의 비판은 경청할 만하다.  

"현재 의석 구조 하에서 이 법안이 직권상정된 상황에서 필리버스터로 막지 않고 어떻게 해야 그런 절충이 가능한지 모르는가? 필리버스터를 해서 국민적 여론을 환기, 집결시킬 때만 야당은 유리한 절충할 힘과 시간이 확보되며, 이를 기초로 유리한 안을 관철시킬 수 있다. 국회 논의 테이블에 여당 간사와 마주 앉아 이 법의 문제점을 설교하면 받아줄 것 같은가?"

분노하는 야당, 호도하고 축소하는 종편과 공영방송

필리버스터가 가리키는 흥미로운 지점은 또 있다. 바로 여당 의원들을 볼모(?)로 잡아 놓고 있다는 점이다. 원칙적으로, 야당 의원들이야 발언 중인 의원을 빼고는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 직권상정 법안이기에 필리버스터 종료를 기다렸다 바로 투표에 나서야하는 여당의원들이야말로 국회에 상시대기해야 하는 상태인 셈이다. 물론, 필리버스터 와중에 여야가 막후 협상에 돌입할 가능성이 크지만.

필리버스터란 복병을 만난 새누리당의 반응이 원유철 원내대표의 말마따나 "경악과 분노"인 것은 아이러니의 극치다. 필리버스터의 부활은 박근혜 대통령을 필두로 여당이 찬성했던 국회선진화법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혜성처럼 떠오른 이가 있었으니, 바로 홍철호 새누리당 의원이다.

그는 은수미 의원의 필리버스터 당시 "토론자가 테러방지법과 관련 없는 (실업)급여를 가지고 발언하니 제재해야 한다"라고 강하게 항의했다. 이후 홍철호 의원은 필리버스터를 두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회가 왜 욕 먹는지 알겠다"고 부연했지만, 정작 욕을 먹은 것은 엉뚱한 '굽네치킨'이었다.

홍철호 의원은 굽네치킨에 생닭을 공급하고 있는 한 닭 가공업체의 대주주. 최근 이 업체가 김포 지역의 한 경로당에 생닭 1만 2천여 마리를 제공한 것을 두고, 김포시민단체와 홍 의원 측이 선거법 위반 공방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지난 24일 홍 의원의 발언이 논란이 되면서, 일각에선 '굽네치킨 불매운동'으로 번지기도 했다.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튄 셈이다. 

숟가락을 얹으려다 뭇매를 맞은 곳은 또 있다. 은수미 의원의 필리버스터 기록을 두고 "요실금 팬티까지 준비했다는 얘기가 있다, 요실금 팬티까지 입고 장시간 기록을 세우시겠다"는 패널의 발언을 여과 없이 내보낸 TV조선의 뉴스쇼 <뉴스를 쏘다>가 그 주인공이다.

강선아 더민주 부대변인은 이날 오후 "TV조선 <뉴스를 쏘다>는 필리버스터를 통해 테러방지법의 독소조항을 자세히 설명하려는 우리당 의원들에 대한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논평을 내놓기도 했다.

종편이 패널들의 발언을 여과없이 내보내며 테러방지법을 호도하고, 필리버스터 자체를 폄훼하고 있다면, 지상파 뉴스는 청와대의 여당 편을 들거나 애써 축소하기에 바쁜 인상이다. 공영방송 KBS가 대표적이다. 24일부터 이어진 굵직한 헤드라인만 봐도 답이 나온다.

"'국민 희생 후 통과?'…법 처리 지연 비판"
"野 이틀째 필리버스터…與 '정치쇼 그만'"
"박 대통령 '국민 희생 후 통과시킬 건가' 비판"
"김무성 '모레 필리버스터 중단·선거법 의결될 것'"

43년 만에 부활한 필리버스터가 던져 준 화두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4일 새벽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 반대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하고 있다.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4일 새벽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 반대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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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댓글공작 사건으로 집권 초반을 날려버린 박근혜 정권이 이른바 "인권 탄압법"이라 불리는 테러방지법을 강행하고 있다. 일각에서 국가보안법 강화에 맞먹는 카카오톡 사찰이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거세지고 있다.

그 와중에 필리버스터에 나선 야당 의원들의 발언을 생중계로 접하고 "테러방지법의 실상을 깨닫게 됐다"는 국민들이 적지 않다. 우리에게도 장시간 명명백백하고 논리정연하게 발언을 이어갈 수 있는 국회의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반응까지 나올 정도다.

반면 괜한 책상을 괴롭히며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낸 박근혜 대통령마냥 '민낯'을 노출시키는 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 속내를 간파하고, 옥석을 가리는 것이야말로 필리버스터에 대한 관심과 열기를 총선까지 그대로 이어가는 길일 것이다. 43년 만에 부활한 필리버스터, 분명 이 생소한 정치행위가 한국정치와 국민들에게 던져준 화두가 꽤나 묵직하다.    


태그:#필리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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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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