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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16일 오전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국정에 관한 국회 연설을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16일 오전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국정에 관한 국회 연설을 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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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것이 왔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박근혜 대통령의 '안보위기 여론몰이'에 굴복했다. 정의화 의장은 23일 오후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테러방지법)' 제정안을 국회 본회의에 직권 상정했다.

이에 앞서 새누리당은 이날 오전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국회 정보위원회를 단독으로 열어 테러방지법과 사이버테러방지법을 상정했다. 더민주당과 야당은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방해)로 맞섰다. 하지만, 국회법상 필리버스터가 종료되는 순간 본회의에서 표결 처리되므로 법안 통과를 막는 데는 한계가 있다.

'기-승-전-테러방지법' 시나리오는 박 대통령이 16일 국회 연설에서 테러방지법 통과를 강조한 이후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연일 언론 플레이를 하면서 총력전을 펼칠 때부터 예상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4차 핵실험에 대해 개성공단 폐쇄로 맞불을 놓은 가운데 '안보 위기 프레임'을 가동해 테러방지법 처리에 '올인'하는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테러방지법 직권 상정까지의 과정을 짚어보면 잘 짜인 한편의 '기-승-전-결' 시나리오를 보는 듯하다.

起 박근혜, 承 이철우, 轉 이병기-김무성, 結 정의화

국회 정보위원회 여당 간사인 새누리당 이철우 의원이 국회 정론관에서 테러방지법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국회 정보위원회 여당 간사인 새누리당 이철우 의원이 국회 정론관에서 테러방지법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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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의 16일 국회 연설이 기(起)에 해당한다면, 18일 국회에서 열린 '긴급 안보상황 점검 당정협의회'는 승(承)에 해당한다. 정보위 여당 간사인 이철우 의원은 이날 회의에서 국정원이 "김정은 위원장이 대남 테러, 사이버 테러에 역량을 결집하라고 지시했으며 북한 정찰총국이 이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국정원은 또한 북한이 ▲장관 등 정부 인사나 탈북자를 상대로 독극물 공격이나 납치를 감행할 가능성 ▲북한을 비판하는 언론인에게 소포ㆍ편지를 발송하거나 신변 위해를 기도할 가능성 ▲지하철, 쇼핑몰 등 다중이용시설과 전력, 교통 등 국가기간시설을 대상으로 테러를 벌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껏 테러 위협으로 인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전(轉)은 대통령비서실장과 여당 대표의 몫이었다. 19일 오전 청와대는 예정에 없던 이병기 비서실장의 국회 방문일정을 공지했다. 이병기 비서실장은 이날 정의화 의장과 여야 대표를 찾아가 전날의 '김정은 대남테러 준비 지시' 첩보를 전하면서 테러방지법의 조속한 입법을 촉구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이병기 실장과 면담 후 기자들과 만나 테러방지법의 입법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테러방지법은 IS 같은 국제 테러단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하고, 또 북한이 저렇게 호전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언제 어떤 방법으로 (IS와 같은) 국제 테러단과 손잡고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를 상황에서 국민을 보호하고자 하는 법이다."

여당 대표도 IS의 테러 위협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현실성과 절박감이 부족하다고 느낀 것일까? 북한이 IS와 손잡고 벌일지 모를 어떤 일(테러)에 대비해서도 테러방지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국면 전환(轉換) 치고는 너무 나갔다. 왜 그런 지는 뒤에서 설명한다.

박근혜 "테러 방지 법체계 미비 IS도 알아버렸다"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이  테러방지법 등 쟁점 법안의 조속한 처리를 요청하기 위해 국회를 방문해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이병기 실장 등 청와대 참모진은 정의화 국회의장과 여야 지도부를 차례로 만나 북한의 테러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현실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하고 테러방지법의 조속한 처리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이 테러방지법 등 쟁점 법안의 조속한 처리를 요청하기 위해 국회를 방문해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이병기 실장 등 청와대 참모진은 정의화 국회의장과 여야 지도부를 차례로 만나 북한의 테러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현실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하고 테러방지법의 조속한 처리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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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16일 국회 연설에서 "우리 사회 일부에서 북한 핵과 미사일 도발이라는 원인보다 '북풍 의혹' 같은 음모론이 제기되는 것은 가슴 아픈 현실"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정부의 대북강경책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보는 시각 자체가 음모론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야당은 박근혜 정권의 '정치적 의도'에 대해 여전히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우선 '김정은 대남 테러, 사이버 테러 역량 결집 지시' 첩보를 전한 이철우 의원은 국정원 출신이다. 이병기 비서실장은 국정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차장 출신으로 비서실장 직전에 국정원장을 지냈다. 두 사람은 팔이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다는 의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게다가 이병기 실장은 대법원의 유죄판결이 확정된 97년 안기부 북풍 공작 당시 권영해 부장과 함께 안기부 수뇌부였다. 그러니 야당이 테러방지법에 '올인' 하는 국정원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다.

테러방지법의 입법 취지도 '오락가락 좌충우돌'이다. 국내에서 테러방지법 제정 요구가 분출된 직접적 계기는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조직 IS(이슬람국가)가 지난해 11월에 저지른 파리 테러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박 대통령은 12월 8일 국무회의에서 '테러방지법의 부재'를 알림으로써 IS를 이롭게(?) 하는 경솔한 발언을 했다.

"우리나라가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법체계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IS도 알아 버렸다."

국정원 요원이 IS에 침투해 있으면 모를까, 한국에는 테러를 방지하는 법체계가 없다는 사실을 IS가 알고 있다는 것을 박 대통령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아무튼 한국에는 테러를 방지하는 법체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IS의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테러방지법이 필요하다고 했던 박 대통령이 개성공단을 폐쇄해 긴장을 고조시켜놓고선 "북한이 언제 어떻게 무모한 도발을 감행할지 모르고 테러 등 다양한 형태의 위험에 국민들의 안전이 노출되어 있다"고 하니, 여당 대표는 '북한이 IS와 손잡고 테러를 벌일 가능성에 대비해 테러방지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황당한 논리까지 개발한 것이다.

북한이 IS와 손잡을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정의화 국회의장이 23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하기 앞서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23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하기 앞서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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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IS와 손잡을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한국의 집권당 대표가 걱정하는 가능성을 알아버린 북한과 IS가 이 참에 손잡는 것은 아닐까? 다행히(?)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현재 국정원이 파악하고 IS의 북한제 무기 구매동향' 질의에 대한 국정원 답변에 따르면, "북한이 IS를 대상으로 직접 무기를 판매하는 동향은 현재까지 포착된 바 없다"는 것이다. 국정원은 "다만, 북한이 시리아 등 중동국가에 재래식 무기를 수출한 바 있어 IS가 북한제 무기를 시리아군으로부터 탈취하거나 국제암시장에서 구입해 사용할 개연성은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테러방지법이 없어 테러에 대비한 국제공조도 제대로 할 수가 없고 (다른 나라와) 정보 교환도 할 수 없다'는 박 대통령의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테러방지법'이라는 이름의 법이 없을 뿐, 한국에는 각종 테러에 대응하기 위한 법과 제도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많다. OECD 국가 중에서 모든 국민이 주민등록제도와 지문 채취로 정부의 촘촘한 감시를 받는 가운데, 국내외 정보수집권과 국가보안법 수사권을 가진 비밀정보기관이 온•오프라인에서 광범위하게 시민들의 사생활을 들여다보고, 10만 경찰력과 60만 군대가 치안과 국방을 유지하고, 기소독점권을 가진 검찰이 강력한 수사권을 행사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사실 서울은 '북한 리스크'를 제외하면 테러 위협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도시로 정평이 나있다. <뉴스위크>(한국판) 최신호는 인구 10만명 당 피살자 수를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인 도시 톱50'을 보도했다. 1위인 베네수엘라 카라카스를 필두로 한 50개 폭력도시를 대륙별로 보면, 북미주(15위 세인트루이스 등 미국 4개), 아프리카(9위 케이프타운 등 남아공 4개) 도시를 제외한 42개가 중남미 국가 도시였다. 아시아 국가 도시는 하나도 없었다. 최근에는 인도네시아에서 테러가 발생하는 등 IS 테러가 동남아로도 확산되는 추세이다. 그러나 IS의 우리나라에 대한 테러위협을 평가한 국정원의 국정감사 보고 내용을 보면 이렇다.

"IS가 미국의 동맹국을 대상으로 '무차별 보복'을 선언한 바 있으나 미군의 근거지 공습 등으로 해외에서 테러를 자행할 여력이 없는 데다 한국 내에서도 IS 동조세력이 거의 없어 우리나라를 겨냥한 테러 가능성은 낮다. 다만, 중동권 테러 위험지역에 체류중인 우리 교민-관광객 및 정부의 여행 경보를 무시한 성지 순례객 및 지상사원 등의 테러 위험이 있고, IS 연계세력이 동남아에서 활동 중이어서 불특정 다수를 노린 다중이용시설 테러의 간접 피해 가능성도 상당하다."

10년간 북한 소행 추정 테러는 1건뿐

최근 10년간 국내 및 해외에서 북한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내국인 상대 테러 현황을 보더라도, 국내에서 북한 소행으로 추정(확인)된 내국인 상대 테러는 2011년 9월에 발생한 탈북민 암살기도 사건 1건뿐이다. 국정원은 당시 북한 정찰총국 지령을 받아 만년필-손전등형(型) 독총을 휴대하고, 대북전단을 살포해온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를 암살하려고 접촉을 시도한 탈북자 안○○(59)을 체포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해외에서 북한 소행으로 추정되는 한국인 테러 사례는 지난 10년간 세 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2011년 중국 단둥에서 정체불명의 괴한으로부터 독극물 피습을 받고 사망한 선교사 김창환씨 등 북한 소행으로 추정된 해외 발생 한국인 테러는 대부분이 조-중 국경지대에서 반북 또는 대북 선교활동을 펼치다가 피습 또는 납치당한 경우이다. 조-중 국경지역에서의 이런 피습과 납치는 불법적 행위이지만, 이슬람권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납치된 경우처럼 이 또한 정부의 신변안전 책임을 벗어난 일탈 행위다.

그런데도 정부-여당은 '테러가 발생하면 야당이 책임질 것인가'라고 말한다. 기-승-전-테러방지법은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발생하지도 않은 테러를 앞세워 야당 책임으로 연결시키면서 국회를 겁박한 결과다. 그러나 느닷없는 개성공단 전면 중단과 사드(THAAD) 배치 협의로 한반도의 긴장을 한껏 고조시켜 놓고서, 국회에 테러방지법을 통과시켜 달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병(病)을 주고 약을 만들어내라고 독촉하는, 일종의 '자해공갈'이다.

테러방지법은 대(對)테러 활동에서 국가정보원의 정보수집 권한을 확대하고, 범정부 차원의 테러대응기구를 설치하는 것이 골자다. 냉전의 종식과 남북화해협력 분위기 조성으로 인한 남파간첩의 감소 등으로 '일감'이 줄어든 정보기관에게 대테러 업무는 국가안보의 당면한 과제이자 새로운 직역의 확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테러방지법 제정은 통신비밀보호법 개정과 함께 국정원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테러방지법은 그동안 정보수집권을 어느 기관에 주느냐를 두고 갈등을 빚어왔다. 국정원의 권한 남용을 우려하는 더민주당은 국민안전처에 주자는 반면에, 새누리당은 국정원에 주는 쪽을 고수했다. 그러나 정보수집권을 국민안전처에 주더라도 기획-조정권을 갖는 국정원 직원의 파견근무가 불가피하므로 업무혼선만 빚을 뿐이다. 정보수집권은 국정원에 주는 것이 정상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으로 내국인 감청폭을 확대한 조항과 수사기관이 아닌 국정원에 '대테러조사 및 테러위험인물 추적' 권한을 준 것이 더 문제일 수 있다. 이는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규정한 영장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또한 국정원의 권한 남용을 감시하는 인권보호관 제도를 둔다고 하지만 그 권한이 불명확하고, 국정원이 외부인의 감시-통제가 어려운 비밀정보기관인 점을 감안하면 역부족이라는 지적이다.

북한은 KAL 858기 폭파사건을 계기로 88년 1월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국으로 등재되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8년에야 북한은 테러지원국에서 해제되었다. 그 이후에도 북한은 천안함 피격(2010년 3월, 46명 사망-실종), 연평도 포격(2010년 11월, 4명 사망) 사건 같은 도발을 계속해 왔다. 그럼에도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없다. 남-북한은 교전당사국으로서 정전상태에 있기 때문에 테러가 아닌 것이다. 결국 한반도 평화는 테러방지법이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것이 답이다.


태그:#국정원, #테러방지법, #통신비밀보호법, #IS, #평화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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